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한국문화 대탐사

12 - 1 밥상 <상>

浮萍草 2014. 4. 6. 13:22
    상다리 휘는 한정식, 일제시대 기생집 상차림 닮아
    “미치겠다.” 지난 2일 경주의 ㅅ한정식 식당에서 취재팀은 끝없이 나오는 음식에 비명을 질렀다. 2만8000원짜리 코스에 30개 요리. 이래도 되는가. 대탐사 취재팀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60여 곳의 식당을 둘러보며 한국 밥상의 현주소를 살폈다. 42곳은 대중적 밥상인‘백반집’,18곳은 한정식집이었다. 한식은 무질서했다. 무엇이 한식인지 알 수 없었다. 집밥의 연장인 백반은 너무 초라했고 백반의 고급 버전인 한정식엔 낭비와 과시의 거품이 부글거렸다. 한국의 밥상을 3회에 걸쳐 알아본다.
    ▲ 전라도의 한 한정식 집에서 상에 실려 나오는 음식. 취재팀이 5인분을 주문했더니 두 상 가득 실려나왔다. 다 먹지 못했다. 조용철 기자
    리의 음식철학에서 시작하자. 조선의 밥상은 밥·국·김치·장류를 기본으로 추가되는 찬의 수에 따라 3·5·7·9·12첩으로 나눴다. 19세기 말엽의『시의전서』에는‘밥·국·장은 집마다 차이가 없다. 반찬 3첩이 더해지면 서민 밥상 5첩은 부유한 평민 7·9첩은 양반 대가의 밥상’이라고 나온다. 3첩 밥상에는 반찬으로 생채·숙채 구이·조림 마른반찬·장아찌·젓갈 중 하나를 놓는다. 여기에 김치, 장류, 구이, 조림을 한 가지씩 보태면 5첩 반상이다. 오늘날 보통 밥상은 3첩, 좀 차리면 5첩이다.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정혜경 교수는 “3첩은 영양학적으로 탄수화물·지방·단백질·섬유질 등 5대 영양소를 잘 갖춘 것이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이상은 과하다”고 말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의 밥상을 둘러보자. 지난 1일 전주의 ㄱ식당에 들렀다. ‘수십 년 맛을 자랑한다’고 내건 식당은 생태탕·삼계탕 같은 여러 음식을 파는데 백반은 제일 싼 6000원. 반찬으론 밥·된장찌개 외에 6종이 나왔다. 취재팀이 들른 전국 백반식당의 반찬은 6~9개였다. 벌써 3첩을 넘는다. 한정식은 으리으리하다. 서울의 ㅎ한정식. 5만원짜리를 시키자 26개의 찬이 나왔다. 광주의 ㅇ한정식은 34개. 진주의 ㅇ·ㄱ한정식은 30개다. 2일 오후 담양의 ㅈ한정식에서 2만원짜리 5인분을 시켰다. ‘한 상차림’인데 사람이 늘어도 양만 늘고 가짓수는 같다. 5인분 두 상을 4명이 들고 나왔다. 상마다 찬수는 37개.
