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49> 富와 貧이 공존하는 ‘성북동’

浮萍草 2014. 4. 13. 22:13
    ‘성북동 비둘기’ 떠난 자리… 추억의 기사식당만 남았다
    ▲ 서울 성북동 기사식당 전경.택시 기사들은 여기서 밥을 먹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잠시 먼 산을 본다.그 곁에 서면 이런 말을 듣게 된다.“저어기가 성북동
    부자 동네야.”그 동네는 택시 손님도 없어 갈 일도 없는데 꼭 그런다.황교익 씨 제공

    ▲ 사진 위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매입한‘시민문화유산 1호’인 서울 성북동의 최순우 옛집. 올해는 4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개방하고 있다. 문화일보 자료사진. 성북동 기사식당의 돼지불백 차림. A4돈까스로 불리는 왕돈까스. 황교익 씨 제공
    실에서 가운을 입은 여자가 나온다. 거실은 컴컴하다. 포실한 양탄자 위에 커다란 소파가 놓여 있음이 실루엣으로 보인다. 여자가 거실의 커튼을 젖힌다. 아침 햇살이 환히 들어오면서 묵직한 느낌의 목제 책장과 고딕풍의 장식장이 드러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인 듯한 전집류의 책이 있고 양주병도 보인다. 여자가 보는 창밖은 녹색의 잔디가 펼쳐진 정원이다. 파라솔이 걸린 하얀 탁자와 의자가 있고 그 곁으로 작은 연못에 비단잉어가 노닌다. 정원 한쪽에 빨래를 널고 있는 식모가 보인다. 멜빵바지를 한 꼬마가 식모를 놀리듯 깔깔거리며 뛰어다닌다. 1970년대 한국 영화에서 흔히 보았던 장면이다. 호스티스였는데 부잣집 남자의 눈에 들어 ‘마나님’이 되었다가 끝내 버림을 받는 기구한 운명의 여자는 2층 양옥에 정원이 딸린 이런 집에서 얼마간 산다. 지방 소도시의 허름한 극장에서 나는 이런 영화를 보았다. 영화에 나오는 그 호화로운 집들이 실재하는지 나는 늘 궁금하였다. 내가 사는 소도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 나는 서울로 이주를 하였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중산층 이상 될 것임에도 영화 속의 그런 집에 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그런 집이 분명 서울에 존재한다는 말은 들었다. “아주 큰 집인데 말이야 담하고 대문밖에 안 보여. 자가용차가 집 앞에 온다 싶으면 차고 문이 스윽 열리고 어느 틈엔가 사라져 마당에 테니스장도 있고 수영장도 있고 그래. 일반인은 못 봐.” 나중에 그런 집이 성북동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가보았다. 정말 담과 대문만 보였다. 고급 차가 문득문득 다니는 그 길을 걸으며 두리번거리는 내가 민망하여 잰걸음을 하여 정원이 있는지 어떤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그 호화 주택을 조금 벗어나면 달동네였다. 낡은 ‘보루쿠집’이 닥지닥지 언덕을 덮었다. 조선의 성벽이 달동네의 담이 되어주고 있었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는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를 학교 국어시간에 배웠다. 그때에 ‘자연을 파괴하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은 모더니즘 시라며 시험 답은 그렇게 써야 한다고 선생은 설명하였더랬다. 성북동을 실제로 보고 난 뒤 그리고 성북동이 1970년대에 도둑촌이라 불렸고 도둑촌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1968년 김광섭이 이 시를 발표할 때 즈음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성북동 비둘기’를 리얼리즘 시로 읽게 되었다. 산동네 사람들을 비둘기에 비유했을 뿐이었다.
