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53> ‘동숭동 시절’ 서울대 문리대

浮萍草 2014. 5. 16. 23:35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서울에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이 이름에 대해 무척 친근하게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서울대 문리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은 지가 근 40년이 됐다. 1975년 서울대가 종로구 동숭동에서 관악구 신림동으로 옮겨 가면서 문리대를 폐지하고 인문과학대학,사회과학 대학 자연과학대학으로 확대개편했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각 단과대 캠퍼스를 모두 관악으로 옮기면서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도 없어져 졸업생들의 가슴에만 묻어두게 됐다. 며칠 전, 문리대 옛터인 대학로의 마로니에공원을 찾았다. 대학로의 상징인 마로니에공원은 1975년 서울대 본부와 문리대 법대가 관악캠퍼스로 옮겨간 후 조성된 것이다. 공원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서 공원을 찾는 이들의 눈길을 맨 처음 사로잡는 울창하고 아름다운 마로니에나무는 1960년대 내가 문리대에 다닐 때 있었던 것이다. 이 지역을 우리는 그때 4·19광장이라고 불렀다. 4·19기념탑이 도서관 건물(현 아르코예술극장)과 마로니에나무 사이에 조성돼 있었으나 지금은 자취를 감췄다.

    카뮈·사르트르 논하며 때론 단식농성… ‘세느 강변’ 학생들의 추억
    ▲ 서울 종로구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에 있는 옛 서울대 문리대 모형. 지금은 극장, 식당, 주점 등으로 바뀌었다. 심만수 기자 panfocus@munhwa.com

    ▲ 옛 서울대 문리대 건너편에 있던 학림다방은 1960년대 ‘학생 데모꾼’들의 아지트였는데, 50여 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

    ▲ 서울 종로구 동숭동 ‘예술가의 집’은 1960년대 서울대 본관 건물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재 이곳에는 당시 문리대 건물은 하나도 없다. 공원 남쪽에 있는 3층 건물‘예술가의 집’(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 서울대 전체 본관 건물의 원형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으나 문리대 건물은 본관,강의동 전부 사라졌다. 문리대 건물들은 낙산을 배경으로 서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의 대학로와 마로니에공원 정문 사이에는 폭이 2m쯤 되는 도랑이 흐르고 있었는데 성북천의 지천으로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이 도랑을 ‘세느강’이라고 불렀고 정문 앞 이 도랑 위에 놓여진 다리를 ‘미라보다리’라고 불렀다. 이 정문은 길 건너 서울대 의과대학 정문과 마주보고 있었다. 지금 아르코예술극장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에 문리대 도서관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이 건물의 2층이 도서관 열람실이었고 한 옆으로 영문학과와 철학과가 있었다. 아래층에는 동부연구실이라 하여 불문학 독문학과 중문학과 사학과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르코예술극장 뒤편(북쪽)에는 동부강의동이 있었고 이어서 낙산쪽으로 이과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동부강의동을 넘어서 북쪽으로 대운동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 동부강의동이 학생들의 단식투쟁 장소였다. 마로니에공원 정문에서 낙산을 향해 섰을 때 제일 앞에 정문이 있었다. 그 뒤(동쪽)로 마로니에나무와 문리대 본부 건물(지금은 아르코미술관 자리) 이과강의동 등이 연이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로니에나무 이외에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마로니에공원 터는 옛 문리대 터였지만,해방 전에는 일제의 경성제국대학 터였다. 그 당시에는 문리대가 없었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터였다. 해방이 되면서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으로 바뀌면서 문리대와 법과대학으로 갈라진 것이다. 지금은 종로구 관할의 마로니에공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마로니에광장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정문 터,아르코예술극장,아르코미술관으로 이뤄지는 좁은 부지(문리대 전체 부지의 3분의 1 정도)만이 종로구 관할이고 나머지 북쪽 대운동장 부분 등은 상업지구로 바뀌어 각종 식당, 주점 등이 들어서 있다. 