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한국문화 대탐사

9 영·정조 이후 여성 선비 르네상스

浮萍草 2014. 3. 16. 16:13
    15세 사주당, 문중 남자보다 출중 영조 경연관도 놀라 
    여기 조선의 위대한 여성 군자가 누워 있다. 한국외국어대 용인 캠퍼스 뒤 단봉산 중턱. 사주당 이씨와 그의 남편 유한규가 나란히 누워 있는 곳. 1821년 사망한 사주당이 조선 남성과 견줄 만한 여성 선비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아들 유희가 쓴 어머니에 대한 『가장』 등을 통해서다. 사주당의 삶을 재구성한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 캠퍼스 뒤의 단봉산 중턱에 있는 사주당 이씨와 남편 유한규의 합장묘.사주당은 신사임당에 이어 조선 남성 선비와 견줄 만한 여성
    선비였음이 드러나고 있다.조용철 기자
    1800년대 초반,유희(柳僖)의 집. 한 선비가 대청에 앉은 노부인에게 절을 하더니 가르침을 받는다. 그는 진사에 급제하는 이면눌이다. 언젠가는 호조판서가 된 이양연도 와서 가르침을 받았다. 노부인은 사주당 이씨다. 이창현과 강필효는 글의 질정을 청했다. 사주당 이씨가 보여 준 선비의 풍모다. 영조 15년(1739년) 12월 5일 유시(오후 5~7시) 청주. 전주 이씨 노론 가문인 이창식(李昌植)의 집에 딸이 태어났다. 2남5녀의 막내. 어릴 때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집은 넉넉지 않았다. 7대조가 이조판서에 증직(사후에 관명을 주거나 높임)된 이후 실제 벼슬에 나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조 이천배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막내 동서여서 노론에선 뼈대가 있었다. 소녀는 길쌈과 바느질을 잘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어치웠다. “사람 노릇 하는 것이 이것에 있다는 것인가”라고 일갈했다. 그러곤『주자가례』『소학언해』『여사서』를 읽기 시작했다. 밤엔 길쌈하는 불을 빌려 봤다. 그렇게 1년 문리가 통했다. 이번엔『논어』『맹자』『중용』『대학』『시경』『서경』으로 나갔다. 오빠가 배우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감쌌다. “그러지 마라. 옛 성현의 어머니 중에 누가 글을 몰랐는가.” 소녀는 매진했고 열다섯 전에 이씨 문중 남자를 앞섰다는 말을 듣는다(신작의『유목천부인이씨묘지명』). 영조의 경연관이었던 남당 한원진이 소문을 듣고 탄복한 것도 이 시기 일로 보인다. 19세에 아버지상을 당했다. 지극히 아껴 주던 아버지. 3년상 중 솜옷을 입지 않고 끼니도 자주 걸렀다. 이후 25세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내훈』이나『여범』같은 종류의 여훈서(女訓書)를 편찬하고 이어 유학 경전 자체를 체계적으로 연찬했을 것이라고 고려대 한문학과 심경호 교수는 ‘사주당 이씨의 삶과 학문’에서 추정했다. 역시 영조의 경연관이었던 송명흠이 사주당에 대해 “친척이 아니라 대면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다”고 한 것도 이 시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소녀가 규수로 성숙할 동안 용인 구성(驅城)에 사는 소론(少論) 선비 유한규는 연이은 부인상에 상심하고 있었다. 첫 부인은 삼학사의 한 사람인 오달제의 증손녀 해주 오씨인데 자식 없이 23세에 죽었다. 둘째 부인 평강 전씨는 두 딸을 낳았지만 남편이 을해옥사에 연루돼 죽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자결하고 말았다. 실제로는 시동생이 연루된 것이었다. 셋째 부인 선산 김씨는 아들 흔(俒)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유한규 45세 때의 일이다. 세 부인을 잃은 그는 결혼 생각을 버렸다. 그런데 “한 처녀가 경사에 통하고 행실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청혼했다. 25세 사주당 이씨였다. 초야에 남편은 “어머니를 잘 모셔 달라”고 당부한다. 부인은 “옳지 않으신 부모는 없으니 어떤 어려움이 있겠습니까”라고 답한다. 