    # 부와 빈의 데칼코마니
    성북동은 조선이 쌓은 한양도성 동쪽 밖에 바짝 붙어 있는 동네이다. 동네 위로는 한양의 북쪽 사대문인 숙정문이 있다. 아래로는 혜화동이다. 한국미의 아름다움을 설파해 베스트셀러가 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로 유명한 혜곡 최순우(1916∼1984)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서울 성북2동 옛 한옥집도 선비의 묵향이 은은한 성북동의 명소다. ‘최순우 옛집’은 대지 120평에 안채와 사랑채 등으로 이뤄진 1930년대 한옥으로 조선말기 선비 집의 운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또한 성북동에는 의친왕이 살던 별궁의 정원이라는 성락원 한용운의 집 심우장 조선시대 갑부였던 이종석의 별장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에서부터 권력과 금력을 쥔 이들이 많이 살았던 듯하다. 조선 멸망 이후 서울은 급격하게 이주민을 받아들여야 했는데,성북동은 서울 중심부와 가까워 일찌감치 달동네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북동 달동네 사람들은 스스로 서울 토박이라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전쟁과 산업화로 인한 서울 이주민과는 다른 정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신흥부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그들의 부에 어울리는 큰 집을 원하였다. 상업공간이 된 도심에다 가정집을 지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성북동을 주목하였다. 이중환이‘택리지’에“부자의 대를 물릴 수 있는 명당”이라 하였다는 설이 큰 작용을 하였다는 말도 있다. 그렇게 하여 ‘본래 살던 비둘기’가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부자들의 집은 성북동 330번지를 중심으로 모여 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담철곤 오리온 회장 등을 비롯하여 100여 명의 부자들이 이 동네의 주민이다. 이 동네를 한때 도둑촌이라 하였다가 요즘은 이 말을 쓰지 않는다. 부자의 품격이 달라졌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다들 도둑이 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자본주의가 그림이라면 기묘한 ‘데칼코마니(대칭적 무늬를 만들어내는 회화기법)’다. 도화지 한쪽에 부촌의 그림을 그리고 반으로 접어 문지르면 반대편에 빈촌이 찍혀 나온다. 성북동이 이 기묘한 데칼코마니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극단의 부와 극단의 빈이 한 몸인 양 바짝 붙어 존재한다. 그럼에도 서로 어색해하지 않는다. 각자의 공간에서 서로 넘보지 않고 자유롭다. 서로 섞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달동네들이, 성북동만이 아니라 전국의 달동네들이 묘하다. 달동네의 가난이 추억으로 소비된다. 담장에다 색색의 페인트를 칠하고 가게며 골목에 예쁜 손글씨를 써서 붙여 여학교 학예회장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성북동의 빈촌 북정마을도 그러고 있다. 카메라 들고 답사 가는 이들도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흑백 사진으로 동네 풍경을 보여준다. 2014년 서울의 삶을 1960년의 것으로 만들려는 심사이다. 김광섭 시인이 보았다면 한마디할 것이다. 비둘기는 그 색이 아니라고. 비둘기에다 붉고 푸르고 노란색을 칠한다고 앵무새가 되지 않으며 희고 검은색의 사진으로 보여준다고 까치가 되지는 않는다. 비둘기가 비둘기로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우울하다. 성북동은 부촌이든 빈촌이든 웅시하려는 이에게는 난감하다.
    # 성북동에 기사식당이 많은 이유
    1990년대 들어 나는 성북동을 자주 들락거렸다. 부촌과 빈촌을 보자는 것이 아니었다. 기사식당 음식 때문이었다. 성북동에는 돈까스와 돼지불백을 내는 기사식당이 제법 몰려 있고 맛있다는 소문도 나 있다. 성북동에 기사식당이 많은 것은 성북동에 기사가 많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성북동에 기사들이 살기는 하겠지만 성북동의 그 기사들은 오히려 성북동의 기사식당에 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택시를 몰다가 밥때에 자기 집이 있는 성북동에 오게 되었다면 집에 가서 밥을 먹으려 하지 않겠는가. 성북동에 기사식당이 많은 까닭은 가겟세가 싸기 때문이다. 식당은 동네 장사인데 음식을 먹으러 올 동네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성북동의 부자들은 그냥 부자가 아니다. 간단히 밥 한 끼를 먹어도 동네 식당은 오지 않을 것이다. 성북동 달동네 사람들은 간단한 밥 한 끼라도 돈이 아까워 집에서 먹으려고 할 것이다. 성북동에서는 웬만해서는 식당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이 조건이 오히려 기사식당을 열기에 유리하다. 가게 비용이 덜 드니 음식을 넉넉하게 낼 수 있고 늘 푸짐한 음식을 바라는 기사들을 유혹할 수 있는 것이다. 기사들 입장에서도 동네 사람들이 오지 않는 식당이 편하다. 택시 몰고 다니면 자기가 사는 동네에 가지 않고서는 다 남의 동네이다. 남의 동네에서 그 동네 사람들이 북적이는 식당에 들어가는 것은 머쓱한 일이다. 동네 사람들이 오지 않는 식당이 기사식당으로 환영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성북동에 기사식당이 생긴 것은 1970년대이다. 돼지불백이 먼저 유명해지고 돈까스는 그 이후에 생겼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성북동 쪽으로 쭉 올라가다 성북동 언덕배기가 보인다 하면 그곳부터 돈까스집들이 보인다. 조금 더 오르면 돼지불백집들이 있다. 어느 집이 맛있다 하고 장담 못 한다.
