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55>『연애 소설 읽는 노인』과 루이스 세풀베다

浮萍草 2014. 3. 16. 09:19
    노인은 잊고 싶었다, 인간의 야만성을

    루이스 세풀베다(Luis Sepúlveda,
    1949~)
    칠레에서 태어났다.피노체트의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942
    일간 수감됐으며 군부에 의해 추방당해 망명
    해야 했다.기자로 앙골라 내전을 취재했고
    그린피스에서도 행동파 대원으로 활동했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1989년에 발표한
    그의 첫 소설이다.
    제학이 우울한 학문인 이유는 그 전제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데 우리가 가진 자원은 유한하다는 전제 말이다. 그래서 가진 자원을 최대한 늘리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라는 것이지만 문제는 유한한 자원을 아무리 늘려도 무한한 욕망을 채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현대 문명의 비극은 여기서 출발한다.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 열대우림도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마구 유린당하고 있는데,『연애 소설 읽는 노인(The Old Man Who Read Love Stories)』의 무대인 엘 이딜리오 역시 에콰도르 정부가 ‘약속의 땅’이라고 속여 수많은 사람을 이주시킨 신개척지 마을이다. 이곳에는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이주민들 외에도 일확천금을 노리고 들어온 노다지꾼과 무차별적으로 야생동물을 죽이는 밀렵꾼들이 활개치고 정부가 파견한 뚱보 읍장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 있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포로아뇨 역시 고향을 떠나 엘 이딜리오로 들어왔지만 문명을 거부하는 원주민 수아르족과 함께 생활하며 밀림에서 생존해 나가는 법을 배운 인물이다. 그는 글을 쓸 줄은 모르지만 읽을 줄은 아는데, 이 사실은 대통령선거일 날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읽을 줄 알아! 그것은 그의 평생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다. 그는 글을 읽을 줄 알았다. 그는 늙음이라는 무서운 독에 대항하는 해독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읽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읽을 것이 없었다.” 노인은 도시로 나가 책을 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휩싸인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고르기 위해 돋보기안경까지 쓰고 다섯 달 동안이나 혼자서 생각하고 묻고 되묻는다. 기하학 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역사 책은 거짓말만 늘어놓은 것 같다. 마침내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 고통과 불행을 겪다 결국은 해피엔드로 끝나는 연애소설 책을 보기로 하는데, 등장인물들의 아픔과 인내를 아름답게 묘사한 대목에서는 줄줄 흐르는 눈물에 돋보기가 흥건히 젖을 정도다.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읽었다.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노인은 세월보다 더 끈질긴 사랑이야기를 읽으며 무료하고 적막한 나날을 보내지만 이런 고독과 고요는 이미 파괴된 밀림의 평화처럼 오래갈 수 없다. “밀림은 새로이 정착한 이주민이나 금을 찾는 노다지꾼들 때문에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로 인해 사나워지는 것은 짐승들이었다. 조그만 평지를 얻고자 무차별하게 벌목을 해대는 바람에 보금자리를 잃은 매가 노새를 물어뜯고 번식기에 접어든 멧돼지가 사나운 맹수로 돌변하기도 했다.” 비극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기가 시작되던 어느 날 백인 시체가 발견되면서 마을은 두려움으로 술렁거린다. 양키 밀렵꾼에게 새끼들과 수놈을 잃은 암살쾡이가 그 보복으로 인간 사냥에 나선 것이다. 암살쾡이가 인간을 덮친 것은 맞지만 먼저 싸움을 건 쪽은 밀렵꾼이었다. 노인은 말한다. “그때 암놈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 짐승은 슬픔과 고통을 이기지 못한 채 반쯤은 미쳐버렸을 것이고 마침내 복수를 결심했을 것이오. 인간 사냥에 나선 거지요. 하지만 불쌍한 양키 놈은 자기 옷에 어린 짐승들의 젖 냄새가 배는 것도 모르고 가죽을 벗기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니.” 암살쾡이의 복수극은 이어지고 결국 세상사를 멀리한 채 연애소설만 읽던 노인은 뒤집힌 현실 속으로 어쩔 수 없이 뛰어든다. 살쾡이와 노인 간의 처절한 대결은 이렇게 시작된다. 결과는? 살쾡이의 죽음이다. 그러나 승리자는 없다. 노인은 이것이 명예롭지 못한 싸움이었다며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린다. 새끼들과 수놈을 잃은 그 짐승은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노인은 짐승의 시체를 강물 속으로 밀어 넣는다. 백인들의 더러운 발길이 닿지 않는 아주 먼 곳으로 흘러가길 바라며. 노인은 손에 들고 있던 엽총도 강물에 던져버리고는, 가끔이나마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연애소설이 있는 자신의 오두막을 향해 걸어간다. 세풀베다는 이 작품을 아마존의 수호자이자 환경 운동가로 활동하다 무장괴한들에게 살해당한 치코 멘데스에게 헌정했는데,그는 첫 망명지였던 아마존 밀림에서 수아르족과 함께 지낼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 있었다고 말한다. 해가 질 무렵이면 식구들을 모아놓고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의미 있고 재미있게 만들다 보면 분명 더 나은 내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아마존의 강물처럼 우리네 삶도 계속 흘러가기 마련이다. 하루가 그 다음 날로 흘러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지금 우리의 삶을 만들어내듯이 말이다.”
    Sunday Joins Vol 366 ☜        박정태 굿모닝북스 대표 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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