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에티오피아시바여왕발굴현장리포트

2 첫 공개되는 시바 여왕의 초상(上)

浮萍草 2014. 5. 3. 06:00
    3000년전 '시바 여왕'은 단발머리에 사각형 얼굴
    고고학은 인내와 고난의 학문
    ▲ 이집트 제18왕조(서기전 15세기)의 하쳅수트 여왕이 푼트(에티오피아)에 보낸 배에 푼트에서 생산되는 보물들을 싣고 있는 장면.배의 중간에 줄에 묶이지
    않은 원숭이들과 상아들이 있다.상단에는 소쿠리에 담겨 있는 몰약나무들을 인부들이 나르고 있다.배 밑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다.이 벽화가 서기전
    15세기 상황이므로 10세기인 시바의 여왕 때에도 이와 같은 교역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집트의 디르 엘-바흐리에 있는 하쳅수트 무덤신전 벽화)
    바 여왕의 땅이라는 악숨의 어느 지점에 시바의 여왕,그 여인의 자취가 남아 있을까? 고고학은 때로는 대숲에서 바늘을 찾는 여인처럼 ‘그 주변’일 것이라는 심증만 가지고 시작한다. 고고학에서 신묘자(神妙者)는 사기꾼이다. 구멍 뚫린 골리앗의 두개골을 찾아냈다느니 아직도 젖어 있는 예수의 피를 찾았다느니 모세의 무덤을 발견했다느니…. 이런 자들은 헐리우드가 만들어 낸 인디애나 존스 영화보다 더 허황하다. 비록 인디애나 존스의 배경이 필자의 모교인 시카고 대학교이긴 하지만 영화와 고고학 현장 사이의 벽은 엄연하다. 고고학의 정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로맨틱한 감성으로 고고학을 말하지만 고고학자는 거친 현장이 주는 도전과 도서관에 숨어있는 자료들 사이에서 몇 년이고 씨름 하며 참된 답을 찾아내야 하는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ㆍ옛 사람들의 기록에 담겨 있는 사실
    시바 여왕의 흔적을 찾아서 악숨 땅을 밟고 지나 간 유럽과 아메리카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고고학적으로 탐사를 하지는 않았다. 아시아 사람으로 아프리카의 벌판에 삽을 들고 선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옛 사람들의 기록에는 반드시 진실이 들어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희랍 시인 호머(Homer)가 읊은 트로이 전쟁을 누가 사실이라고 믿었던가? 그러나 영국인 프랭크 칼버트(Frank Calvert)와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은 터키의 서쪽 끝에서 서기전 12세기의 전장(戰場) 트로이를 발굴해 내었다. 요세푸스가 단 한 줄로 써 놓은, 악명 높은 헤롯대왕의 무덤이 베들레헴 남쪽의 헤로디움에 묻혔다는 기록을 누가 그러리라고 수긍했던가? 신약성경에나 나오는 헤롯이라는 인물의 역사성을 평가절하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히브리 대학교 교수 에후드 네쩌(Ehud Netzer)는 헤로디움의 기슭을 샅샅이 뒤지며 청춘을 보냈다. 그는 고독한 탐사기간 35년 만에 서기 1세기의 헤롯대왕 무덤을 찾아내어 그 화려함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다음에 삶을 마감하였다.
    ㆍ잘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와 악숨(시바)의 역사
    시바에 대한 연구를 하는데 걸림돌이 있다면 인류는 아프리카의 역사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역사와 지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아프리카 하면 대개 이집트 역사에서 멈춘다. 이집트에서 남쪽으로 고대 이집트인들이 쿠시(Kush)라고 부른 누비아 지방이나 푼트(Punt)라고 부른 에티오피아와 그 주변 나라들에 대해서, 아니 아프리카의 다른 어떤 나라들의 고대사에 대해서도 우리는 잘 모르고 있음이 현실이다.