부인은 문자 냄새를 피우지 않고 효성스러운 며느리 현명한 부인으로만 처신했다. 시어머니는 자주 아파 부부는 옷을 풀지 못했다. 그렇게 8년을 모셨다. 그러나 부부 금실은 좋았다. 나이 차이가 컸어도 남편은 부인을 지식인처럼 대했고 부인의 글에 서문도 썼다. 식사하며 경을 논했고 시를 지으며 벗처럼 지냈다. 사주당이 남편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논어』‘양화편’의 ‘성상근(性相近)’을 논하는데 이(理)와 도심(道心),칠정(七情) 같은 복잡한 단어가 튀어나온다.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부부는 1남3녀를 뒀다. 장남 희(僖)는 후에 실학 백과전서파의 대가가 된다. 그것은 먼 뒤의 일. 정조 등극 뒤 소론이 등용되면서 유한규는 경릉령 벼슬을 얻는다. 그런데 부인은 봉록과 관직에 집착하지 않고 험한 현미밥을 먹었다. 유한규는 목천현감을 끝으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부인 나이 45세인 1783년 다정했던 남편의 죽음으로 삶이 힘겨워진다. 아들 희는 11세. 세 자식 모두 어렸다. 3년상 뒤 부인은 전 부인의 아들 흔에게 “가난하면서 계모에게 효를 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늙지 않았으니 누를 끼치지 않겠다”며 용인으로 떠난다. 어려운 삶이었다. 호미도 없이 밭을 일구고 촛불도 없이 길쌈을 했다. 거북 등처럼 갈라진 손으로 자리를 짜고 소금 반찬으로 밥을 먹었다. 인척들이 봉록을 떼어 주려 해도 사양했다. 자식들이 남의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도 금지했다. 그래도 아들은 공부시켰고 딸들에게도 부엌일을 시키지 않았다. 당시 부인들의 의무였던 화식(貨植, 재물 증식)에도 힘써 힘겹게 돈을 모아 선대의 묘를 관리했다. 가난했어도 사특함은 없었다. 집에 통이 두 개 있었다. 남에게 (곡물 같은 것을) 줄 때 작은 통을 받을 때 큰 통을 써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이를 바꿨다. 많이 주고 적게 받게 했다. 부인은 “업보를 갚았다”고 했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은 버릴 수 없는 일. 아들 희는“글에 있어서 경사(經史, 유교경전이나 역사서)는 있었지만 자집(子集 주석서나 시문)은 안 했다”고 했다. 부인은 당호도 희현(希賢, 현명함을 추구함)에서 사주(師朱)로 바꿨다. 성리학 지식이 높아진 부인은 당쟁에도 일침을 줬다.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갈리게 된 계기인 회니(懷泥) 시비가 대상이었다. 부인의 친정은 노론, 시댁은 소론이었지만 ‘둘 다 잘못했다’고 일갈했다. 사주당은 아들을 가르쳤다. 유희는“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조종진의『남악유진사묘지명』). 아들이 입단속을 잘 못함을 걱정하며 “과거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아들은 따랐다. 자식에게 출세만을 목적으로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당쟁에 휩쓸릴 걱정도 있었겠지만 자식에게 선비의 길을 따르라고 한 것 자체가 선비의 모습이다. 사주당은 여러 저술을 했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그중 62세에 지은 조선시대 유일한 태교서적인 『태교신기』엔 스토리가 있다. 젊었을 때 지은『교자집요』를 20년 뒤 막내딸의 궤짝에서 발견하자 그는 이책에서 ‘태(胎)기르는 방법’만 따로 떼내 생각을 덧붙여 『태교신기』를 완성한다. 이를 아들이 재편집하고 우리말로 해석했는데 이를 위당 정인보가 1936년 후손인 유근영을 통해 보고 해제를 작성해 세상에 알려졌다. 사주당은 고질 때문에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1821년 9월 83세로 죽기 전 유언으로 “『태교신기』만 남기고 다 태우라”고 했다. 무덤엔 청주 어머니의 수간 두루마리 편지 한 축과 남편과 성리를 논한 글 한 축, 손수 베낀『격몽요결』 한 권을 넣었다. 아들은 쓴다. “어머니의 바탕은 장부이셨으되 행실은 부인이었노라(質丈夫 行婦人).”
