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8 조선 중흥 이룬 정조의 몰락 원인은 며느리 잘못 들인 것

浮萍草 2014. 4. 22. 06:00
    나라 재정 아끼려 하루 두끼 3가지 반찬
    옷 기워입고 방 도배도 아껴
    
    1. 사도세자 죽을 때 부왕 영조의 속마음은 살려주고 싶었을 것
    1762년 더위가 한창인 7월 영조(조선 21대왕)가 세자(이름 선(愃))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을 때 세자는 부왕한테“아버님! 아버님! 이제는 말 잘 들을 터이니 제발 살려 주세요! 살려주세요!” 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애원을 하였다. 왕은 세자의 장인 좌의정 홍봉한이 사위를 위해 왕명을 거두라고 왕에게 간청할 것을 마음속으로 기대하였을 것이다. 좌의정 홍봉한이 목숨을 걸고 주청하면 그를 따르는 노론 대신들이 강력하게 세자를 살리라고 간청을 하게 되고 노론의 지지를 받는 왕은 못이기는 척하고 세자를 살려줄 수도 있었고 왕의 체통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홍봉한은 사위가 고통 속에 죽어 가는데도 말 한마디 없었으니 그 누구도 세자를 살려주라고 주청할 수 없었다. 영조실록에는 홍봉한이 영조의 결단에 찬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음 그림은 사도세자의 생애와 죽음 과정을 나타낸 것이다

    28세의 젊은 세자는 아버지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쌀뒤주 속으로 들어갔다. 세자는 7월의 무더위에 1m³ 정도로 좁은 뒤주 안에서 9일 동안 허리와 다리도 못 편 구부정한 자세로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고통 속에 굶어 죽어갔다. 뒤주 안에 갇힌 채 9 일이 지나 세자가 죽을 때까지 세자를 살려달라고 간청한 사람은 세자의 어린 아들 이산(후에 정조) 이외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왕은 아들이 죽은 후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였다. 정치 싸움으로 단 하나 밖에 없는 불쌍한 내 아들만 죽었고 정치하는 놈들은 천하의 악질이고 짐승보다 더 한 놈들이라고 속으로 이를 갈고 후회하였으나 스스로 저지른 엄청난 자신의 과오는 되돌릴 수 없었다. 2. 정조 모친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가 죽을 때 외면
    정조의 모친이며 사도세자의 부인인 세자빈 홍씨는 홍봉한(본관 풍산)의 딸이다. 사도세자는 자결의 명령을 받은 당일 부왕에게 불려나가기 직전 죽음을 예견하고 학질병을 핑계 대기 위해 어린 아들(정조)의 방한모를 쓰고 부왕 앞에 나가려 하였으나 세자빈 홍씨가 반대하였다. 그러자 세자가 세자빈에게“자네 정말 무섭고 흉한 사람이네” 라고 쏘아 붙이자 어쩔 수 없어 세자빈은 아들의 방한모를 주었으나 세자는 말없이 자기 방한모를 쓰고 나갔으며 이것이 이들 부부의 마지막 대화였다. 세자가 아들의 방한모를 쓰고 부왕 앞에 나가려 한 것은”제가 바로 당신이 사랑하는 손자의 아버지“라는 것을 은연중 보이면서 부왕의 부정에 호소해 용서를 받으려는 시도였다. 아래 그림은 사도세자와 부인인 세자빈 홍씨와의 부부관계를 그린 것이다.

