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욱 교수 ‘첩의 비극적 삶’ 연구
조선사회는 처첩제를 동반한 일부일처제 사회였다.
첩은 때로는 노비와 동격으로 취급되곤 했으며 첩실(妾室), 소실(小室), 측실(側室), 부실(副室)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첩은 거의 모든 신분에 걸쳐 존재했다.
첩을 들이는 데 대해 당시 사대부 남성들은‘후사를 잇는다’며 가계 계승을 이유로 들었지만 사실 첩은 남성적 욕망에
포섭된 존재였다.
부인의 눈치를 보느라 첩을 두지 않은 남성이 졸장부로 불린 경우도 있었다.
 | ▲ 사대부 남성들의 축첩은 그들이 지향하는 유교사회 이상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그림은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중 한 면인 ‘우물가의 대화’. 한 선비가 여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
박동욱(한국한문학) 한양대 교수는 최근‘문헌과 해석’64호에 발표한‘끊어진 줄 너를 통해 이으려 했네 - 첩’이라는 제목의 글에서“첩이란 이름으로 살았던 수많은 여인
들의 가려진 삶은 드러나지 않았다”며 “의무는 아내와 다를 바 없지만 권리는 철저하게 거세된 존재 살아서나 죽어서도 남편 곁에 자리할 수 없었던 슬픈 이름”이라고 썼다.
박 교수의 이 글은 첩들의 비극적 삶이 다양한 문헌에 기록되어 전하는 사실을 알려준다.
첩을 둘러싼 애처로운 사연은 헤아리기 어렵다.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전남 강진에서 12년째 유배생활을 하던 1812년을 전후해 홍임의 어미 표 씨와 살림을 차렸다.
1818년 해배돼 서울에 돌아올 때 홍임 모녀도 데려왔지만 다산의 본처가 마뜩지 않아했다.
모녀는 견디지 못하고 다산초당으로 돌아갔다.
그후에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남은 기록이 없다.
다산은 홍임 모녀를 위해 ‘남당사’ 열여섯 수를 썼다.
조정철(1751∼1831)의 첩이었던 제주 향리의 딸 홍윤애는 조정철을 살리려고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다.
조정철은 조선시대 최장기 유배수로 27세부터 55세까지 29년의 유배생활 중 27년을 제주에서 적거한 인물이다.
당시 제주 목사 김시구는 조정철을 모종의 사건에 얽어넣기 위해 그의 첩 홍윤애를 고문했다.
자백을 받으려고 장 70대나 치는 혹형을 가했다.
홍윤애는“공이 살고 죽는 것이 내가 죽는 것에 달려있다”며 목을 매어 죽음으로써 사랑하는 남자를 지켜냈다.
조정철은 유배가 풀린 뒤 제주목사, 형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맡았다.
첩을 두는 것은 호색의 방편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문인인 김려(1766∼1822)는 친구인 김기서(1766∼1822)가 55세에 첩을 들일 때 성적인 내용을 노골적으로 담은 익살스러운 시를 써줬다.
“그 나이에 젊은 여자를 얻어 네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며 친구를 짓궂게 놀리고 있다.
‘그대들 한 몸 되는 한바탕 놀이에서
칠분쯤의 능력도 감당키 어려우리
한창때 돌아보면 속에서 천불나니
그대 나이 40년 전에는 열다섯 살이었네’(김려, ‘김요장이 첩을 얻어 시를 써서 놀리고 조롱하다’).
이호민도 첩을 얻으려고 안달이 났다. “(이호민은)
몰래 양가의 딸을 첩으로 얻으려 했는데 그 집에서 폐백을 지나치게 요구했다.
그는 마련할 길이 없자 다만 한 장의 장지에‘홍문박사 이호민’이라고 자기 관직을 적어 함에 넣어 보냈다.
(중략)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모두 우스워 포복절도하였다.”(‘삼명시화’ 중에서, 소명출판)
못난 첩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현환(1713∼1772)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는 홀아비로 여러 해 살고 첩을 구하고자 했지만 60세가 가까워지자 적당한 여인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 그가 만난 여자는 박색이었다.
이현환은“내가 그녀를 보니 키는 크고 풍채가 좋으며 얼굴이 희고 말라서 남자 같은 표정은 있지만 여자다운 구석은 없었다”며“이 사람이 나에게 아름답지 못한 것은 다행
스러운 일이다”고 했다.
그는 “만약 아름다운 여자를 얻었다면 그 여자가 점점 사람을 반하게 하여 본성을 해치는 도끼와 낫이 되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라는 내용의 ‘애첩설’을 썼다.
못난 첩을 좋아하는 이유는 미색이 뛰어난 여자로 인해 얻게 되는 폐해 때문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한 글이다.
박 교수는 조선시대 남성의 성관념이“이중적이며 위선적”이라고 했다.
그는 “문집에는 여색을 경계한다는 글을 쓰지만 실제로 그 문제를 그리 엄격하게 경계했는지 알 수 없다.
아내가 버젓이 있어도 첩을 두었으며 유배지나 외직에서의 성관계는 일기에 밝힐 만큼 꺼릴 만한 것도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사대부 남성들은 시기하지 않는 정처(正妻)를 칭송함으로써 처와 첩의 은폐된 갈등을 덮으려고 했다.
황수연 씨는 최근‘조선후기 첩과 아내의 은폐된 갈등과 전략적 화해’라는 논문에서“남성들은 정치 혼인의 문제와 불만을 애정 혼인을 통해 충족시키고자 했다”며“첩 자신이
주체적 인격체로 인정되고 그들의 삶의 이력이 기록되어 전하는 경우는 매우 적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남성은 멋대로였고, 첩과 본처의 관계는 복잡미묘했고 첩의 처지는 늘 위태로웠다.
☞ Munhwa ☜  ■ 예진수 문화일보 문화부장 jinye@munhwa.com
草浮 印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