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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북원(北元)의 대공세, 남왜(南倭)

浮萍草 2014. 4. 15. 09:49
    
    10. 북로남왜(北虜南倭)
    1) 북원(北元)의 대공세
    기스․칸의 후예로서 에센․칸의 사망후 분열상태에 있던 몽골을 통일한 타타르의 바투․뭉케(다얀․칸)는 몽골의 좌․우 각 3만호를 합하여 6만호를 거느리고 자신의 
    아들들을 봉하여 그 지배권을 확립했다. 
    다얀․칸은 결집된 세력을 과시하며 명나라로 하여금 에센․칸 시절과 같은 규모의 말무역 시장을 개설토록 하는 데 성공하였고 명나라는 이들에게 많은 교역품들을 
    내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얀․칸이 죽자 상속문제로 인하여 우 3만호를 거느린 알탄이 좌 3만호를 열하지방으로 쫓아 버리고 칸이 되었다. 
    그는 대칸이 아닌 한 명의 소칸에 불과했으나 실제적인 실력자로서, 명으로부터 보다 더 유리한 교역조건을 쟁취하기 위하여 기어코 대 약탈전쟁을 벌렸다. 
    3875년(서1542) 여름에 마침내 산서 북부로부터 침공한 알탄․칸의 대군은 600여 킬로미터를 순식간에 휩쓸어 하남성까지 다가갔다. 
    그러한 전광석화같은 침공은 명나라로부터 온 투항군과 백련교도 등의 이적행위 집단들이 앞잡이로서 효율적인 길안내를 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국적을 가리지 않는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종교의 위험이라는 것은 이처럼 기독교가 선교사들을 앞세우고 들어오기 전에도 이미 지나지방에서 선을 보였다. 
    이 대 약탈전쟁에서 20여만 명의 남․녀가 살해되고 200여만 필에 달하는 가축들이 몽골족의 수중에 떨어졌다. 다시 3883년(서1550)에는 재침공해 온 몽골군이 수도 
    북경을 포위한 것을 간신히 물리치는 등 명나라의 대혼란은 계속되었다. 
    알탄․칸은 한인포로나 귀화한 자들로 하여금 내몽골 평원지대에서 농경에 종사케 하고 그 곳에 큰 도회지를 건설하였다. 
    그는 원의 부활을 꾀하여 화북지방에서의 패권을 장악하려 하였으며 오이라트를 격파하고 중앙아시아 지방의 카자흐까지도 장악한 후 청해지방까지도 수중에 넣음
    으로써 그 뜻을 거의 이루는 듯 하였다. 
    그러나 몽골족 내부의 고질인 권력다툼으로 인하여 다시 몽골의 통일이 깨어졌으므로 약세화된 알탄․칸은 명으로부터 순의왕(順義王)이라는 허울좋은 칭호를 받는 
    한 명의 명나라 지방제후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때로부터 몽골족은 몽골족 서로간의 세력경쟁에 여념없는 상태로 다시 후퇴하여 청나라의 등장때까지 지지부진하게 이어져 갔다. 
    
    2) 남왜(南倭)
    세종왕 무렵에 창궐했던 것으로 알려진 왜구의 실체는 대부분이 명나라 해적으로 구성되었고 거기에 떠돌이 왜구들이 다수 가담한 형태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오랜 쇄국정책과 민생파탄에 의하여 명나라 남부 지방에서는 이미 밀무역으로 생계를 꾸려 가는 자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특히 그 무렵에는 이미 포르투갈의 해적들이 아프리카 및 인도의 연안 등을 약탈한 후 동남아시아의 일부 연안을 강점했고, 스페인 해적들은 라틴아메리카 지역을 약탈한 후 필리핀을 무력 점령하는 등 16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십자가를 앞세운 야만적 유럽해적들이 드디어 문명세계의 변방에 그 인면수심의 몰골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종교적 광신과 물질적 탐욕 추구이외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약탈에 광분하고 있던 이 새로운 십자군 중에서도, 포르투갈 해적들은 3890년(서1537) 무렵에 명나라 남해안에 거주권을 획득하고 주로 밀무역에 맛을 들이고 있었다. 아시아의 서부지역과 유럽지방의 동쪽을 장악한 오스만․터어키에게 많은 통관세를 물어야만 했던 대륙횡단 무역로 대신에, 아무런 장애없이 유럽지방으로 직접 동양의 진귀한 물품들을 수송할 수 있는 해로를 통하여 포르투갈 해적들은 막대한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들은 지나지방 남부의 매국적 밀무역꾼들 및 부패한 관리들과도 배짱이 맞아 떨어졌는데 이를 보다 못한 강직한 관리 주환(朱丸)은 전력을 기울여서 범죄자 일망 타진을 시도했으나 뇌물을 받아 먹고 밀수를 눈감아주던 부패한 관리들에 의하여 오히려 모함을 받은 끝에 음독자살하는 등 밀수에 대한 대책은 전무하다시피했다. 나중에는 왜열도 큐우슈우 남단의 사쓰마 지방 왜구들과도 결탁하여 왜열도에 근거지를 구축한 한심한 지나지방 해적들이 더욱 창궐했다. 이 자들은 자기 나라 지리에 밝았기때문에 남부 내륙 깊숙이까지 노략질을 일삼고 돌아 다녔다. 세종왕은 마침내 전 국력을 기울여서 호종헌․척계광 등으로 하여금 해적들을 소탕하도록 했고 결국 해적 두목들을 체포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점차 사태의 본질을 깨닫게 된 세종왕은 재위 말년에 결국 주원장 이래의 쇄국령을 풀고 해적들을 회유하는 방법으로 전환했으므로 그에 따라서 해적질 자체는 종식 되어 갔다. 그러나 서양 해적들이 겉으로는 무역을 가장하고 점차 그 세력을 확장하여 왜열도까지 걸치는 세력을 구축해갔는데 왜구들은 그들로부터 화포․총 등 각종 흉칙스러운 신병기들을 입수하는 한 편 그것들을 모방하여 만들어 내면서, 혼란한 왜열도 전국시대의 막바지로 치달아 갔다.
    Pluskorea ☜        안재세 역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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