마로니에나무 밑에는 ‘서울대학교유지기념비’라는 시설물이 설치돼 있다. 옛 문리대의 전 강의동과 본관, 도서관 건물의 모형이 축소돼 전시돼 있고 그 옆에 설명판이 서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모형물들은 서울대 본관 건물을 제외하고는,전부 문리대의 것이다. 서울대는 한곳에 캠퍼스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모든 단과대학들이 서울 시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다만 본관 건물만이 문리대 영역 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마로니에공원은 서울대가 아니라 서울대 문리과대학 부지이다. 하기야 문리대도 서울대이니 꼭 틀렸다고만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문리대의 옛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뜻밖에도 문리대 바깥 대학로 건너편에 데모꾼들의 아지트였던 학림다방이 50년 세월을 넘어 그 건물 그 자리에 남아서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단골로 다니던 유일한 중국집 진아춘도 위치를 옮겨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데모꾼들의 갈증을 풀어주던 쌍과부집은 보쌈집으로 바뀌었으나 그 위치를 짐작케 한다. 이들 후생시설은 당시 너무나 가난했던 학생들에게 현금이 없어도 학생증을 맡기면 커피와 짜장면과 막걸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다방과 중국집과 막걸리집에는 찾아가지 않은 문리대 학생증이 언제나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라가 일제에 먹혀 허덕이던 1920년 그래도 나라와 민족을 지켜야 한다는 100여 명 민족주의자들은 保떼굇냅걷만?창립하고 조선민립종합대학의 설립을 추진했다. 당시 혼마치(충무로)와 황금정(을지로),남대문통(총독부∼남대문 사이) 등 남산 인근에 주로 살던 일인들은 경성 인구의 3분의 1에 육박했고 국정을 마음대로 주물렀으나 북촌과 동대문 그리고 계동의 중앙고보 인근에 살던 민족주의적인 인사들의 존재감도 녹록지 않았다. 조선인들이 일인들에게 동대문시장 상권을 빼앗기지 않았기에 이들의 재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놀란 조선총독부는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해 기선을 제압했다. 일본인들의 교육을 우선시하고 우리 민족 말살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조선인의 입학은 아주 어려웠다. 해방(1945년)이 되고 난 후 경성제국대학은 미군정청에 접수돼 경성대학이 됐다가 1946년 8월 22일 미군정 학무국에 의해 국립 서울대학교설치안이 입안되고 추진됐다. 초대총장으로 미국인 안스테드가 임명됐다. 이 계획안에 의해 미군정청은 서울대 내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 문과계와 1941년에 개설된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내의 이공계를 합쳐 문리과대학을 만들었다. 다른 단과대학들은 경성제국대학 내의 법학계 공과계 농학계 사범계 등과 이미 존재하던 국립 전문대학들과의 통합으로 이뤄졌다. 즉 국립 서울대를 태동시킨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통합되는 전문대학들을 중심으로 국립대학안(국대안)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해방정국을 장악하던 남로당의 교육계 장악 의도가 가장 큰 이유였다. 이들은 서울대 초대총장으로 미국인이 발령된 것은 민족혼을 말살하고 미국의 식민지화를 위한 기초적인 작업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동맹휴학을 강행했다. 당시 20만 명에 육박하던 남로당의 학원침투는 은밀하고 강력했다. 군 내부에서의 여순반란사건(14연대 지창수 상사)과 마찬가지로 학원 내 남로당계 세력의 책동으로 자칫 국립 서울대의 개교가 무산될 정도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과의 싸움에 이골이 난 미군정도 만만히 물러서지 않았다. 등교하지 않으면 전원 퇴교시키겠다는 미군정청의 강력한 최후 통첩에 동맹휴학생 4900여 명 중 3500여 명이 등교했으며,300여 명에 달하던 동조 교수들도 연구실로 돌아와서 겨우 수습됐다. 국대안 반대운동은 수습됐지만 남로당에 의해 세뇌됐던 당시 학생과 교수들이 그대로 학내에 남아 있어서 해방정국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문리대인들이 월북했고 대남 빨치산 양성의 본거지인 평안남도 강동정치학원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여기 출신 골수 공산주의자들인 이현상(남부군 총사령관,보성전문)과 김달삼(제주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일본 중앙대학 법학과)을 앞세워 정규 인민침략군의 막강한 조연 역을 수행했다. 