    ▲ 전주의 ㅎ한정식 집에서 나온 음식들.3인분을 시켰는데 긴 쪽에 늘어선 찬의 길이는 2m쯤 됐다.30가지 이상 반찬이 나왔다.▶재현된 왕의 수라상인 12첩
    반상.왼쪽 한정식 집의 접시 수와 비교된다. 중앙포토

    문득 1504년 연산군 10년의 기록이 떠오른다. 사옹원 제조 유자광이 말했다. “음식을 올리는 큰 상이 매우 무겁습니다. 상을 두 개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자 연산군은 호통을 쳤다. “임금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뭐가 무거운가!” 음식 수는 서울보다 지방이 많고 광주·담양 같은 전라권이 두드러졌다. 1795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과 자신의 재위 20년을 기념해 아버지의 무덤 현륭원을 찾았다. 행차의 하루 상차림이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나온다. 가장 풍성한 상은 혜경궁에게 바친 현륭원 주반이다. 팥밥과 잡탕 외에 34개 찬이 나왔다. 찬수만 보면 담양 ㅈ정식 2만원짜리가 혜경궁의 밥상을 능가한다. 더 비싼 한정식을 시켰다면 혜경궁의 밥상을 초라하게 봤을 것 같다. 오늘날 백반·한정식은 중병에 걸려있다. 특히 백반의 3첩 반상은 무너졌다. 무엇보다 나물무침이 점령하고 있다. 울산의 ㅂ식당은 나물만 3가지. 춘천의 ㄱ식당은 7개 찬이 다 그랬다. 전주의 ㄱ식당은 7개 찬 중 ‘고등어 한 토막이 들어간 김치찌개’만 빼고 6개가 나물무침. 1만5000원을 받는 고급 백반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의 ㅅ식당 이천의 ㅊ식당 반찬은 20개가 넘었지만 나물무침을 빼면 7첩도 안 됐다. 광주 ㅇ한정식에선 34개 찬이 나왔지만 나물만 9가지였다. 요컨대 집밥의 연장인 백반상은 비참하고 균형마저 무너졌다. 비싼 한정식도 ‘오십보백보’다. 12첩 수라상을 기준으로 가짓수는 더 많지만 중첩되는 재료·조리법을 빼면 마찬가지다. 사실 나물무침은 우리의 독특한 음식이라 그 자체는 나무랄 게 없다. 그러나 일부 음식 전문가는“말린 채소를 삶고 데치고 헹궈야 해 번거롭고 시간도 오래 걸리며 영양 손실도 크다”고 지적한다. 수만 많고 ‘풀밭’인 한정식은 낭비의 온상이기도 하다. ‘전라도·경남’ 취재팀은 30~37개 찬으로 구성된 ‘한 상’을 받았는데 상에 꽉 찬 음식에 압도됐고 그래서 이리저리 손을 놀리다 반 이상 남겼다. ‘코스’도 마찬가지다. 경주 한정식 30개 코스로 식사한 ‘강원도·경북’ 취재팀도 처음엔 부지런히 손을 놀렸으나 곧 배가 찼다. 그래도 계속 나왔다. 뒤에 나온 음식은 거의 손을 못 댔다. 그렇다면 역사 속 우리 밥상은 어땠는가. 사서에 양반·사대부의 밥상 모습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왕들의 밥상은 다르다. 왕의 식사를 알 수 있는 자료는 1795년 정조가 모후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연 내용을 기록한『원행을묘정리의궤』와 구한말 상궁들의 증언뿐이다. 그에 따르면 왕은 하루 다섯 번 식사했다. 초조반(오전 6시)-조수라(오전 10시)-낮것상(오후 1시)-석수라(오후 5시)-야참이다. 조·석수라 외엔 간식이나 후식에 가깝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왕들의 식사철학은 어땠을까. 먼저 극단적 사례로 연산군이 있다. 그는 즉위 원년인 1495년 어명을 내렸다. “내가 일찍 검은 엿 같은 것을 먹어 보니 매우 맛이 좋았다. 그것이 중국산이라 하니 사 오라…만드는 법도 배워 오라”고 했다. 1499년엔 “사슴 꼬리와 사슴 혀를 계속 올려 보내도록 생산지 고을에 급히 글을 보내라”고 했다. 폐위 직전인 1505년엔 “왜(倭) 전복을 구입해 바치라. 