    Sunday Joins Vol 366 ☜        안성규 기자 ask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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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조 시기 ‘여성 군자’ 사주당 이씨 기록 찾았다
    선비 가르친 조선 후기의 ‘사임당’ … 아들 유희가 남긴 『가장』서 당시 행적 확인
    사주당 이씨를 쓴 가장(家狀).
    선시대 현모양처이자 최고 여류 지성으로 꼽혔던 신사임당에 버금갈 만큼 학식과 부덕이 뛰어나 여성 군자로 불린 사주당 이씨(1739~1821)에 관한 기록이 발굴됐다. 영조~정조 시대 인물인 이씨는 동해모의(東海母儀, 해동 어머니의 모범)라는 호칭을 받기도 했다. 전 성리학 수준이 일정한 경지에 올라 영조의 경연관(經筵官)이었던 한원진·송명흠 같은 호서(湖西)거유 (巨儒)의 칭찬을 받았다. 특히 남당 한원진은 사주당이 12세인 1751년 사망한 사람이어서 그가 10대 소녀인 사주당을 칭찬했던 것 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사주당이 영재 소녀였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사주당은 또 후에 호조참판이 되는 이양연,순조 때 진사 3등으로 합격하는 이면눌 같은 이가 성인이 된 뒤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사주당은 경사(經史)를 주로 연구했으며 결혼 직후엔 당호를 희현당(希賢堂)으로 했다가 ‘주자(朱子)를 배운다’는 뜻인 사주당(師朱堂)으로 바꿨다. 그는 남편 유한규와 성리학 토론을 했고 붕당의 다툼(당쟁)에 대한 견해도 드러내 성리학 학식에서 선비 들과 어깨를 견줬다. 특히 서인(西人)이 노론·소론으로 분열된 데 대해 중심 인물인 노론의 송시열과 소론의 윤증 모두를 비판 하는 중립적 면을 보여 주기도 했다. 나아가 극심한 붕당(朋黨) 쟁론의 원인을 ‘극원(克怨)’으로 지적했는데 이는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며 원망한다’는 뜻이다. 조선말기 이건창이『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시비가 불분명한 일로 거국적인 붕당 시비가 200년간 계속됐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내용은 사주당의 아들이자 『언문지』『물명고』의 저자로 유명한 조선 후기 백과전서파 실학자 유희(柳僖)가 쓴『선비숙인이씨가장(先妣淑人李氏家狀)』(어머니 사후 쓴 기록사진)에 나온다. 『가장』은 2004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된 유희의 문집『문통(文通)』가운데『방편자문록 (方便子文錄)』권 2에 들어 있었는데 본지의 요청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용만 책임연구원이 이번에 처음 완역했다.
    『가장』에는 ‘노년에 전후의 약간의 문초를 모아 태우고’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사주당이 여러 편의 저술을 했음을 의미한다. 그중엔 결혼 전에 쓴『가례(家禮)』와『가편여집』이 있다. 결혼 뒤엔 기거·음식에 관한 절도를 수집하고 경전 가운데 아이에게 적합한 내용을 부록으로 붙인 뒤 언문으로 풀어 책을 만들었다. 남편은 『교자집요』라는 제목을 달았다. 20여 년 뒤 62세에 사주당은 『교자집요』의 내용을 보충하고 재편집해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저술했다. 조선시대 유일한 태교서적이다. 박용만 책임연구원은“행장은 치우치지 않고 어머니 사주당의 참모습을 상세히 보여 주는 드문 자료”라며“대부분의 조선 여류 지식인은 출가 뒤 남편의 후원으로 재능을 발현했지만 사주당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현모양처를 넘어 학인으로 자리 잡은 큰 인물”이라고 평했다.
