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반정(反正) 세계사

(55) 야만의 발광, 왜란

浮萍草 2014. 5. 2. 10:43
    13. 야만의 발광-두 차례의 왜란 중의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려는 위대한 이상을 지녔던 조선이 건국된 지 이백년째 되는 3725년(서1592), 열도 속에서 흉칙스런 괴물로 변해 간 왜족의 괴수 히데요시는'명나라를 정벌하러 갈테니 길을 내어 달라'는 얼토당토 않은 늑대의 논리를 명분이랍시고 내어 걸고 평화로운 한민족의 터전을 침략해 왔다. 모든 이웃 나라들이 화목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던 조선은 스스로도 무장을 원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열도의 야만족이 거리낌없는 대학살과 대약탈을 자행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에서 강력한 군비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고 해서 야만족의 노략질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단순한 노략질이 아닌 인류역사와 인류문명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한민족 자체의 말살을 기도하고 있었다면 인류라는 개념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도 예사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왜족들이 이미 인류의 일원이기를 거부한 야수떼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마 웃어 넘길 수도 없는 사실은,사람같지도 않은 대살륙과 노략질에 광분했던 자들 중에는'독실한 (일본식)불교신자'는 물론, 서양식민주의자들이 왜열도에 퍼뜨린 카톨릭의 세례를 받은 '열성적인 카톨릭신자'들도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매우 고상해야만 할 종교적 이상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야만행위를 하는 데는 의견이 일치되었던 듯한 열도의 짐승떼들은, 서양해적들로부터 입수한 신무기를 앞세우고 필설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갖은 악랄한 만행들을 자행하면서 조선국의 서남지방 일부를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갔다. 그에 대하여 조선국민은 일치 단결하여 그 미친 짐승떼를 몰아 내기 위해 노력했다. 초야에 묻혀 지내던 숱한 선비들이 민중을 규합하여 총궐기했고 산간에서 불도를 닦던 승려들도 부처가 되는 일을 다음 생으로 미루고 죽창을 들고 궐기했다. 진정한 보살도를 실천하기 위하여 궐기한 서산대사·사명대사?처영대사 등이 이끄는 의로운 승병들은 아귀같은 왜구3들의 길 앞잡이로 나섰던 저들의 주구에 불과한 열도의 승려들과는 그 존재가치에 있어서 극단적인 대조를 보이기도 했다. 조선조정은 임시 피난을 결정하고 선조임금을 수행하여 동압록강 부근까지 후퇴하였다. 그리고 생지옥이 된 조선땅에서 하루라도 빨리 왜구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선조임금은 명나라의 참전을 촉구하는 사신들을 파견하였다. 명나라는 스스로 조선의 상국(上國)인 양 행세해 오고 있었으므로, 위기에 처한 조선을 모른 척 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명나라 신종왕은 큰 생색을 내듯이 원병을 파견했는데 왜구들에게는 그런대로 심리적으로라도 위협적인 효과를 나타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다소 있었을지언정, 원군으로 온 명나라군의 약탈이나 행패는 왜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에 조선국민은 스스로 왜구떼를 물리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전국적으로 항왜투쟁은 가열되어 갔다. 섬구석에서 과대망상에 젖어 있던 전쟁광 히데요시는 사태가 자기 뜻대로만 되어 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명나라 파견군 수뇌들과 휴전협상에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그 협상에서 조선남부의 4개도(道)를 떼어 달라고 생떼를 썼다. 명나라로서는 어떤 형식으로든 빨리 철수하고 싶었으나 도저히 그러한 조건만은 자기들 멋대로 수락할 수 없었다. 조선국민들이 일치단결하여 그러한 헛수작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왜구떼를 물리치는 데 큰 힘이 된 것은 육지에서의 의병항쟁을 주도한 곽재우·김시민·조헌·고경명·김천일·김덕령 등의 의사 및 열사들과,휴정·유정·영규?처영 등이 이끄는 의로운 승병들이었고, 바다에서는 더욱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던 성웅(聖雄) 이 순신 장군이 거북선으로 왜구떼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주었다. 왜구들은 조선인들의 치열한 공세를 이기지 못하게 되자 침략 다음 해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왜구들은 이 순신 장군이 있는 이상 도저히 승리가 불가능함을 알고 계략을 꾸미기도 했는데 얼마후 이 순신 장군은 얼빠진 자들의 흉계에 말려 들어 옥에 갇히고 말았다. 사태가 저들 왜구들에게 매우 유리해졌다고 판단한 히데요시는 질질 끌던 협상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다시 열도내의 인간쓰레기들을 조선으로 내몰았다. 