    따라서 ‘시바’(Sheba)라는 왕국이 에티오피아의 악숨(Aksum, Axum)이었다는 것도 몰랐다. 또한 시바의 여왕이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는 가공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로 여기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악숨 왕국은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로마, 중국, 페르시아에 필적하는 대국이었다. 서기전 7, 8세기에 이미 악숨과 그 주변에도 왕국이 있었다. 해발 2300 미터 산악지방에 위치한 악숨은 동쪽으로는 홍해,북쪽으로는 현재의 수단과 이집트 서쪽과 남쪽으로는 아프리카의 본토로 연결되는 요충지에 있었다. 홍해에서 나는 소금을 대륙으로 운반하며 큰 돈을 버는 길목이었다. 악숨은 지금도 벽돌처럼 잘라낸 소금 덩어리들을 대량으로 유통하고 있다. 또한 금과 유향이나 몰약 같은 향료들을 유통하는 무역에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고대에 향료는 그 무게만큼 금을 달아 주어야 살 수 있었으니 판매 이익이 방대하였다. 이렇게 볼 때에 기원전 10세기에도 악숨은 시바라는 이름으로 번영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시바의 여왕이 이스라엘 왕을 방문한 배경에는 무역이라는 경제 이슈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창고에 쌓여 있는 홍해의 소금 덩어리들. 고대에 악숨은 홍해와 아프리카 내륙 사이의 무역로를 관장하며 소금과 여러 물품을 팔거나 세금을 거두며 부를 축적
    하였다.오른쪽은 악숨국립대학교에서 강연 후에 에티오피아 국영 TV 인터뷰에 답하는 필자.

    시바의 여왕이 이스라엘까지 약 8000 km를 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국력과 경제력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악숨에서 고고학적으로 서기전 10세기의 층을 발굴한 적이 없는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악숨의 유적들은 5% 정도도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이곳이 고고학적으로 무궁무진한 보고라는 이야기를 실감하게 한다.
    ㆍ오벨리스크 공원, 교회, 박물관, 수도원
    악숨 시의 중심가의 서쪽 부분에 큰 교회가 있다. 성 마리아 찌욘교회라는 이 교회는 에티오피아가 기독교화 된 서기 4세기부터 존재한 교회의 후신이다. 따라서 이 교회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본산(本山)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이다. 이 교회에서 북쪽을 보면 거대한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는 오벨리스크 공원이 있다. 이 교회 건물의 남쪽에 세 건물들이 이어져 있다. 남쪽으로 약 50 미터 이내에 에티오피아 정교회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의 남쪽으로 50미터 이내에 고대에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가져 온 법궤를 모시고 있다는 성소(聖所)가 있다. 그 성소에서 남쪽으로 50미터 이내에 수도원이 있다. 그러므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보면,오벨리스크 공원,에티오피아 정교회, 교회 박물관,수도원이 대략 일렬로 있는 것이다.
    ㆍ돌에 새겨진 시바 여왕 마케다의 초상
    그 박물관에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유물들이 좁은 진열장들 안에 조밀하게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는 돌판에 송곳이나 칼로 젊은 여자의 얼굴 옆 모습을 새겨 놓은 것이 있다. 박물관 안에서 설명을 하는 안내자는 이것이 시바 여왕의 초상화라고 한다. 필자는 이 돌판에 대해서 몇 년간 궁금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이 돌판의 출토지와 연대가 궁금하였다. 이 박물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사진 촬영 신청서를 수도인 아디스 아바바에 있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총대주교 앞으로 내어 허가를 받으면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해도 허가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이 길고 긴 여정이 될 것이 뻔했다. 실제로 단 한번이라도 박물관 안의 유물들에 대한 사진 촬영이 허가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어렵사리 이 특이한 돌판의 사진을 입수할 수 있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그것이 조선일보에 공개되는 것이다. 그러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유물의 족보를 열람하는 허락은 받지 못했다. 다만 이 돌판이 둥그루에서 발견이 된 것이라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둥그루는 지난 회에 말한 대로 서기 8세기의 큰 궁전이 있는 곳이다. 그 주변에는 발굴되지 아니한 유적들이 많이 있는데 지표 조사 중에 발견된 유물들 중의 하나라는 설명이었다.