    세자빈 홍씨는 왜 죽음을 면하려고 발버둥치는 남편의 마지막 청을 거절했을까? 홍씨 거절의 뜻은 죽으려면 너만 죽지 왜 아들을 끌고 들어가느냐 하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었고 세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보통의 여인네라면 남편이 시아버지에게 죽게 된다면 아무리 시아버지가 무섭고 두려워도 시아버지 앞에 나가 통곡을 하면서 하나 뿐인 손자를 보아서라도 남편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홍씨의 경우 만약 남편인 세자가 죽지 않고 왕위에 오를 경우 세자의 정치적 적대세력인 그녀의 친정 아비지의 목숨은 물론이고 친정 집안 자체가 풍지 박산이 날 것은 뻔하였다. 그녀는 훗날 아들이 왕이 될 가능성을 예견하면서 남편을 외면하고 친정을 택하였다. 3. 정조, 효장세자의 아들로 왕위에 오르며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외쳐
    정조(조선 22대 왕 이름 산(祘))는 11세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당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정조는 일생 동안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살았다. 왕가이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이 비극적인 가족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은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들이었다. 사도세자는 생모 영빈 이씨의 사랑도 못 받았고 아내에게 미치광이 대접을 받았으며 급기야 아버지한테 죽임까지 당했으니 정말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었다, 오직 어린 아들(후에 정조)만이 “할아버지! 할아버지! 제발 아버지 살려 주세요” 하고 애걸하였다. 정조는 비극적 죽음을 당한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 사랑하고 또 사랑하였으나 이 세상에 없어 그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망령을 가슴에 부여안는 슬픔 속에 살았다. 영조의 왕위 계승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사도세자의 유일한 적자(嫡子) 이산이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사형을 당한 중죄인이라서 그 아들 이산은 왕위 계승이 어렵고 아버지의 반대당파인 노론에 의해 살해당할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 이산은 다행히 할아버지 영조의 덕으로 죄인이 된 사도세자의 이복형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어 왕위 계승권을 갖는 세손이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영조가 죽은 뒤 겨우 왕위에 올랐다. 법상으로는 정조는 효장세자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1776년 3월 등극할 때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외쳤다 이는 사도세자를 죽게 한 세력을 보복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공부를 많이 한 대학자 정조는 아버지의 원수에 대한 보복은 빨리 그리고 작게 끝내고 세종대왕 이후 최대의 문예부흥을 이루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개혁 하다 49세 때인 1800년 세상을 달리했다. 4. 정조의 백성을 위한 성왕 국가 경영 철학: 왕의 국가경영권 강해야
    정조는 성왕(聖王)이 됨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성왕이 됨은 하늘의 뜻에 따라 신하를 거느리고 백성을 위하는 국가경영을 말한다. 그는 왕이 백성을 위해서 일하려면 신하들이 왕을 위해 충성하고 봉사해야 한다며 왕권 강화를 주장했다. 이것은 기업이 고객을 위한 경영을 하려면 경영권 강화가 필요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왕권이 강화가 되어야 백성을 위한 효과적 효율적 국가 경영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부왕의 덕을 많이 본 세종대왕과 달리 어러셔 부친이 비극적으로 죽는 슬픔을 당했고 왕이 되어서도 적대 세력에 시달려야 했으나 아래 그림과 같이 국가 경영자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5. 정조 하루 두 끼 3가지 반찬에 옷 기워 입으며 재정 절약 위한 구조조정
    대장금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조선시대의 왕이 그 드라마의 내용처럼 호화스럽게 먹으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다.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고 믿은 조선의 왕들은 항상 가난한 백성을 생각해야 하므로 검소하게 식사를 해야 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면 비난을 받아야 했다. 특히 영조와 정조가 가장 검소한 왕들이었는데 정조는 평상복은 무명으로 지어입고 해지면 기워서 입었다. 하루에 두 끼만 먹으면서 쇠고기는 금하고 반찬도 보통 3-4가지 이하로 하였다. 요즘 한국의 서민들이 220년 전 왕인 정조보다 훨씬 더 좋은 음식을 먹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왕이 거처하는 방도 도배를 자주 하지 않아 벽이 그을음으로 시커멓게 배었으니 요즘 새로 이사를 가면 멀쩡한 내부를 허물고 새로 인테리어 하는 한국인들은 좀 배워야 할 것 같다. 국가 공문서나 외교문서 등은 최고급 종이를 사용하였으나 정조가 채제공과 심환지 등 대신들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서신의 편지지는 휴지 재생지들이 많았다. 당시 조선의 궁궐안의 급여 받는 궁녀 수는 대략 500-600 명 정도였다. 정조는 궁녀제도를 완전히 없애려 하였으나 계조모 정순왕후(경주 김씨,영조 계비,노론 벽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왕의 수발을 드는 대전의 궁녀 전원 100여 명만 모두 없애 버리고 하급관리 몇 명으로 대체하였다. 정조는 국가 및 궁중재정과 국가행정인력 축소의 구조조정을 위해 강력한 개혁 세력이 필요했다. 다음 그림은 정조의 개혁세력 구축과 개혁과정을 그린 것이다.

    6. 대학자인 정조 규장각을 설치, 서얼 등용해 밤새 왕과 정치 논해
    정조는 즉위 즉시 규장각을 설치하고 친위 개혁세력을 키우면서 문화정치를 내세웠다. 그는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등의 기능을 규장각에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왕권의 핵심조직으로 키웠다. 규장각에서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였는데 특히 400년 전 조선 왕조 초기에 제정된 문물제도가 오래되어 속오례의 국조보감, 대전통편 등을 새로 간행하여 조선후기 사회에 맞게 재정비하였다. 정조 자신이 대학자라서 조선 27명의 왕들 중 유일하게 180권 100책에 달하는 홍재전서라는 문집을 간행하였다. 그는 탁월한 성리학의 대가이어서 임금이며 스승 즉 군사(君師)라 자처하며 신하들을 리드하였다. 규장각에 신진학자들을 수혈하기 위해 검서관제도를 신설하고 검서관의 신분은 파격적으로 서얼로 하였다. 북학의의 저자이며 중상주의 실학의 대학자 박제가를 비롯한 유득공,이덕무,서이수 등 4명의 서자들이 검서관으로 활약을 하였다. 후에 이들은 군수 등 외방관직에도 나갔다. 정조는 이외에도 중인이하 계층의 위항인들의 위항문학도 적극 지원하는 등 사회적 신분질서의 타파를 위해 노력하였다.
    ▲ 정조(왼쪽)와 서자 출신의 천재 실학자 박제가