유능한 수군지휘관을 잃은 조선은 왜구들의 노략질에 다시 내던져 졌다. 그러자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조선조정에서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던 이 순신 장군을 수군통제사로 재차 임명하여 왜구를 섬멸토록 하였으므로 전새는 곧 역전되었다. 그러는 동안 왜열도에서는 히데요시가 병사하고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실권을 장악했는데 도꾸가와는 승산없는 침략전쟁의 책임을 죽은 히데요시에게 미루어 버리기로 하고 침략군을 철수시키기로 했다. 성웅 이 순신 장군은 도망치는 왜구떼를 박멸하기 위해 마지막 총공격을 가하였으나 노량 앞바다에서 진두지휘 하던 중 유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조선 수군은 도망치는 도적떼들을 끝까지 추격하며 파멸적인 대타격을 가했으므로 남아 있던 왜구들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줄행랑치기에 바빴다. 두번의 큰 노략질로 동아시아 문명사회에서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는 형편없는 짐승들로 낙인찍힌 왜구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서 간사스럽게도 화해요청을 해 왔다. 아무리 히데요시가 침략전쟁의 장본인이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히데요시에게 있다고는 하지만 왜구떼가 조선에서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은 절대로 천수를 다하고 편히 죽은 간적 히데요시 혼자만의 책임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점은 처음부터 명확했다. 해적두목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발광이 단순히 열도의 쓰레기들을 바깥에 내다 버리는 데만 있지는 않았다는 것은 악귀같은 사무라이들의 만행으로도 명백했다. 히데요시는 더러운 살인마에 불과한 사무라이들로 하여금 한민족의 귀나 코를 각자 한 되씩 베어서 소금에 절여 가져오도록 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승냥이같은 사무라이들에게 조선인의 귀를 한되씩 소금에 절여서 가지고 돌아오도록 명령했는데 사람의 귀는 '두 개씩이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후에는 귀대신 사람에게 하나밖에 없는 코를 한 되씩 가져오도록 명령을 고쳤다. 그래야만 보다 많은 조선인을 살상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그 배후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충성심에 있어서 개보다 한 수 높은 사무라이들은 히데요시의 기대이상으로 많은 귀와 코를 소금에 절여서 가져 갔다. 간혹 가다가 다소 인정많은(?) 사무라이에게 잡힌 조선인들은 단지 귀와 코만을 잃는 것으로 생명을 부지할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귀·코와 함께 그 생명까지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 심성에 있어서는 개만도 못한 이런 사무라이들의 작태는 그것이 단순히 명령이었기 때문에「할 수 없이 '한됫박'이나 되는 귀·코를 생사람으로부터 마구 도려낼 수는 없으리라」는 문명인류의 상식을 정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때 잘라 가지고 갔던 한맺힌 귀와 코들은 아직도 교토 교외의 한 절간앞에 무슨 자랑거리나 되는 듯이 소금에 절여진 채 묻혀서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다. 또한 당시 왜구들에게 납치당해갔던 수많은 기능공들에 의하여 왜열도에서는 때아닌 도자기문화나 인쇄술 등이 발달하기도 했는데 왜족들이 제대로 된 식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러한 조선인 도공들의 한맺친 포로생활과 때를 같이 하고 있다. 문명국 조선이 두번의 왜란으로 인하여 겪은 피해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막대한 것으로서, 당·거란·몽골 등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그 여명을 수천년간 보존해 오고 있던 귀중한 문명인류의 유산들이 거의 다 분탕질당했거나 방화되어 잿더미로 변해 갔다. 조선의 국력은 너무나 혹심하게 피폐해 졌으므로 그 후 이·삼백년이 지나도록 그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문명국 조선은 다시는 그러한 참화를 겪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려면 열도의 짐승들을 잘 가르쳐서 사람답게 만들어 놓는 수밖에 없다는 문명인다운 판단을 내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민족은 다른 지방의 세계사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속도 하나를 더 만들어 내었다. 야만을 문명으로 개조하기 위한 '조선통신사'를 왜열도로 보내어 교화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14. 인류문명의 정화(精華) - 조선통신사