남한 지리에 밝다는 이유를 내세웠으나,사실은 대한민국을 미제의 앞잡이로 매도함으로써 이들의 숭고한 민족주의 사상을 교묘하게 침략전쟁에 이용했다. 그래서 옛 초창기 문리대는 한때 빨갱이 대학이라는 억울한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라기보다 외세배격자들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필자가 재학했던 1964∼1969년(1년 휴학) 사이,단 한 번도 1학기 기말시험을 제때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조기방학이었다. 이 시기 문리대를 지배한 학생운동정신은 일본 배격이었다. 나라 재건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과 수교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대일외교를 저지하는 것이 문리대인들의 정신이었다. 책가방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사전 하나만을 뒷주머니에 넣고 단식농성장을 돌면서 우리는 대학생활을 했다. 단식농성을 제대로 해 탈진해 병원으로 실려간 학우들도 여럿 있었으나,굶어 죽지 않아야 싸울 수 있다 하여 단식농성장으로 누가 보냈는지 빵봉지가 돌기도 했다. 우리는 치욕을 참으면서 죽지 않고 싸우기 위해 빵을 뜯어 먹었다. 주로 영남과 호남에서 올라온 지방 출신 학생들로 서울에서 하숙할 형편은 물론 자취방을 구할 형편도 되지 않아 이 집 저 집 학우들의 하숙집으로 돌면서 주인 눈치 보면서 하숙집밥을 얻어먹고, 학교 강의실에서 잠을 자던 학생들이었다. 개학 초기엔 날씨가 덜 풀려 강의실에서 자기에는 사실 추웠다. 그럴 때는 책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던 담요 쪼가리를 꺼내어 덮었다. 새벽에 추워서 정문 수위실로 내려가면,수위 아저씨가 톱밥 난로에 불을 세게 지펴 놓아서 언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우리는 굳게 악수하면서 나라를 일본놈들에게 다시 팔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우리는 껄껄거리면서 얼어붙은 수돗물을 깨 세수하고,사전을 뒤적여 ‘사르트르’와 ‘카뮈’를 읽으면서 실존주의를 익혔다. 나 같은 졸병들(저학년)은 언 몸을 녹이면서 원고지를 꺼내 소설을 습작했다. 그리고 고향에서 올라온 타 대학 여학생에게 부지런히 연애편지를 썼다. 이청준, 김승옥 같은 고학년 소설 습작생들을 여기서 만나 인사를 한 것 같다. 김승옥의 대표 단편 ‘서울, 1964년 겨울’이 바로 이런 이야기다. 외교과에 다니던 이태식(전 주미대사)은 고향에서 올라온 등록금을 털어 가난한 고교 선배를 등록시키고 자신은 1년간 휴학하기도 했다. 이것을 우리는 ‘단식농성장의 학우애’라고 불렀다. 그런가 하면 가정교사를 해 번 돈을 고향 부모님에게 부치는 것을 등한히 하지 않았다. 교복은 언제나 가까운 동대문시장에서 산 물들인 군복과 군화였다. 4년 내내 이것만 입고 신었다. 교수진도 대단했다. 이희승(국문법),이숭녕(국어학)전광용(한국소설),이병도(국사),민두기(서양사),이휘영(불어학),김붕구(불문학),권중희(영어학),송욱(영문학),강두식(독문학), 이인기(교육학),이상백(사회학),이용희(외교학),민병태(정치학),신사훈(종교학),장병림(심리학),박종홍(철학),차주환(중문학),육지수(지리학),김정록(미학), 허웅(언어학),하상락(사회사업학),김원룡(고고학) 등등 기라성 같은 교수진이었다. 대부분 고인이시다. 주로 문과계로 경성제국대학에서 넘어온 분들이었고,분야별로 한국 학계를 창시한 원훈들이었다. 이과계인 물리학과,화학과,생물학과,동물학과,식물학과,수학과,천문기상학과,지질학과에 오히려 세계적인 학자들이 많았으나 필자가 문과생인 탓으로 존함이 가물거린다. 총 23개 학과였다. 학과당 20명씩 모집했으나, 10명 모집도 있어서, 총신입생은 400명 선이었다. 언제나 조국의 발전을 잊지 않고 좌절과 두려움을 모르는 현장의 행동하는 지성인,그것이 문리대 정신이다. 모든 서울대 단과대학들의 선도대학으로서 재학생들의 호국정신은 타 대학을 압도했고 그 자부심과 자신감은 대단했다. 우리는 법률 책과 상업부기를 공부하지 않았고,문학과 철학,미학,심리학,정치학,지리학,물리,화학,생물학,지질학을 공부했다. 서울대 정문과 배지에 새겨져 있는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라는 어휘가 머리에 떠오른다. 지금은 그 흔적마저 사라졌지만 한때 피 끓는 젊은이들의 호국정신으로 한 시대를 장식했던 학생운동의 요람이었기에,그 유지인 마로니에공원을 동대문역사문화 공원처럼 학생운동 역사공원으로 탈바꿈시킬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마로니에공원을 떠났다.
    Munhwa ☜       정소성 / 소설가·불문학자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