모든 특이하고 맛난 것은 널리 구해 바치라”고 했다. 재임 내내 귤·유감·바다거북·돌고래(江豚·복어일 수도 있음)·옥복(玉腹·불분명) 같은 것을 바치라는 얘기가 이어진다.(함규진 『왕의 밥상』) 세종은 달랐다. 1436년 즉위 18년 왕에게 승정원에서 아룄다. “예로부터 제왕이 가뭄을 걱정하여 감선(減膳)했다 합니다…지금 각 도에서 모든 선(膳·반찬거리)을 진상하지 말도록 하셨으며 낮것(낮식사)을 폐하셨습니다. 낮것은 매일 때마다 드셔야 하오니 의당 다시 드셔야 하옵니다.” 그러자 세종은 “하루 네 차례 식사를 하니 족하다. 내가 어찌 생각 없이 낮것을 없애라 명했겠는가”라고 했다. 감선은 나라가 어려울 때 임금이 근신의 뜻에서 반찬이나 식사를 줄이는 것. 젊어서 고기를 좋아했고 살도 쪘던 왕은 나라 걱정에 식사를 줄였고 신하는 늘리라고 아뢴 것이다. 아름답다. 고려 이후 나라에 재해가 있으면 왕은 감선했다. 조선은 더했다. 512년간 341회를 했다. 영조 89회, 정조 29회, 중종 28회, 고종 22회, 성종 21회, 세종 16회 순이다. 성군일수록 많았다. 연산군은 1회. 성종은 웬만한 재변이면 감선하고 밥을 물에 말아 먹어 반찬을 줄였다. 1488년 사옹원 제조 이제가 성종에게 아룄다. “이미 비가 내렸으니 복선(復膳·반찬 수 복원)하기를 청합니다.” 임금은 “경상도에는 비가 내린 것을 들었으나 다른 도는 아직 듣지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안심하겠는가”라고 거부했다. 성격이 괄괄하고 술과 맛난 음식을 즐겼던 효종도 백성이 가뭄에 끼니를 굶는다는 말을 들으면 눈물을 글썽이며 감선했다. 영조·정조는 사흘~닷새를 정해 감선했다. 밥상은 정치였다. 나라와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며 먹었다. 왕들의 밥상은 어땠기에 감선까지 해야 했을까. 문헌적 근거는 확실하지 않지만 임금의 밥상은 12첩 반상이라고 한다. 기본 9개에 반찬이 12개라 해서 12첩 반상이다. 구한말 상궁들의 말이 근거다. 그러나 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 한복려(한식세계화추진위원) 이사장에 따르면 왕의 상도 14~15기(찬)였다. 많아 보이지만 방탕과 낭비가 아니다. 영화 ‘광해’에서 보듯 남은 음식은 아랫사람들의 식사였다. 이런 정신은 사대부로 흘러 7첩도 큰 밥상이었다. 조선의 음식상을 그린 그림을 보면 1인 외상을 받는데 반찬이 많지 않다. 다시 우리 밥상으로 돌아가보자. 왕의 밥상보다 더 많이 차린 뒤 다 먹지도 못하고 남긴 음식은 어떻게 처리될까. 2009년 한국 식품영양과학회 산업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자료 모음집에는 ‘뷔페,가정식 백반 및 한정식 음식점의 남은 음식 관리 실태조사’가 나온다. 이에 따르면 남은 음식 발생빈도는 젓갈·쌈장(50%), 김치·채소(23%), 나물(20%) 순으로 높다. 그런데 음식점의 58%는“남아도 수저가 닿지 않으면 남은 음식이 아니다”는 입장이다. “채소도 소독해 재사용할 수 있다”고 51.7%가 답했다. 음식점 100개 중 50개가 터놓고 반찬을 재사용한다. “숟가락을 안 댔다면 문제가 없다”는 이도 있지만 꺼림칙해하는 이도 있다. ‘싸구려 백반은 먹을 것이 없고 비싼 한정식도 가짓수만 많지 실속 없다‘는 게 취재팀이 본 한식의 현주소다. 백반이야 싸서 그렇다지만 한정식은 왜 이럴까. 먹지도 못할 만큼 차려놓고 남기는 터무니없는 밥상의 기원은 무엇인가.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씨는“대한제국 붕괴 뒤 궁중요리사들이 기생집 명월관에 모여 일제시대 동안 한 상 그득한 기생 밥상을 내놨고 해방 뒤에도 번성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기생은 사라지고 화려한 밥상만 남은 게 한정식”이라며“인사동의 ㅇ한정식 전라도의 한정식집을 운영한 1대 할머니들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했다. 