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59>『싯다르타』와 헤르만 헤세

浮萍草 2014. 5. 11. 09:18
    흐르는 강물처럼 인생도 쉼 없이 흐른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
    ~1962)
    독일 남부의 작은 도시 칼브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신학교에 다니다
    도망치고 자살을 감행하는 등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낸 뒤『페터 카멘친트』를
    쓰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
    하는 글들을 발표했으며 1946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사춘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노트 어딘가에 써두었을 구절, 『데미안』은 그래서 늘 풋풋한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소설이다.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는 아직 젊고 고뇌하는 청춘이지만 이런 깊은 통찰도 보여준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다.” 헤세의 소설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깨달음이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물음과 치열하게 대면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진지하게 고민하고 방황하고 아파한다. 그렇게 해서 힘겹게 찾아낸 해결책,어떤 인생이 진정한 삶인가에 대한 해답은 책을 덮을 무렵 부쩍 성장한 주인공의 모습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고뇌하고 투쟁하는 주인공의 일생을 그려낸『싯다르타(Siddhartha)』는 첫 장부터 뭔가 기대를 품게 한다. 헤세는 이 작품에 ‘한 인도의 시’라는 부제를 붙였는데『데미안』을 쓰고 난 뒤 창작 위기를 겪으며 우울증 치료까지 받았던 그는 1년 반 동안 인도에서 자기 체험 기간을 거친 뒤에야 소설을 완성했다. 유복한 바라문 가문의 아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친구 고빈다와 함께 출가한다. 명상을 하고 굶주림과 갈증을 견뎌내며 자기 초탈의 길을 간다. 그러나 이런 수행으로도 인생의 고통과 무의미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부처 고타마도 찾아가지만 세상의 모든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정지시킨 각성자라 할지라도 깨달음의 순간에 체험한 것을 말로 가르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친구와 헤어져 다시 방랑의 길로 접어든 싯다르타는 기생 카말라에게서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부유한 상인의 수하 에서 큰 재산도 모은다. 그렇게 나이 사십이 되고 보니 세속에 찌든 자기 모습이 실망스러울 뿐이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전에 자신이 건넜던 강가로 간다. “이제 나는 다시금 옛날 내가 어린아이였던 시절과 마찬가지로 백지 상태로 태양 아래 서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나의 것이라고는 없으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아무런 힘도 없으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상태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인가! 내가 이제 더 이상 어리지 않은 지금 머리카락이 벌써 반백이 다 된 지금 그 온갖 힘들이 다 약해져 버린 지금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어린아이 상태에서 다시 새로 시작해야 하다니!” 싯다르타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돌아본다. 다시 빈손에 벌거숭이에다 어리석은 상태다. 그의 운명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강물을 바라보다 문득 깨닫는다. 강물 역시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밑으로 흘러가면서도 마치 노래 부르듯 흥겨운 소리를 내는 강물을 보고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짓는다.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는 것이다.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비밀을 강으로부터 배웠을 때 나는 나의 인생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의 인생도 한 줄기 강물이었습니다.” 그는 뱃사공 바주데바와 함께 살면서 강물 소리에 귀 기울인다. 이걸로 끝인가? 아니다. 카말라가 죽음을 앞두고 그를 찾아오고 싯다르타는 자신에게 아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정성을 다해 아들을 키운다. 하지만 부잣집에서 자란 아들은 고집과 변덕에 버릇없이 굴다 얼마 안 되는 돈까지 훔쳐 달아난다. 그는 다시 한번 인생의 비참을 맛본다. 그리움에 사무쳐 아들을 찾으러 나섰다가 강물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한다. 자신의 아버지 또한 자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아들 때문에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은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을 다시는 보지도 못한 채 이미 오래 전에 홀로 외롭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까? 이것은 이러한 반복은, 이처럼 숙명적인 순환의 테두리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도는 것은 한바탕의 희극, 기이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뱃사공으로 늙어버린 싯다르타를 어느덧 노승(老僧)이 된 고빈다가 찾아온다. 가르침을 청하는 친구에게 그는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고 완성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네 아니고 말고, 이 세계는 매 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는 것이지.” 미소 짓는 싯다르타의 이마에 고빈다가 입을 맞춘다. 강물은 계속해서 흐르고 인생 역시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이처럼 아래로 아래로 흘러 마침내 자기에 이르는 강물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싯다르타가 중년의 싯다르타와 노년의 싯다르타로 흘러가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Sunday Joins Vol 374 ☜        박정태 굿모닝북스 대표 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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