    ㆍ# 굳건한 돼지불백과 변심한 돈까스
    근래에 성북동 기사식당 음식 판도에 변화가 생겼다. 돼지불백은 기사식당 음식 그대로 팔리고 있는데 돈까스는 기사식당의 이미지를 벗고 있다. ‘성북동 왕돈까스’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나 연인 친구들의 외식 음식으로 굳어지고 있다. 식당 수도 돼지불백은 고정되어 있고 돈까스는 부쩍 늘었다. 인터넷에 ‘성북동 기사식당’으로 검색을 하면 돼지불백만 뜨고 돈까스를 찾으려면 ‘성북동 왕돈까스’라 해야 한다. 1990년대 초부터 성북동 기사식당 음식을 취재해왔던 나로서는 이런 변화가 매우 흥미롭다. 음식은 크게 바뀐 것이 없는데 음식을 대하는 인식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성북동에 가면 대체로 돈까스를 먹지 돼지불백은 잘 먹지 않는다. 돈까스는 별식 같은데 돼지불백은 가난한 자의 끼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돼지불백은 돼지불고기백반의 준말이다. 돼지고기 몇 점에 상추와 여러 밑반찬이 깔린다. 돼지불백에 갈비뼈 붙은 고기 한 토막이 올려지면 500원 비싼 돼지갈비백반이 된다. 푸짐한 별식의 불고기나 갈비가 아니라 끼니로서의 불고기와 갈비이다. 멀건 조갯국과 비린 조개젓이 항상 오른다. 여기에 밥 한 그릇 먹고 나와 달동네 풍경을 바라보자면 어쩐지 우울해진다. 아니다 그 자리에서는 성북동 부자들의 집은 안 보이는 게 다행일 수도 있겠다. 돈까스는 일본음식이다. 서양의 포크 커틀릿을 자신들의 음식으로 철저하게 바꾸었다. 서양에서는 돼지고기튀김 덩어리째 접시에 올리고 이것을 포크와 나이프로 잘라 먹는다. 돈까스는 이런 방식을 버렸다. 돼지고기튀김 덩어리를 젓가락으로 집어 먹을 수 있게끔 잘라 나온다. 여기에 따르는 음식도 수프 대신 일본식 된장국, 빵 대신 밥, 샐러드 대신 간장 드레싱의 양배추와 채소절임이 나온다. 한국에서 팔리는 돈까스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일본 돈까스이거나, 경양식집 버전의 돈까스이다. 경양식도 사실 일본에서 유입된 것이나 일본 돈까스와는 많이 다르다. 돼지고기튀김을 통으로 내어 칼과 포크로 먹게 한다. 수프가 있고, 밥과 빵 중에 선택을 한다. 어중간한 서양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사식당에서 비롯한 성북동 왕돈까스는 이것과는 또 다르다. 널따란 돼지고기튀김에 따라 나오는 음식들을 보면, 배추김치,깍두기,물김치가 있는가 하면 풋고추에 된장도 나온다. 일본식 된장국이 우리식 우거지된장국,콩나물김칫국으로 대체되어 있다. 포크와 나이프를 쓰면서도 우리의 숟가락이 함께 놓인다. 서양식도 일본식도 아니니 한국식이라 고집할 만도 한데 그렇다고 한국 돈까스라 하기에는 어색하다. 이도 저도 아닌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부촌과 빈촌이 기묘한 데칼코마니를 그리고 있는 성북동 언덕배기에 서 있으면 내가 딱 이렇다. 부자도 아니고 빈자도 아니다. 부촌도 어색하고 빈촌도 어색하다. 성북동 왕돈까스집 앞에 줄을 서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흔히 중산층이라 불리는 이들이다. 자신의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대가로 왕돈까스 정도는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왕돈까스 먹은 김에 소화도 시킬 겸 성북동을 한 바퀴 돈다. 부촌 구경이든 빈촌 구경이든 그들에게는 큰 차이는 없다. 빈부의 속내를 깊숙이 들여다보자는 것이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다. 영화의 한 장면인 양 “응, 이런 게 있네” 하고 만다. 이도 저도 아니어서 편하게 산다. 그러니, 이도 저도 아닌 왕돈까스가 당기게 되어 있다.
    Munhwa ☜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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