『한식의 배신』 저자인 이미숙 식품영양학 박사도 “관련 연구를 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정혜경 교수도“타당한 주장일 수 있다”며“다만 조선 후기 음식 종류가 많아져 이런 습속이 이어진 것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한복려 이사장은 “옛날 잔치할 때 많이 차려서 없는 집에 나눠 줬는데 잘못 전해져 형식만 남은 점,사회가 급변하며 없던 사람들이 부를 과시하거나 접대할 때 위신을 세우려 했던 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음식이 늘어난 것으로 본다”며 “음식점이나 먹는 사람이나 다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음식을 즐기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식욕은 원초적 욕구다. 왕도 마찬가지다. 조선 왕에겐 사슴 꼬리 에피소드가 있다. 시작은 연산군이었다. 그는 사슴 꼬리·혀, 새끼 사슴, 사슴 태아를 즐겼다. 어미 사슴을 갈라 태아를 꺼내는 잔인함에 대한 상소도 있었다. 중종이나 명종은 좀 덜했지만 꼬리 집착은 여전했다. 명종은 사슴 꼬리 대신 노루 꼬리를 바쳤다고 투정했고 영조도 79세에 “반찬 중에서 사슴 꼬리만 손을 댈 수 있다”고 말했다. 광해군도 특이했다. 『계축일기』엔 “(광해군이) 고기를 불기운만 쐴락 말락 하게 하여 많이 먹고…날고기를 즐기니 눈은 점점 붉어지기만 하더라…”고 나온다. 무얼 먹든 훌륭한 왕이 되면 문제가 없지만 연산군·광해군의 식성이 독특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대부도 마찬가지다. 평생 먹을 것을 탐했다는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맛있는 음식 134종을 나열했다. 정혜경 교수는 “그는 음식 탐미주의자였다”고 말한다. 그에 앞서 김유도『수운잡방(需雲雜方)』이란 조리서에서 108가지 음식 조리법을 기록했다. 명필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의 대정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음식 타령을 했다. 중종의 사돈으로 권세를 누렸던 김안로는 개고기 탐식가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위세를 떨친 윤원형은 ‘사방 열 자가량의 상에 차린 진수성찬’을 즐겼다고 한다. 정약용도 개고기 삶는 법, 개를 잡는 법을 글로 남겼다. 그렇듯 음식은 현실이다. 그럼에도 음식엔 추구할 도(道)가 있다는 것이 바르게 살려 했던 이들의 가르침이다. 여성 선비였던 빙허각 이씨는 1815년에 쓴『규합총서』의 ‘사대부의 식시오관(食時五觀)’에서 말한다. 음식이 나오기까지의 어려움을 헤아리라 맛에 치레 말라(집착 말라) 탐내지 말라 좋은 약으로 알고 먹으라 도업(道業)을 이룬 뒤 먹으라. 아! 밥상이 무거워진다. 『성호사설』의 저자 이익은 말한다. “(진미)는 먹다 보면 탐심이 더욱 생기니 잘 자란 풀에 거름을 주는 격이다…성인께서는 절제함을 위주로 음식을 드셨다…욕망을 억제하고 어김이 없으면 가라앉아 편해진다.”(經史文 節食) 음식은 약이다. 중국의 ‘약보불여식보(藥補不如食補)’는 우리에게 ‘식의동원(食醫同源)’ 사상으로 발전했다. 뒤집으면 음식은 독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의 밥상도 마찬가지. 나눠 먹고 아껴 먹는 아름다움이 있으면 약 흥청망청 혼자 먹는다면 독이다. 우리의 밥상은 독인가, 약인가.
