萍 - 창고 ㅈ ~ ㅎ/커플링 법칙

6 원효대사와 자루도끼

浮萍草 2014. 8. 7. 19:31
    몸 속의 생태학을 모르고서는 스스로의 몸의 정체성을 알 수 없다. 여기 당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뇌가 연동되어 빚어내는 다채로운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인간 행동학의 세세한 빛과 그림자를 따라가 보라. 그러면 인간 이해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ㆍ남녀 관계의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대세는 일부다처제인가, 일처다부제인가?- 때 섹스심볼이었던 마릴린 먼로는 자기의 주치의였던 정신과 의사 랄프 그린슨에게“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오르가즘을 느껴본 일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 때 그가 바로 죽기 전의 나이 36살 때였다. 오르가즘을 여자가 느낀다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인 현상만도 아니고 일시적인 감정만의 현상도 아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육체에서 일어나는 전기적인 자극과 이 자극이 일정하게 쌓여서 스파크를 일으키고 그것이 서서히 두 사람 신체 속의 교감 신경과 부교감 신경의 균형을 완벽하게 조절해주는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때 그래서 감성과 신체의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그것은 두 사람의 체질적인 조건이 완벽히 맞아떨어질 수 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거의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유사 오르가즘,또는 니어 오르가즘,또는 불완전한 또는 불충분한 오르가즘이지 진앙지의 잠재된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도록 터져나오는 대폭발과는 다르다. 그래서일까? 이런 완전 합일의 대폭발을 바랐던 고승이 한 사람이 있었다. 신라의 고승 원효 대사다(이하의 내용 중에는 일부 필자의 ‘커플링 법칙’에서 따온 내용들이 있다). 6세기 초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는 요승도 괴승도 아닌 전대미문의 걸출한 학승이 한 사람 살고 있었다. 바로 원효대사 얘기다. 그는 경북 경산 출신의 승려였다. 그때 그는 이미 서라벌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 인사였다. 그런데 그는 미친 사람도 아니었지만 이상한 노래를 부르면서 시중을 떠돌고 다녔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허락하지 않으려나? 나는 하늘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하건만.’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원효가 말한 ‘자루 없는 도끼’는 자루가 없는 도끼의 받침 구멍,즉 여성의 성기를 뜻하고 자루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는 것을 당시로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원효다운 하나의 암유법이라고나 할까. 원효는 이미 이 때 여성의 ‘구멍’이 만들어내는 또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은밀하고 비밀스런 생식의 결과를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의 ‘나는 하늘 밭일 기둥을 다듬고자 하건만’하는 이 영탄조의 호소가 사뭇 의미심장한데 원효가 마음에 둔 여인은 다름 아닌 태종 무열왕의 딸인 요석 공주였고 결국 그는 요석 공주의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허락을 받아 그녀와 합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바로 설총이었다.
    파격을 일삼던 원효의 이미지에 비교적 근접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원효의 모습.15세기에 그려진 일본 고잔지
    (高山寺) 소장본인 원효대사 영정
    미친 짓을 가장하고 다녔지만 그의 범상치 않은 인간 됨됨이와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학승으로써의 도저한 그의 학문 수준을 이미 높이 평가하고 있던 태종 무열왕은 원효를 부마로 기꺼이 삼아 거두어 들였다. 그는 자기의 성기와 요석공주의 성기를 동시에 은유의 수법으로 암시하는 반 산문적 표현으로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바로 자기의 생식기와 딱 맞아 떨어지는 그 대상을 도끼의 자루와 구멍 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원효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하는 의문이다. 원효는 아랫돌 중심에 박는 중쇠에 윗돌의 구멍을 맞추는 맷돌처럼 한 치의 오차 없는 기계적 밀착성에 그리고 여기서 생기는 남녀 간 합환(合歡)의 쾌락을 상상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사대(射臺)를 떠난 화살을 과녁에 맞히는 관정의 기쁨을 노래하고 싶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두 사람의 몸과 마음이 하나로 연동되는 싱크(synchronization)의 천하무비성 합일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는 그의 소설 ‘11분’에서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각자의 시계 바늘이 동시에 같은 시각을 가리켜야 한다.” 자루와 구멍 대신 코엘료는 시계 바늘의 같은 방향을 말하고 있다. 신은 인간에게 수십 수백만의 남녀 가운데서 누구든 한사람을 성 선택의 대상으로 골라잡을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러나 신은 인간이 그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골라잡을 수 있는 상대를 수수께끼처럼 비밀로 만들어 놓았을 리가 없다. 누가 나에게 가장 적합한 짝인지 아는 것은 자기와 상대의 신체적 정체성이 딱 맞아 떨어질 때에만 가능한 일인데 바로 그게 누구인지 신은 그것을 비밀로 해놓았다. 마치 암호화 해 놓은 것 같다. 나에게 코드가 맞는 상대란 단순한 생식기의 접합성이 맞느냐 여부를 따지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원효도 자기의 생식기를 하늘을 받친 기둥(천주-天柱)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겠는가. 두 인간의 진선진미한 완벽한 결합이라는 것은 알고 보면 그처럼 얻기 어려운 신성한 일이다. 한 때 서울대학교의 국문과 강의에서 국문학자인 가람 이병기 선생이 강의 중에 한 말이 학생들 사이에 회자된 적이 있었다. 어느 땐가 가람은 신라의 설화인 처용을 강의 중이었다. 그 때 강의실에는 몇 명의 남학생들 사이에 끼어 한 명의 여학생이 홍일점으로 강의를 듣고 있었다. 처용이 밤새도록 경주 시내를 돌아다니며 놀다가 집에 들어와 보니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침한 장면을 보고 화를 내기보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마누라를 빼앗긴 처용의 딱한 처지를 설하던 가람 선생은 이 대목에 이르러 “그놈의 구멍이 뭰지...”하고 장탄식을 했다고 한다.
    이 세상에 원효가 찾던 자루 없는 도끼는 그만이 끼워넣을 수 있는 구멍을 가졌고 요석 공주가 찾던 자루는 그녀만이 담아낼 수 있는 자루였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구멍과 자루는 절대 떨어질 수 없는 다시 말해 남의 구멍에는 들어가지도 들어갈 수도 없는 또 남의 자루는 탐하지도 담아낼 수도 없는 그런 도끼였을까. 불륜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배제한 신성한 구멍과 자루였을까. 일호의 하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구멍과 자루의 완벽한 합궁이란 우주가 허여해 준 생명의 물을 담고 있는 그릇을 완전히 비워낼 수 있는 두 사람만의 빨대였을까. 원효는 워낙 신통한 신불의 점지력을 가진 고승이었으니까 그렇다 치고 보통 사람들은 그런 두 사람만의 생명수를 길어 올릴 수 있는 빨대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Premium Chosun        허경구 국제정치문제연구소 이사장 aronge7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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