    Sunday Joins Vol 366 ☜        안성규 기자 askme@joongang.co.kr, 김석근 아산정책연구원 인문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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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선비의 소중한 기록, 서울 고서적상에 팔릴 뻔
    200년간 파란 겪은 유희의 『문통』과 사주당『가장』
    사주당 이씨의 아들 유희가 남긴 문집.그는 널리 알려진『언문지』와『물명고』외에 100여 권에 가까운 문집인『문통』을 남겼다.한국학중앙연구원에 전시된
    문통의 일부.조용철 기자
    주당 사후 200년 가까이 그의 삶을 담은『가장』은 파란을 겪었다. 책은 아들 유희의 문집인 『문통(文通)』에 남아 후대로 전해진다. 그 과정에서 문집이 직계로 전해지지 않은 듯하다. 사주당의 4대손에 이르러 막내 계통인 근영(近永)이 보관하게 된다. 1897년생으로 경기고보(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족보에 따르면 1919년 독립운동에 참여해 옥살이를 했다. 이어 21년 23세엔 경북 예천에 세워진 영신의숙의 훈육교사가 됐다. 의숙은 42년 문을 닫고 근영은 해방 뒤 대창 학교와 동부국민학교(예천군 풍천리 우망초등학교, 현재 폐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문통』을 아꼈다. 문집을 재정리하고 필사했다. 그 과정에서 위당 정인보에게도 보여 줬다. 그러다 49년 6월 돌연 혈압으로 사망한다. 아들 래현(67)씨는 “문집 발간·정리에 많은 돈을 들여 남은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우망초등학교 앞 추모비에도 “사생활이 극히 궁핍했다”고 쓰여 있다. 『문통』은 홀로 남은 부인 권말연씨에게 남겨졌다. 자식 셋에 먹고살기 힘들었던 권씨는 예천 남쪽 50리 친정마을인 매천2리 안동 권씨 집성촌으로 들어왔다. 보리쌀 한 말을 주기도 얻기도 힘든 빈촌. 살 곳도 없어 곁방살이 처지였고 광주리를 이고 물건을 팔았다. 그러다 마을 서당이었다가 창고로 쓰이던 폐가로 들어갔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100년쯤 된 폐옥 같은 곳에서 그들은 30여 년을 살았다. 부인도 문집은 애지중지했다. 궤에 넣어 방 안 벽에 쌓아 보관했다. 책을 아는 몇몇에게 가끔 빌려 줬을 뿐 손도 못 대게 했다. 래현씨는 “한 80권 정도 있었는데 빌려 준 책들이 다 돌아왔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그게 『문통』인지도 몰랐다. 그 사이 사주당의 방계인 유기봉(67)씨가 문집을 서울로 갖고 왔다. 유씨는 “유희 할아버지가 유명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고등학교 시험에 출제될 만큼인 줄은 몰랐는데 대고모(권말연)가 이름을 널리 알리자고 해서 가져왔다”고 말했다. 방에 꽉 찬 책 가운데 반듯한 것들만 가져왔다. 서울로 올라온 문집은 한때 고서적상에 흘러 들어갈 뻔했다. 그러다 1987년 어머니 권말연씨 사후 서울로 올라온 래현씨가 보관하게 됐다. 시간이 흘러 2003년 진주 유씨 문중의 일을 보는 유조호(79)씨가『문통』의 존재를 알게 됐다. 유씨는 “가 보니 바닥에 책이 널렸는데 물에 젖고 곰팡이가 피고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지를 넣고 잘 말렸다”고 했다. 1년쯤 뒤 2004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문집을 넘겼다.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문통』이 빛을 본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가장』이 완역돼 처음으로 사주당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런데 『문통』이 30년 넘게 보관돼 있었고 100년도 넘었다는 그 집은 어떻게 돼 있을까. 지금은 외양간으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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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합총서』쓴 빙허각 이씨, 시동생 직접 가르쳐
    1 뛰어난 여성 성리학자였음에도 쓸쓸히 잊혀져간 윤지당 임씨. 원주에 있는 그의 자취는 임윤지당길이라는 좁고 초라한 골목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2 시할아버지 무덤 발치에 있는 임윤지당의 무덤. 후사가 없어 그나마 여기 묻히면 후손이 돌봐줄 거라 생각해 그리 했다. 비석도 없어 처연한 느낌을 일으킨다.
