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힐링투어

8 제주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浮萍草 2014. 5. 11. 11:46
    어느새 5월 … 탐라의 바람을 찍다 간 김영갑이 그립다
    ▲ 사진작가 김영갑이 사랑한 용눈이오름. 10년 전만 해도 쇠똥 나뒹굴던 외딴곳이었는데 지금은 유명 관광지가 됐다. 손민호 기자
    가 그를 알고 지낸 시간은 18개월이 전부다. 2003년 감귤이 익을 즈음 처음 만났고 2005년 유채꽃이 시들 무렵에 헤어졌다. 그의 얼굴을 마주한 건 아무리 후하게 쳐도 18번이나 될까 싶다. 하여 나는 그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처절했던 삶에 대하여 함부로 지껄일 인연이 못 된다. 다만 나는 그가 남기고 간 흔적 앞에서 소리 죽여 흐느낄 따름이다. 나는 여행기자로서 사진작가 김영갑(1957∼2005)을 만났다. 그가 살아 있을 때 두 번 기사를 썼고, 그가 죽고 나서 다섯 번 기사를 썼다. 지금 세어 보니 나는 김영갑으로 시작하는 기사보다 고(故) 김영갑으로 시작하는 기사를 더 많이 썼다. 그게 지금, 가장 아프다. 그가 떠난 지 벌써 9년이 흘렀지만, 그를 추억하는 건 여전히 힘든 일이다. 장소는 상처로 기억되는 법이어서, 제주의 푸른 바다는 나에게 푸른 멍처럼 아리고 쓰리다. 지금도 갤러리에 들어서면, 입구 왼쪽 볕 잘 드는 나무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그가 힘든 웃음을 지어 보일 것만 같다. 오는 29일은 그의 아홉 번째 기일이다. 시간도 공간처럼 상처로 기억되게 마련이어서 그를 추억하지 않은 채 5월을 지내는 건 나에게는 아직도 힘든 일이다. 이번 5월에도 그를 추억하는 까닭이다.
    ▲ 사진작가 김영갑의 사진에 맑은 하늘은 거의 없다.그래서인지 김영갑의 흔적을 밟으러 갈 때마다 제주는 몹시 흐렸다. 비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이 삼나무
    길도 김영갑이 사랑했던 오브제다.

    ㆍ그를 만나러 갈 때면 제주 하늘은 심술
    누군가 김영갑의 사진을 보고 “제주의 바람을 찍다 간 사람”이라고 적은 적이 있다. 그의 말마따나 김영갑의 사진에는 맑은 하늘이 거의 없다. 비바람 몰아치는 중산간의 들녘, 안개 자욱한 용눈이오름 어지러이 흔들리는 억새 해질 녘의 붉은 하늘,온몸을 뒤척이는 검은 바다가 그의 사진에는 유난히 많다. 그래서인가? 그를 만나러 가는 날마다 날씨가 안 좋았다. 그가 살아있을 때도 그가 죽은 뒤에도 김영갑과 관련한 취재를 작정하면 제주의 하늘은 늘 울고 있었다. 2010년 김영갑 5주기를 앞둔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생전의 김영갑이 허구한 날 살았던 중산간지역을 헤매던 그날 하루에 600㎜가 넘는 비가 쏟아졌다. 나와, 나에게 맨 처음 김영갑을 소개한 사진기자 K선배 그리고 김영갑의 뒤를 이어 갤러리를 지키고 있는 박훈일(45) 관장 이렇게 세 남자는 그날 저녁 호우경보를 전하는 TV뉴스를 보다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 행님, 심하네 행님이 얼마나 험하게 작업했는지 동생들한테 알려주려고 비 내리게 한 건 알았는데 이건 뭐, 죽을 뻔했네 그놈의 성질은 여전하네. 하늘에서 심심한가 보네.” K선배의 넋두리처럼 김영갑은 성미가 고약했다. 제 고집만 부렸다. 사실, 그렇게 고집불통이었으니 그렇게 살다 갔을 터였다. 김영갑은 1985년 생면부지의 제주에 홀로 들어와 사진 찍고 돌아다니다 2005년 가버렸다. 쌀보다 필름을 먼저 샀고, 밭에서 당근 뽑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주위에서 챙겨주는 친구도 딱히 없었고, 가족하고도 오래전에 연을 끊었다. 충남 부여의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진을 찍겠다고 집을 나섰으니 사진을 전공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진이 좋아서, 마냥 제주도가 좋아서 제주도에서 사진을 찍다 간 것이었다. 참으로 모진 사람이었다.
    ㆍ용눈이오름에 오르면 마음이 편안
    생전의 김영갑이 가장 사랑한 오브제는 용눈이오름이었다. 용이 누워있는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용눈이오름이다. 2003년부터 뻔질나게 다녔으니 나도 수십 번은 오른 것 같다. 이제는 나도 영화나 CF에서 용눈이오름이 스쳐 지나만 가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가 됐다. 10년 전 용눈이오름에는 소가 많았다. 지금도 군데군데 소똥이 널려 있다. 당시에는 오름에 소를 풀어놓은 주인이 오름을 에워싸고 철조망을 쳤다. 마땅한 입구가 없던 시절, 나는 철조망을 넘어 오름으로 들어갔다. 철조망을 넘으면 오름 아래로 네모나게 돌담을 쌓은 무덤이 흩어져 있었다. 제주 사람들은 예부터 오름에 소를 풀어 길렀고, 사람이 죽으면 오름에 묻었다. 제주의 삶과 죽음이 모두 오름에 모여 있다. 용눈이오름은 여느 오름과 달리 길게 누워 있다. 용눈이오름의 잘록한 곡선은 차라리 에로틱하다. 카메라 삼각대를 세운 장소에 따라, 해가 떠 있는 위치에 따라, 하늘의 색깔과 바람의 방향에 따라 용눈이오름은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생전의 김영갑이 “삽시간의 황홀”이라고 표현했던 바로 그 장면이 연출된다. 용눈이오름에 오르면, 이른바 ‘오름밭’이라 불리는 중산간지역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가까이로는 손자봉·다랑쉬오름·아끈다랑쉬오름 등이 손에 잡힐 듯하고 초원 동쪽 끝으로는 아득히 성산 일출봉도 내다보인다. 용눈이오름에 오르면 어찌 된 영문인지 마음이 편안했다. 언젠가 하늘이 파랬던 날 오후, 나는 혼자 용눈이오름에 올라 까무룩 낮잠에 빠졌다. 지금 용눈이오름은 관광 명소가 됐다. 탐방로도 말끔하게 나 있고, 큼직한 주차장도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용눈이오름 주변으로 레일바이크 체험장이 들어섰다. 폐철로를 활용한 놀이기구가 왜 기차 한 번 다닌 적 없는 제주의 오름밭을 달려야 하는지 우리는 왜 이름이 알려진다 싶으면 시설부터 들이고 보는지 모르겠다. 생전의 김영갑이 사랑했던 수많은 장소가 개발을 이기지 못해 사라지거나 모습이 바뀌었다. 용눈이오름도 차례가 된 것 같다.
    ▲ 좌 김영갑갤러리 정원에 있는 조각상. 생전 김영갑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우 사진작가 김영갑의 오브제 중 하나.이름 없는 중산간 지역의 들판을 김영갑은
    허구한 날 들여다봤다