    규장각은 총 74명 정원의 조직으로 당시로는 거대 조직이었다. 규장각에선 고유 업무일지인 내각일력과 왕의 동정을 기록한 동정록을 작성하는 등 많은 책을 출판하여 문예부흥의 중추가 되었다. 규장각 관리들은 왕의 행차 시 동행하였고 왕과 밤이든 새벽이든 때를 가리지 않고 정사를 논하였고 관료의 부정도 적발하여 탄핵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그들은 삼사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기능은 물론 사관과 승지의 역할까지도 담당하고 재상의 일에도 관여 하였으니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실의 비서관들 이상으로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정조는 이 조직을 친위세력으로 하여 새로운 국가를 향해 강력하게 개혁해 나갔다. 7. 3년 연구하는 초계문신들 요즘 연구소나 대학보다 엄격한 연구평가 받아
    1781년 정조가 시작한 초계문신제도는 세종 때 시작한 사가독서제와 비슷한 제도로서 37세 이하의 당하관(정3품 이하)들 중에서 선발하여 직무를 면제하고 3년간 연구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이다. 3년간 단순히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1개월에 2회 구술고사와 1회 필답고사를 실시하는 등 연구평가도 확실하게 하여 지금 한국에서 실시하는 대학과 연구소들의 연구 평가관리 시스템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뛰어났다. 이 초계문신 제도 실시로 관리들에게 유학과 경전의 참뜻을 공부하게 하였고 이들의 연구를 국정에도 적용하였다. 19년 동안 정약용, 이가환 등의 대가들을 포함하여 총 138명의 초계문신들이 선발되었다. 이들 초계문신들도 정조의 친위세력이 되어 규장각과 함께 개혁과 문예부흥의 중심 고급 인력으로 활동하였다. 8. 개혁을 위한 군제개편과 화성 신도시 건설
    정조는 활쏘기를 즐겼다. 단순한 즐김이 아니라 무술연마 목적으로 한 것이고 국가는 문과 무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고“무예도보통지” 등 병서와 무예 훈련교과서를 많이 편찬하고 지금 현대군대가 도강 시 설치하는 부교인 배다리의 공법을 정약용을 시켜 완성했다. 개혁으로 인하여 기득권을 상실하는 권력층들의 반발을 가장 효과적으로 무마하기 위해서는 일사불란한 군 지휘체계의 장악이 필요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 이후 정권을 잡고 일사분란하게 경이적인 빠른 속도로 경제개발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도 군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 초까지 조선군 장수들은 병조판서(국방부 장관)의 지휘를 전혀 받지 않아 군은 장수들의 세상이었다. 정조는 전체 5군영을 3군영으로 개편하고 3군영의 모든 지휘권을 병조판서에게 주었다. 그리고 새로운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였는데 규모는 5,000 명 정도로 하였고 임무는 서울과 수원 등 서울 주변의 방위 임무를 맡겼다.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와 수도군단과 같은 부대였다. 장용영대장은 어영대장과 동격으로 만들어 힘을 실어 주었다.
    ▲ 화성 신도시 장안문 밖의 모습

    정조는 계획 신도시 건설을 위해 수원부를 화성으로 승격시키고 3품관인 수원 부사를 정2품관(현재 장관급)인 유수로 승격시켰다. 정1품 대신 심복 채제공을 품격을 낮추어 수원유수로 임명하고 화성 신도시 건설의 총책임을 맡겼다. 이 때 정양용이 기중기를 만들어 돌 등 무거운 것들을 들어 올려 공기단축에 큰 역할을 하였다. 1796년 단 28개월 공사에 완성된 정조의 화성 신도시 건설은 외부로부터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다는 기득권과 권력층이 뿌리를 깊게 박고 있는 서울로 부터 행정기능을 신도시 화성으로 옮겨 그들을 몰아내려는 의도였다. 권력층을 제거해야만 새로운 국가를 위한 강력한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고 기득 권력층 제거 후에는 화성으로 수도를 옮겨 그가 목적하는 국가를 건설하려 했을 것 이다. 9. 백성 민원 해결 위한 백성 고객 지향적 국가 경영
    정조는 백성의 민원을 직접 찾아 나서기도 했다. 백성들이 임금이 행차하는 길에서 억울한 것을 고하게 하였고 이 민원은 3일 내에 빨리 처리하게 하였다. 이것을 격쟁이라 했는데 정조가 백성에게 직접 사안을 물어보고 일일이 그것에 대한 결정을 다 챙겼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 시작한 암행어사제도는 정조가 가장 많이 활용하여 재위 25년 동안 총 113회 암행어사를 파견했다. 춘향전을 보면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탐관오리 변학도를 징벌하는 통쾌한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암행어사의 활동이 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로 사헌부의 6품직이 임명되었고 감사와 같은 2품 고위직 이상의 고관도 내사하여 권한이 막강하였다. 그러나 암행어사가 임무수행 하러 가는 도중에 때로는 산적 등을 만나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길에서 병들어 고생도 했다고 한다. 특히 영조 때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는 충청도 서산 지방으로 갈 때는 그 지방 양반들의 텃새가 너무 강해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어 충청도 쪽으로 어사 나가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라도 지방으로 가면 밥도 잘 주고 특히 밥맛이 좋아 다른 지방보다 전라도 지방으로 어사 나가기를 좋아 했다고 한다. 이는 암행어사가 초라한 민간인의 행색으로 신분을 감추어서 다녀야하기 때문에 겪는 일화의 하나이며 실제로는 상당히 어렵고 고달픈 임무였을 것이다. 다음 그림은 정조가 백성의 고통을 해결하는 경영을 요약하여 그린 것이다