    Sunday Joins Vol 369 ☜        안성규 기자 askme@joongang.co.kr ,함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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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 내리기 쉽지 않은 요즘 한식
    부대찌개·짜장면 … 한식 포함 놓고 의견 분분 “소시지나 햄 떡을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지난달 대학로의 한 부대찌개 식당에서 핀란드 아가씨 틸리 산나(25)는 즐거워했다. 2년 만에 서울을 다시 찾은 그녀는 가장 먹고 싶었던 한국 음식으로 부대찌개를 꼽았다. 파란 눈의 아가씨가 즐겨 먹는 부대찌개의 사연은 사실 슬프다. 6·25전쟁 직후 고기가 귀하던 시절 미군부대에서 나온 소시지나 햄버거 고기를 김치와 함께 끓인 음식이다. ‘존슨 찌개’ ‘의정부 찌개’라고도 했다. 뉴욕타임스도 지난 1월 24일 “햄이 들어간 부대찌개가 한국의 인기 음식”이라고 소개했었다. 그렇다면 부대찌개는 한식인가. 한식 전문가들 사이에 실제로 부대찌개 논쟁이 있었다. 한편에선 “태생이 천한 잡탕을 한식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고 다른 편에선“매운 국물에 햄·소시지를 넣어 만든 우리 고유의 맛”이라고 주장한다.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정혜경 교수는 “이국적 재료지만 김치와 함께 우리 조리법으로 만든 부대찌개는 한식”이라고 말했다. 부대찌개는 최근 음식계에서 벌어지는‘어디까지가 한식인가’를 둘러싼 논쟁의 한 소재다. 그런데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보통 한식은 ‘오랜 세월 우리 문화에서 꽃피워 온 전통음식’으로 여겨진다. 법의 맥락도 비슷하다. 식품산업진흥법 2조에 따르면 한식은 ‘국산 원료를 주재료로 우리 고유의 맛·향·색을 내는 식품’이다. 법에 따르면 부대찌개의 경우 햄·소시지는 국산이어도 ‘우리 고유의 맛·향·색’에 걸린다. 세종대왕 시절 김치를 생각해보자. 당시 주종은 동치미나 오이 김치였다. 그러다 조선 후기 중국 산둥(山東)성의 결구 배추와 고춧가루를 주원료로 한 김치가 시작됐다. 그게 오늘날 우리가 먹는 김치다. 세종 시절을 기준으로 하면 오늘날 김치는 ‘한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아산정책연구원의 설문조사에선 ‘한식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란 질문에 김치(63.3%)를 가장 많이 꼽았다. ‘한식 세계화 지원’ 차원에서 예산 지원을 받은 ‘교촌치킨’은 브라질 닭도 쓴다. 식품산업진흥법에 따르면 이 닭으로 만든 교촌치킨은 한식인가 아닌가. 한식을 정의하기 쉽지 않다는 의미다. 최근의 추세는 한식을 전통에 가두지 말자는 쪽이다. 요리 칼럼니스트 정동현(31)씨는“한국 땅에서 난 재료로 만들고 한국인들이 즐겨 먹는다면 다 한식”이라고 주장한다. 이미숙 박사도 “조상 고유의 방식으로 만든 음식이란 정의는 애매하다”며 “한국인이 향유하는 모든 음식은 한식”이라고 말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주영하 교수는 “김밥·짜장면에도 한국형이란 이름을 붙여 한식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통한식과 현대한식으로 구분하자는 의견도 있다. 아직 한식이 무엇인지 정의는 없다. 한식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한식이 뭔지조차 아직도 애매한 것이다.
    Sunday Joins Vol 369 ☜        임지수 인턴기자 sapere_aude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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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하는 한국인 입맛
    한식 대신 가장 많이 찾는 외식 메뉴는 양식
    이트칼라와 고소득층이 한식을 상대적으로 덜 중요시한다. 또 젊은 층과 화이트칼라층에서 한식의 중요도에 대한 인식과 실제 한식을 먹는 현실 사이엔 큰 격차가 있다. 한식을 먹지 않을 경우 다른 음식으로는 양식을 택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주로 젊은이들이 그랬다. 아산정책연구원 여론·계량분석센터가 지난 3월 25~27일 전국의 만 19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의 밥상’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다. ‘한식 중심의 식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응답자들의 88.5%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성별로는 여성(92.1%)이 남성(84.8%)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직업별로는 화이트칼라가 84.5%로 가장 낮았다. 