    3 설씨 부인의 자취가 남아 있는 순창의 귀래정. 조용철 기자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무장리’라는 정보만으로 윤지당 임씨(1721~­1793)의 무덤을 찾긴 쉽지 않았다. 표지도 없어 야산 여기저기를 한참 다니다 동네 이장의 도움으로 겨우 찾아냈다. 시할아버지의 묘 발끝에 곁방살이하듯 놓인 무덤. 비석이나 상석도 없이 쓸쓸하다. 마을 주민은 “윤지당이 유언을 그렇게 남겼다”고 말한다. 자식도 없이 죽어 벌초할 이 없는데 시할아버지 발치에 묻히면 나을까 싶은 마음 처연하게 슬픈 지혜다. 조선 후기 기학으로 유명한 임성주의 누이. 삶의 뒤안길이 왜 이리 쓸쓸할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뜬 뒤 윤지당은 오빠 임성주에게 배웠다. 어머니 곁에 오빠·누이가 모여 경전과 역사,고금의 인물과 정치를 논했다. 윤지당은 그때마다 한마디로 시비를 가렸다. 후에“나는 본래 성질이 조급해 불편함을 잘 못 참았다. 자라며 힘써 극복하려 했지만 뿌리는 남아 조금씩 발동한다”고 썼다. 문제를 알고 극복하는 노력, 수신(修身)이며 그래서 여성 선비다. 윤지당은『대학』과『중용』을 깊이 공부했고 이기심성론·인심도심논쟁·사단칠정론도 파고들었다. ‘학문을 고기 맛처럼 좋아해 그만두려 해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사후 3년 1796년 편찬된 임윤지당의 문집은 상하 35편 상권엔 역사·인물평론인 ‘논’이 11편 철학논문에 해당하는‘설’이 6편이다. 하편엔 스스로 훈계하는 ‘잠’이 4편, 경전 해석인 ‘경의’ 2편 등이 있다. 깊은 학식을 보여 준다. 개인사는 불우했다. 19세에 신광유와 결혼했지만 27세에 사별했다. 자식은 어릴 때 죽고 시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지만 그도 29세에 죽었다. 학문에 다시 전념한 것은 모시던 시부모와 양부모가 돌아가고 본인이 늙은 뒤. 깊은 밤 낮은 목소리로 경전을 읽었다. 고단한 삶, 학문에서 즐거움을 찾다 1793년 73세에 사망했다. 그가 살았다는 원주시 봉천동의 ‘임윤지당길’을 찾았지만 폭이 좁고 초라하고 옹색하다. 페미니즘의 시대임에도 조명받지 못하는 여류 지식인이다. 신사임당 이후 주춤하던 조선의 여성 지식인은 영조·정조대 문예부흥을 거치면서 기지개를 켠다. 사대부 집안에서 여성들은 어릴 때부터 남자 형제와 같이 경전과 수신서를 읽었다. 한글을 넘어 한문 글쓰기가 가능한 지식인 여성들이 여럿 등장했다. 또 다른 여류 선비로 정일당 강씨(1772∼1832)가 있다. 명문이지만 가난한 집에서 자란 그는 21세에 윤광연(尹光演)과 결혼했는데 생업으로 다른 일을 하던 남편에게 학문을 권했다. 사서와 경학을 공부하는 남편 곁에서 바느질을 하며 읽는 소리를 듣고 내용을 알아차리며 바로 외웠다. 남편은 같이 공부할 것을 권했다. 부부 금실도 좋아 주고받은 쪽지 편지가 전한다. 그러나 어머니로서의 삶은 고단했다. 5남4녀를 다 돌 전에 잃었다. 몸도 약한 정일당은 가슴에 자식을 묻고 학문에 전념함으로써 고단한 삶을 이겨 냈다. 