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11 매국노 이완용은 절세미녀 맏며느리와 불륜관계였나?

浮萍草 2014. 5. 22. 11:05
    1. 한일합병으로 일본 귀족 작위 받은 조선 당파인 64명 중 56명은 노론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 조약 강제체결 공로의 대가로 일제로부터 귀족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자들은 모두 76명. 이 중 당파가 확인된 64명 중 노론이 56명이었고 소론은 6명,북인이 2명,그리고 남인은 한 명도 없었다. 매국노 이완용은 노론으로 훈1등 백작 작위와 은사금 15만원(현재가치로 치면 현금 200억~300억원)과 수천 만평의 토지를 받았다. 또 1919년의 3·1 운동 진압 공로로 1920년 후작으로 승급했다. 그의 토지 재산은 1억 3천만평까지 증식되어 당시 조선 최대의 부자였다고 한다. 조선을 일본에 팔아먹은 집단의 대다수는 노론세력이었다. 그들은 명국 황제를 조선 임금의 임금으로 모신 송시열의 추종자들인 노론세력이었다. 일본이 강해지자 그들은 사대(事大)의 대상을 명국 황제에서 일본 천황으로 바꾸어 생각하고 한일합병에 앞장섰고 한일합병은 조선의 장래를 위해서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2. 노론 매국노 이완용은 절세미인 며느리와 불륜관계였는가?
    이완용이 절세미인 맏며느리 임씨와 깊은 불륜관계였다는 내용은 황 현의 매천야록은 물론 1910년 1월 5일자 대한매일신보 시사평론과 1910년 2월 20일자 대한민보 시사만평(아래 그림)에도 실렸다. 이 내용은 당시 장안의 최대 화제였다. 지금 같으면 모든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도배하였을 것이다. 두 사람이 살을 섞는 애정행각을 두 눈으로 본 목격자는 없었던 것 같아 어떤 이들은 이완용과 며느리와의 불륜은 허위이며 당시 조선인들의 매국노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추측에 불과하다고도 한다.

    독립협회 발족에도 참여했던 이완용은 25세에 과거에 합격해 관직에 나가 일찍 영어를 배우고 1887년,1888년 두 번이나 미국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서구의 실정을 조선의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세력이 강해지자 그는 열강의 세력판도 분석에 열중하였고 그 세력의 향방에 따라 보신 방향을 선택하는 이기적인 처세만을 하다가 급기야 매국까지 주도하였다. 나라도 팔아먹는 더럽고 추한 이완용이므로 미인 며느리를 보고 그냥 놔 둘리 없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당시 조선인들은“아니 땐 굴뚝엔 연기가 안 난다”는 속담을 믿었다.
    ㆍ3. 이완용 7대 직계 조상 이만성은 예학과 노론의 리더 송시열의 제자
    이완용은 우봉 이씨 판중추부사 이호준(이완용 생부와 32촌 사이)의 양자인데 이호준의 직계 조상은 대대로 노론의 거물들이었다. 아래 그림은 이완용의 가계도이다. 이완용 양부 이호준의 7 대조 이 숙은 우의정을 했고 그 아들 이만성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제자였다. 이만성의 숙부 이 영도 조선 예학의 대가이며 노론 거두인 김 집(김장생의 아들)의 제자였다. 송시열도 김 집의 제자였다. 이 예학과 노론의 최고 리더들인 송시열과 김 집의 제자들 후손에서 매국노가 탄생한 것이었다. 예학을 자기의 생명보다 더 중시한 노론 집안의 후손인 이완용과 그 아들 이항구는 일제로부터 매국의 대가로 각각 후작과 남작 작위를 받았다. 손자 이병길은 이완용의 후작을 세습 받아 3대가 친일 작위 귀족이 되었다. 이 명문 노론의 집안에서 나라 팔아먹는 것까지도 부족해 이완용이 맏며느리 임씨와 한 이불 속에서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소문이 난 것이다. 과연 노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Premium Chosun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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