소득별로는 501만원 이상이 85.9%로 가장 낮았다. 모두 전체 평균에 못 미친다. 이런 조사 결과는 ‘소득이 많을수록 비교적 다양한 식단을 접하게 되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역별로는 부산·울산·경남이 94.4%로 가장 높았고 서울이 84.5%로 가장 낮았다. 한식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한식을 먹는 횟수에서도 차이가 난다. 특 히 젊은 세대에서 두드러졌다. ‘평소 한식을 얼마나 자주 먹는가’에 대한 질문에 60대 이상은 98%가 ‘하루 2~3회’로 답했지만 19~29세는 67.8%가 그렇게 답했다. 전체 평균 86.6%에 크게 못 미친다. 직업별로도 학생이 74.2%로 가장 낮았다. 젊은 세대가 한식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화이트칼라도 79.8%로 평균치에 못 미쳤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78.8%로 가장 낮았고 대구·경북도 83.2%로 비교적 낮았다. 학력별로는 대재 이상이 82.1%로 가장 낮았고 소득별로는 501만원 이상이 81.4%로 역시 가장 낮았다. 연령대가 낮을수록 소득·학력이 높을수록, 글로벌한 도시에 살수록 한식에서 멀어지는 이탈현상이 두드러졌다. 반면 연령대가 높아질수록,소득·학력이 낮아질수록, 서울에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한식을 자주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한식을 하루에 두 번 이하로 먹는 사람의 나머지 식사는 무엇일까. 표본은 적지만 ‘예상대로’ 양식을 택한다. 응답자의 비율이 41.5%로 가장 높았다. 외식이 양식으로 편중돼 있는 것이다. 성별로는 여성(44.9%)이 남성(38.8%)을 앞질렀다. 연령별로는 19~29세가 56.2%로 가장 높았다. 지역별로는 대구·경북이 54.2%로 가장 높았다. 서울은 40.5%였다. 강원·제주는 중국 음식(26.1%)을 꼽았다.
    학력별로는 대재 이상이 43.2%로 가장 높았다. 요약하면 젊은 세대가 양식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젊은이들의 한식 실태를 알아봤다. 지난 4일 오후 번화한 대학가 중 하나로 꼽히는 서울 신촌의 연세로와 주변을 살폈다. 큰길에 있는 음식점은 21개. ‘넓은 의미의 한국 음식’을 파는 곳은 분식집 2곳 등 6곳 밥과 반찬이 나오는 집은 순두부집 하나, 나머지는 부대찌개 냉면 같은 일품음식을 팔았다. 나머지는 패스트푸드점 3개를 포함해 양식집 8곳, 일식집 5곳, 쌀국수 등 동남아 음식집이 3곳이었다. 21개 중 16곳이 비한식이다. 이면도로에선 27개 음식점 중 16곳이 ‘넓은 의미의 한식’을 팔았다. 하지만 밥·반찬으로 구성된 백반을 파는 곳은 2곳. 연세로를 중심으로 조사한 49개의 음식점 중 한정식은 한 곳, 밥·반찬으로 구성된 백반집은 겨우 3곳이었다. 다시 신촌 일대의 대학생 50명에게 “한식 백반이 싫으냐”고 물었다. 25명은 “집밥 같은 백반을 먹고 싶지만 그런 집이 적다”고 답했다. 공통 불만은 ‘백반집 메뉴가 거기서 거기라는’것이었다. 그 외에 ‘맛이 없다’ ‘조미료 맛이 너무 강하다’가 각각 15명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10명이 ‘너무 짜다’고 했다. 하루 세 끼를 ‘한식’만 먹는다는 진일우(27)씨는 “대부분 두루치기나 된장찌개만 판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경험은 취재팀의 경험과 일치한다. 취재팀 모두 백반집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2일 춘천에선 춘천닭갈비 외의 메뉴를 찾기 어려웠다. 시내 외곽에서 겨우 찾았다. 전주에서는 30분 이상, 광주에서는 두 시간가량 걸렸다. 끼니마다 백반집을 찾는 것은 ‘작전’ 같았다. 울산에선 1차로 음식점이 많은 관공서 주변의 반경 500m를 뒤졌다. 그래도 없어 재래식 시장으로 들어가자 허름한 백반집이 드문드문 있었다. 포항도 마찬가지였다. 취재팀 모두 해당 도시에 초행길이어서 잘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샐러리맨들이 많이 모이는 ‘먹자골목’에서도 찾기 쉽지 않았던 점으로 미뤄 백반이 환영받는 음식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게 ‘한식 현대화’를 향한 나팔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오늘날의 백반, 한국 밥상이 처한 현주소다.
    Sunday Joins Vol 369 ☜        이승률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김보아 연구원, 임보미 인턴 seungryul1@asanins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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