많은 저술은 대부분 유실됐다. 문집 『정일당유고』는 사후 남편 윤광연이 펴냈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아내의 문집을 간행한 남편이 갸륵하다. 사주당 이씨의 외조카인 빙허각 이씨(1759­~1824)도 이름난 여류 학자다. 전주 이씨 명문가 출신인 그도 성격이 불같았다고 한다. 간니가 날 무렵 또래 아이들이 이를 가는 것을 보고 작은 망치로 위아랫니를 뽑아 피를 철철 흘렸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15세에 남편 서유본(徐有本)과 결혼했는데 시집도 대단했다. 『보만재총서』를 남긴 서명응(徐命膺)은 시할아버지 『해동농서』를 남긴 서호수(徐浩修)는 시아버지다. 빙허각은 시집온 그해에 다섯 살 아래 시동생 서유구 (徐有榘)를 직접 가르쳤는데 훗날 서유구는 『임원경제지』를 남긴다. 1806년 시댁이 옥사(獄事)에 연루돼 몰락하자 그는 차밭을 일구면서 집안 살림을 떠맡았다. 그 경험이『규합총서(閨閤叢書)』를 쓰는 바탕이 됐다. 남편은 자신의 문집에서“아내가 여러 책에서 줄거리를 모아 항목별로 나눴다… 내가 책 이름을 규합총서라고 했다”고 썼다. 빙허각이 51세에 쓴 책은 20세기 초까지 여성들에게 가장 널리 읽혔던 백과사전이었다. 남편이 죽자 절명사(絶命辭)를 짓고 곡기를 끊은 채 누워 지내다가 사망했다. 『규합총서』외에『청규박물지』『빙허각 시집』 등(3부 11책)이 전한다. 조선 초기 신사임당 이전의 여성 지식인으론 순창의 설씨 부인(1429~­1508)이 꼽힌다. 신숙주 동생 신말주의 부인이다. 신말주는 형이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에 간여하자 처가인 순창으로 내려갔다. 설씨는 불사를 위해 권선문(勸善文)을 짓고 사찰 그림을 그려 돌려 보게 했다. 양반집 부녀자가 사찰 건립을 위해 문장을 썼다는 사실 자체가 주목할 만하다. 14폭의 권선문, 2폭의 채색도로 구성된 절첩(16쪽 보물 제728호)은 여류 문인 필적으론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위당 정인보는 “조선조 뛰어난 여류로서 신사임당이 그림과 글씨의 미를 갖추고 있으나 문장에 있어서 설씨 부인이 더 솟을 것 같다”고 극찬했다. 순창의 설씨 자취론 1974년 보수한 ‘귀래정(歸來亭)’과 고령 신씨 세거지가 있다. 귀래정은 신말주의 호이자 그가 세운 정자 이름. 서거정의『귀래정기』와 강희맹의 시문이 액판으로 걸려 있다. 무남독녀였던 설씨 부인의 공덕을 기리는 뜻에서 고령 신씨 문중은 ‘외손봉사’(外孫奉祀:외손자가 외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것)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Sunday Joins Vol 366 ☜        김석근 아산정책연구원 인문연구센터장 / 이남희 원광대 한국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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