    사랑하라'는 크리스트의 가르침을 실천한 기독교국가가 역사상 존재한 적이 있는가? 아니 기독교국가뿐 아니라 전세계를 통털어서 그런 예가 있었는가? 도저히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그러한 장한 사업을 이룩한 나라가 예외적으로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한민족의 문명국가 - 조선 - 이었다. 피로 피를 씻는 야만적 보복행위에 종식을 고하고 원수들을 참인간들로 만들어 참된 평화세계를 건설하려 했던 조선의 시도는 이미 그 정신세계가 인류문명의 최고 봉에 달해 있음을 증명하고도 남았던 것이다. 도대체 그러한 시도를 꿈이라도 꿔 본 민족이나 국가가 어디에 다시 있었단 말인가? 통신사 제도는 일찌기 조선 초기부터 선린외교를 위하여 시행되고 있었으며 열도주민들에게 생활필수품을 공급시켜주기 위한 상설무역 시장도 세 포구(삼포)에 설치 되어 있었다. 그 목적은 주로 고려말기에 부쩍 늘어났던 왜구의 발호를 억제하기 위한 것으로써 소규모사절단이 정례적으로 왕래했다. 그러나 아시까가 막부가 통제력을 잃고 왜열도가 치열한 전쟁터로 화하자 조선으로서는 통신사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으므로 왕래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왜열도에서 전국시대가 끝나고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자 왜열도는 조선에 다시 통신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에 조선에서는 왜열도의 정세도 살필겸 그 요청에 응했다. 그런데 미치광이 히데요시는 자기가 간청해서 통신사가 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조선이 자기에게 복종하러 왔다고 미치광이다운 과대망상적 판단을 내렸는데, 그 과대망상적 판단은 곧 참담한 왜란으로 귀결되었다. 왜구들의 전멸적 패배로 왜란이 끝나자 새로 권력을 장악한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보복하려고 열도를 침공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급히 태도를 바꾸어 조선에 화해의 추파를 던졌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보복전 따위에는 흥미가 없었으므로 우선 강제 납치된 조선인들을 귀환시키기 위하여 세번에 걸쳐서 교섭사절(쇄환사)을 파견했다. 많은 조선인들이 열도 각 지방에 노예로 팔려 갔고 나가사끼에서는 조선인 노예시장까지 성립되어, 머나먼 야만지역인 유럽까지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으나,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어 왜구들이 조선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는 태도를 보이자 문명국 조선은 야수화한 왜구들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사업에 착수했다. 주로 열도내에서 큰 행사가 벌어지는 시기를 맞추어 파견한 통신사가 그 역할을 주로 담당했는데, 그 규모는 왜란 전에 비하여 엄청난 것이었다. 도꾸가와 막부에서는 권력자 쇼궁(將軍)이 바뀔 때마다 그 권위를 열도내에 알리려는 목적으로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면서 조선통신사 일행을 맞이했다. 대체로 오백여명 정도로 구성된 통신사 일행은 문명국 조선에서도 엄격하게 선발한 우수한 인재들로서 하다 못해 통신사들의 시종들까지도 모두가 학문적 조예가 어느 정도 구비된 유능한 인재들이었다. 포로송환 교섭을 위한 3차례의 통신사(쇄환사)를 제외한 나머지 9차례의 조선통신사의 규모는 대체로 그와 같은 성대한 규모였으며 도꾸가와 막부에서는 이들을 최고의 국빈으로서 극진히 맞이했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단순히 왜열도의 수도(에도 ; 江戶)까지 왕래만 한 게 아니라 왜열도의 입구인 대마도로부터 목적지인 에도에 이르기까지 각 주요 행선지에서 여장을 풀고 곳곳의 열도내 지식인들을 교육시키면서 임무를 수행했으므로 왕복에 무려 10개월 이상이 걸리는 대행사였다. 그 모든 접대비용은 '사람이 되어 보고자 결심한 듯한' 도꾸가와 막부에서 부담하였으므로 조선으로서는 막부의 성의를 충분히 양해할 수 있었다. 왜열도는 참다운 문명을 배우기 위한 비싼 수업료를 마다하지 않고 있는 착한 학생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리하여 두 나라 사이에는 매우 진지한 교린의 관계(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무르익어 갔다. 열도에서도, 극히 일부분이기는 했지만 무력보다 문물을 숭상하는 풍조가 서서히 번져가서 그런대로 머지 않아 왜구가 아닌 일본인으로서 대접을 받을 수도 있을 듯 했다. 그러한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동아시아는 조선-청-일본 세나라 간에 이백여년이라는 긴 태평시대를 구가했는데 그것은 서력기원 후의 세계사 어디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장구한 평화였다. 세 나라간의 아름다운 관계는 문명의 탈을 쓴 서양 오랑캐들의 본격적 침략이 시작된 아편전쟁과 페리제독의 함포 협박이 닥치기 전까지 지속되어 갔다.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 막부시대 일본인들은 매우 순진하고 착실한 생도같았으나 아편전쟁의 충격과 함께 서양해적들의 침략이 눈앞에 닥치자 잠자고 있던 악동 다운 근성이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스승의 나라이자 조선(祖先)들의 나라이기도 한 한민족의 나라 조선을 정복하려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었다. 야만족 왜구가 문명한 일본인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는 기회는 그 때로부터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Pluskorea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