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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주인 짐주(鴆酒)로 마감한 고려 대학자의 꿈

浮萍草 2014. 3. 8. 11:33
    살모사를 먹고사는 짐조
    인용 독주를 짐주(鴆酒)라 부른다. 짐주는 죄인을 사사(賜死)할 때 사약으로 썼고 때로는 정적(政敵)이나 당파적 이념이 다른 사람을 죽이고자 할 때도 암살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짐주는 뱀이 주식인 짐조(鴆鳥)라는 새의 배설물이나 새 깃을 담근 술이다. 마시면 즉사한다고 한다. 짐새는 중국 광동성(廣東省)에서 나는 독조(毒鳥)로 알려져 있다.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당(唐) 나라 이조(李拏)가 지은 <당국사보(唐國史補)>를 인용 ‘새매[鷣]라는 새는 천년을 묵으면 짐새가 되는데 이는 늙을수록 더욱 악독하게 된다. 남쪽 산천(山川)에 짐새가 있는 지방에는 반드시 물소[犀]가 있고 사충(沙虫)과 수로(水弩)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산까마귀[鸀]와 독수리[鳿] 그리고 약초(藥草)도 있다.’고 성호사설 제5권 만물문(萬物門) 음짐(鷣鴆 새매와 짐조) 편에 기록했다. 곽의공(郭義恭)이 찬한 <광지(廣志)>에는'그 새의 크기는 올빼미만 하고 자록(紫綠)색이며 독이 있고 목은 길이가 7-8촌(寸) 정도 되며 살모사를 먹고 산다. 수컷의 이름은 운일(運日)이고, 암컷의 이름은 음해(陰諧)이다. 그 새의 깃으로 담근 음식을 먹으면 곧 사람이 죽는다’라고 썼다. <산해경(山海經)>의 설명도 이와 비슷하고 <설문(說文)>에서도 ‘짐(鴆)은 독조(毒鳥)이다. 좌전정의에 짐새는 살모사를 먹고 그 깃으로 술에 저어 먹게 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毒鳥也 左傳正義. 鴆鳥食蝮. 以羽翮擽酒水中. 飮之則殺人.)’고 풀이했다. <광아(廣雅)> 편의 기록도 같다. <회남자(淮南子)>,<옥편(玉篇)>,<굴원이소(屈原離騷)> 등 역대 사서에도 짐새 기록은 이어진다.
    강한 독이 있어서 둥지근처에는 풀이 나지 않으며 분뇨나 깃이 잠긴 음식을 먹으면 즉사하기 때문에 차일(遮日)이 생겼다고 했다. 한고조(漢高祖: 劉邦)의 정실이었던 여태후는 유방이 생전에 사랑했던 측실 척부인(戚夫人, ? ~ 기원전 194) 소생이며 조왕(趙王)에 봉작된 아들 유여의(劉如意)에게 짐주를 먹여 독살했다. 유방이 친정을 할 때마다 유여의를 태자로 세울 것을 간청한데 따른 보복이었으나, 그녀를 총애했던 유방에 대한 반감과 투기심이었다. 짐주는 진나라 승상 이사(李斯)가 한비자(韓非子)를 시기하여 죽일 때 쓴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삼국지>에는 동탁(董卓)이 이유(李儒)에게 지시하여 소제와 하(何)태후에게 짐독(鴆毒)이 든 술을 마시도록 했는데 거부당하자 하태후를 직접 죽이고 부하에게 소제를 죽이게 한 대목이 나온다. 한치윤은<해동역사 고려(高麗 4)>에<동사강목>을 인용하여,충혜왕(忠惠王)이 유배지로 가다가 악양현에서 짐독(鴆毒)을 먹고 죽었다고 하나 사인(死因)은 분명치 않다고 모호한 입장을 취했고 상례(喪禮) 편에는 공민왕 원년(1352) 3월 충정왕(忠定王)이 짐독(鴆毒)을 마시고 강화(江華)에서 훙하였다고 써서 두 왕이 암살 되었음을 암시했다. 1476년 <성종실록>에 ‘진(晉)나라 선제(宣帝)가 현석도(玄石圖)에,“... 우금(牛金)에게 짐주(鴆酒)를 먹여 독살(毒殺)시켰는데 이는 우씨(牛氏)가 사마씨(司馬氏)를 대신하여 군주(君主)가 될까 의심한 때문이었다’는 주 기록은 짐주를 암살의 수단으로 활용했음을 보여 준다. 윤휴(尹鑴 1617-1680)가 쓴<백호전서(33권)>잡저(雜著 신사년 초겨울에 쓰다[辛巳孟冬書])에는‘김충암(金冲庵)이 제주로 귀양갔는데 금부랑(禁府郞)이 사약사발을 들고 갔다. 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내 평소 주량이 커서 짐주(鴆酒) 한 병으로는 내 목숨이 끊어지게 할 수 없을 것이니 소주를 많이 준비해 두고 기다리라.” 하더니... ’라 하여 짐주가 사약으로 썼음을 보여 준다. 1689년 (숙종 15) 의금부에서 박정영을 국문하는 과정에서‘듣건대 동평군(東平君 인조의 손자)이 북경(北京)에서 짐새[鴆鳥]를 사가지고 왔다고 하니 화(禍)를 예측 할 수가 없다.’