    ▲‘시바 여왕의 초상’이 새겨진 돌판(왼쪽).악숨에 있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머리 모양이 퍽 현대적이고 젊고 행동적인 모습의 얼굴
    이다.의지가 굳어 보인다. 에티오피아 박물관은 이 돌판이 시바 여왕의 모습이라고 설명한다.여행 조건이 열악한 3000년 전에 왕복으로 8000km를 여행했다니
    젊고 건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오른쪽 사진은 아디스 아바바에서 만난 젊은 사람의 옆 얼굴. 돌판의 얼굴과 많이 비슷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돌판의 연대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젊은 여자의 초상이므로 ‘시바 여왕의 초상’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둥그루는 필자가 발굴하고 있는 악숨 왕궁에서 서쪽으로 걸어가면 15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필자가 둥그루 지역을 직접 걸어다니며 살펴 보니 돌무더기들과 토기조각 등 많은 유적들이 널려 있었다. 앞으로 이 돌판의 족보를 보고 발견지점을 확인하여 발굴을 한다면 어떤 놀라운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돌판은 이 지역에서 흔한 석회암이다. 크기는 대략 손바닥 두 개를 위, 아래로 맞댄 정도이다. 날카로운 도구로 새긴 옆 얼굴은 모양이 사각형이다. 이마가 넓고 코가 오똑하고 바르며 입술의 윤곽이 선명하다. 턱은 직각이며 귀 밑까지 수평으로 흐르다가 각이 져 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고집스럽거나 의지력이 강해 보이는 그런 형이다. 머리카락은 굵은 빗으로 빗은 듯이 결이 굵게 흘러내려 뒷목 윗부분에서 멈추고 있다. 이마와 귀가 드러나게 머리가 짧아서 활동적인 젊은 여자의 이미지를 풍긴다. 필자가 이 얼굴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에티오피아에서 이러한 사각형의 얼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ㆍ마케다의 인종과 다른 부족들의 인종
    필자는 약 오천 명 정도의 신자들이 매 주 출석하는 그 교회의 정문에 여러 날 앉아서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하였다. 열이면 열 모두 얼굴이 길고 턱은 수평으로 흐르지 않고 사선을 그리면서 귀밑으로 올라가는 형이었다. 악숨의 시내에서도 여러 날 현지인들의 얼굴들을 관찰하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돌판에 새겨진 젊은 여자의 얼굴은 현대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긴 얼굴형과는 다르다는 결론이 가능하였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서기전 1세기부터 존재하였던 악숨 왕국이나 그 보다 오래된 시바 왕국의 인구는 산악지방의 부족들의 혼합이었다. 이 여자의 얼굴은 그 어떤 부족의 두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녀의 얼굴은 왕복 약 8000 km의 험한 여행을 완주할 만큼,그리고 아들을 혼자 기르고 왕으로 만들만큼 의지가 강하고 젊고 활동적인 여자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시바의 여왕을 경유하여 발생한 흑인 유대인들의 후손들은 약 십만 명이 1980년대에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고 현재는 약 사천 명 정도가 악숨 에서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며 이스라엘로 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즉, 현재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흑인 유대인들과 다른 인종 계열인 것이고 돌판에 새겨진 여자는 행여 시바의 여왕이 아닐지라도 어떤 인종적 진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돌판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악숨에서 고고학층이 깊어질수록 이 돌판의 연대를 시사할 그 어떤 단서가 나올 수도 있을 것 으로 본다. 어느 날, 악숨에서 남쪽으로 900여 km 떨어진 아디스 아바바에 있는 명성교회 병원 대합실에서 필자는 한 젊은 여성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를 설득하여 옆 모습을 촬영하여 돌판의 얼굴과 비교하여 보았다. 가족들이 지켜보는데 그 여자는 자기의 얼굴이 시바의 여왕의 얼굴일지도 모르는 얼굴과 비교될 것이라는데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그 여자의 얼굴은 돌판에 새겨진 얼굴과 많이 비슷하였다. 혹시 악숨 출생이 아닌가 하여 어디 출생이냐고 물었더니 그 여자는 아디스 아바바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시바의 여왕을 꼭 만나시기를 바랍니다”하며 싱긋 웃는 그녀의 얼굴에 태고적 건강미가 넘쳐 보였다.
    Premium Chosun ☜        고세진 대한성서고고학회 회장 youaremyhonor@gmail.com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