    10. 링컨보다 62년 앞선 공노예 해방과 인권신장
    조선은 조일전쟁(임진왜란)후 도망간 노비들을 잡기 위해 1655년 노비추쇄도감을 설치하였는데 정조 때 와서 노비추쇄도감을 폐지하였고 함부로 노비를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정조는 대신들에게 노비명단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서 공노비 해방을 계획하고 노비신분의 상속을 아주 없애려다가 1800년 죽었으나 1801년 그의 노력의 결과로 중앙관청의 모든 공노비가 해방되었다. 조선은 초기부터 형벌에 관한 규정이 경국대전에 있었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는 관리들의 형벌의 남용이 심하였다. 사형수가 아닌 사람을 규격보다 큰 몽둥이를 사용하여 때려죽이거나 함부로 주리를 틀거나 불로 지져 죽이는 등 정도가 매우 심하였다. 정조는 죄수들의 고통에 대하여도 많은 생각을 하였다. 목에 씌우는 칼(형틀)을 사용 못하게 하고 심문기간에는 옥안에서 결박을 못하게 하였다. 형벌의 남발을 막고 규칙과 규격에 어긋나는 형벌도구를 사용하지 못하게 법제화하였다. 억울한 죽음을 없애기 위해 세종 때 만든 법 의학서를 1792년 중수무원론이라는 법의학서로 다시 만들어 지방감영까지 보급하여 시체 검사의 과학적 접근법과 공정성을 확보하여 수사를 과학화 했다. 다음은 정조의 서얼 출신 지식인을 중요 관료로 임명하는 인사제도 혁신과 인권신장을 위한 국가 경영을 그린 것이다.

    11. 정조 개혁은 미완성 그의 사후 조선 붕괴로, 한국 경영후계자 문제 시급
    정조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풀어주고 그들의 인권신장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중 개혁을 완성 못하고 1800년 49세에 죽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는 정순왕후(영조 계비 정조의 계조모 노론 벽파)의 독살설이 유력하나 확실하지 않다. 그는 죽기 전 세자빈으로 자기에게 온건적이었던 노론 시파 김조순(안동 김씨)의 딸을 맞았는데 이것이 조선 붕괴의 지름길이 되어버렸다. 노론 시파이며 왕비의 친정 세력인 안동 김씨가 흥선대원군 출현 때까지 약 60년 간 권력을 독점하고 휘둘러 정조의 개혁성과는 다 증발되고 조선은 아래 그림과 같이 붕괴의 길을 달렸다. 역사상 잘못된 후계자 선정으로 패망한 국가와 조직은 많다.

    정조의 가장 큰 실책은 세자빈을 노론의 집안에서 데려 온 것이었다. 조선 후기 노론 세력의 뿌리는 너무 깊어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정조도 견제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11세에 왕이 된 순조가 어떻게 감당을 할 수 있었겠는가? 개혁은 중간에 끊어지면 개혁 전보다 더 참담해 진다. 정조 사후의 조선이 바로 그랬다. 개혁주도자는 개혁을 완성시킬 수 있는 후계자의 선정도 미리 세심하게 해 놓아야 한다. 지금 한국 재벌 기업들은 지속적인 개혁의 글로벌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런데 경영자들 나이가 고령이 되어 가고 있어 후계자 문제가 앞으로 한국경제 발전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가능성이 많다. 조직 경영에서 후계자문제의 중요성은 열 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미래 한국의 국가적인 문제가 될 수 있는 경영 후계자 문제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없어 지금 무엇보다도 후계자 문제에 대한 연구가 가장 시급하다.
    Premium Chosun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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