는 내용과 숙종 28년 홍태유(洪泰猷) 원사(爰辭 죄인의 범죄 사실을 조사한 내용)의 대략에 ‘가까운 종실이 심지어 역관으로 하여금 짐(鴆毒)을 무역해 오도록 했는데’ 라는 기록에서 보면, 짐주가 사약 또는 암살 목적으로 밀거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신환국 해인 1680년 3월 예송(禮訟)에서 승리 정권을 장악한 남인들은 영의정 허적(許積)의 집에서 연시연(延諡宴)을 열고 서인들을 불러 독주로 죽일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졌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정적을 제거할 목적으로 써 졌음이 확인된다. 예전에는 술잔을 '담(曇)'이라고 불렀다. '담'이란 짐새(鴆鳥)의 별칭이다. 술잔을 짐조로 비유한 것은 술이 이 짐승보다도 더 독한 까닭에 세심한 가르침을 준 것으로 설명된다. 옛 우리 선조들의 술잔은 대체로 컸다고 한다. 이렇게 큰 술잔을 대포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때 성균관에서는 벽송배(碧松杯),사헌부는 아란배(鵝卵杯),예문관은 장미배(薔薇杯)라는 큰 술잔으로 돌려 마시는 관습이 있었다. 또 승문원(承文院)에서는 임금의 하사 술을 마실 때'고령종(高靈鐘)'이라는 큰 잔으로 돌려가며 마셨다고 한다. '고령종'은 7~8되 들이 잔이었다고 한다. 한 되들이 술잔은 작(爵),두 되들이는 고(觚),석 되들이는 해(解),넉 되들이는 각(角),다섯 되들이는 산(散),열 되들이는 두(斗)라 했다. 술을 가득 부은 잔을 상(觴)이라고도 했다. 직에 따라 고유한 단일 술잔이 있었다. 한 번 마시면 3년간이나 취하여 있다는 천일주(中山酒 千日酒) 마시고 천리 길을 가야 취한다는 정향주(丁香酒) 등 이에 맞는 술잔은 오죽 많았을까?. 또한 옛 선조들은 때로 옥필통에 하나 가득 술을 따라 폭음했던 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태학생 시절에 대궐에 입시했다가 옥필통에 가득히 따른 독한 술을 하사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마지못해 마시면서 마음속으로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참으로 술의 맛은 입술을 적시는 정도에 있는 것이다."라 했다. 술을 따르고 마실 때의 유형을 자작(自酌), 대작(對酌), 수작(酬酌)으로 나누기도 한다. 호기스럽게 마시는 술은 분명 멋지다. 그러나 폭음은 짐조의 독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싶다. 목은 이색(李穡)은 1396년(태조 5)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 배안에서 죽었다. 그는 생전 ‘사암(思菴)을 생각하여 붓을 달려 써서 일애(一哀)를 부치는...’ 글이라 하여 시 한 수를 ’목은시고(제27권)‘에 남겼다. 짐독이 스스로 슬퍼하게 끔은 어려웠으리 / 難敎鴆毒自摧肝 비파 한 곡조엔 슬픈 가락이 몹시 급했고 / 琵琶一曲哀調急 또 시고 제2권 천보가(天寶歌). 계문(薊門)을 지나다가 느낌이 있어 지어 스스로 징험한 것을 기록하였다는 시에는, 삼풍 십건은 몸 단속하기에 달렸거니와 / 三風十愆在省躬 연안은 짐독이니 반드시 끝을 삼가야지 / 宴安鴆毒須愼終 짐독(鴆毒)은 ‘곧 간신의 흉계로 임금의 총명이 흐려진 것을 짐독에 비유한 것이다‘ 라는 주가 붙어 있다. 그러나<송자대전(宋子大全)>제71권 이택지(李擇之)에게 답함 병진년(1676) 4월 1일 기록 註1에 “목은이 여주(驪州)의 연탄(燕灘)에서 태조(太祖)의 사주(賜酒)를 먹고 주중(舟中)에서 의문의 죽음을 한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1412년(태종12) 역대 사서로 알려진<신지비사(神誌秘詞)>즉 신비집(神秘集)이 괴탄, 불경하다 하여 불태워 지고 이색의 문집 십오권도 날짜를 정하여 찾아 바치게 하였다는 사서의 내용으로 보아 일련의 사건들로 자신의 죽음이 짐주로 마감될 것을 예견하고 있었음인가. 두 시의 내용이 새삼 돌이켜 짐은 독주에 의해 생을 마감한 대학자의 끝이 참으로 안타까워서이다. 이 한 겨울 탐스럽게 내리는 눈을 보면서 어찌 술 한 잔 생각나지 않으랴. 허나 술은 이 처럼 양면성을 지녔으니 풍류에 젖어 안일에 빠져서는 아니 될 것이라 여겨 짐주의 기록을 살펴보았다 -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Greatcorea ☜   한눌 한문수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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