    ㆍ갤러리 앞 나무 밑에 잠든 김영갑
    김영갑은 성산읍 삼달리의 작은 폐교를 빌려 갤러리로 꾸몄다. 2002년 폐교를 빌렸고 이태 뒤 4월에 갤러리를 열었다. 갤러리 이름은 두모악(dumoak.co.kr). 한라산의 옛 이름이다. 제주에서 20만 롤이 넘는 사진을 찍은 김영갑은 필름을 갤러리에 보관했다. 갤러리로 개조한 교실에 번갈아가며 작품을 전시했고, 자신은 교실 오른편 교사(校舍)에서 먹고 잤다. 교실 공사는 끝냈지만, 운동장 공사는 마무리짓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운동장은 주차장으로 쓰였다. 김영갑은 운동장을 작은 제주도처럼 만들고 싶었다. 봄에는 신록 우거지고 가을엔 억새 흔들리는 정원을 꾸미고 싶었다. 그러나 병마가 찾아왔다. 근위축성 측삭경화증. 이른바 ‘루게릭병’이라 불리는 온몸의 근육이 마르는 병이었다. 나와 그의 인연은 그가 죽기 전 18개월 동안이었으니 나는 그의 말년을 지켜본 셈이었다. 일화 하나만 전한다. 처음으로 그와 밥을 먹은 날 나는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처음에 그는 나와 밥상에 마주 앉지 않았다. 씹는 게 어려워 그는 죽을 먹었다. 그러나 팔이 자유롭지 못해 핥아먹었다. 온 얼굴에 음식을 묻히며 개처럼 죽을 핥는 장면을 남에게 보이기 싫었다는 걸 나는 한참 뒤에 알았다. 그가 “밥 먹자”고 부른 그날, 나는 그의 얼굴을 닦아주며 꾹꾹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 나를 받아준 그에게 감사했다.
    2005년 5월 29일 아침 김영갑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정원 공사가 끝나지 않은 봄날이었다. 그는 뼛가루가 되어 갤러리 앞 나무 아래에 뿌려졌다. 나는 갤러리에 들를 때마다 나무 아래에 담뱃불을 붙여 내려놓는다. 생전의 그는 골초였다. 그래서인가. 담뱃불은 언제나 금세 타들어간다. 두모악도 명소가 됐다. 김영갑이 알려진 때문이겠지만 제주올레 3코스가 갤러리 앞을 통과한 덕도 봤다. 언젠가 갤러리에 들렀는데, 그 앞에 긴 줄이 서 있었다. 한참을 그 줄만 쳐다보다 돌아왔다.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두모악의 모습이었다. (입장료 3000원.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437-5. 064-784-9907.)
    Sunday Joins Vol 373 ☜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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