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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서인/빈으로 강등 후 복위되는 명성황후 (7부)

浮萍草 2013. 12. 16. 18:33
    왕후 --> 폐서인 --> 빈 -->왕후 -->명성황후
    성황후는 너무도 처참하고 치욕스럽게 일본인에게 시해 당했다. 고종은 일제의 강압에 굴복해 8월 22일(음) 왕후를 폐서인한다는 조서를 내렸다가 다음날 바로 빈으로 승격시키고 10월 10일(음) 왕후로 다시 복위시킨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1) 고종 32년 (1895 을미) 8월 22일(경인) 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강등시키다 조령을 내리기를 “짐이 보위에 오른 지 32년에 정사와 교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 중에 왕후 민씨가 자기의 가까운 무리들을 끌어들여 짐의 주위에 배치하고 짐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착취하고 짐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아 탐욕과 포악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사직이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졌다. 짐이 그 죄악이 극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벌하지 못한 것은 짐이 밝지 못하기 때문이기는 하나 역시 그 패거리를 꺼려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짐이 이것을 억누르기 위하여 지난해 12월에 종묘에 맹세하기를‘후빈(后嬪)과 종척(宗戚)이 나라 정사에 간섭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여 민씨가 뉘우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민씨는 오래된 악을 고치지 않고 그 패거리와 보잘것없는 무리를 몰래 끌어들여 짐의 동정을 살피고 국무대신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며 또한 짐의 나라의 군사를 해산한다고 짐의 명령을 위조하여 변란을 격발시켰다. 사변이 터지자 짐을 떠나고 그 몸을 피하여 임오년(1882)의 지나간 일을 답습하였으며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왕후의 작위와 덕에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죄악이 가득 차 선왕(先王)들의 종묘를 받들 수 없는 것이다. 짐이 할 수 없이 짐의 가문의 고사(故事)를 삼가 본받아 왕후 민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는다.”하였다. 위의 이 교지는 고종이 서슬 시퍼런 일제의 눈치를 보느라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 교지에 반발한 대신들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교지는 고종의 진심이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2년 후 왕후를 황후로 책봉하면서 지은 어제행록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2) 고종 32년(1895 을미) 8월 23일(신묘) 페서인 민씨에게 빈의 칭호를 특사하다 조령을 내리기를, “짐(朕)은 왕태자의 정성과 효성, 정리(情理)를 고려하여 폐서인(廢庶人) 민씨(閔氏)에게 빈(嬪)의 칭호를 특사(特賜)하노라.” 3) 고종 32년(1895 을미) 10월 10일(정축) 왕후 민씨의 위호를 회복시키고 조령을 격소하다 조령을 내리기를, “왕후(王后) 민씨(閔氏)의 위호(位號)를 회복시키고 이달 8월 22일 조령을 격소(繳銷)하라.”하였다. 이렇듯 명성황후는 시해당한 후 즉시 폐서인 되었다가 다음 날 빈으로 승차되었다가 2개월 후 왕후로 복위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고종은 왕후의 장례를 치르라는 교지를 내리지 않았다. 물론 왕후의 시신도 없었지만 말이다. 아마 당시 고종은 이미 대한제국의 성립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외적인 일제의 손에 죽어간 왕후를 장례라도 황후의 예로 치루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한 고종의 애틋한 마음은 아래의 책봉교서 및 어제행록에 잘 나타나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명성황후 국장에 대한 기록에도 많이 언급된다. 비록 나라가 힘이 없어 사랑하는 왕비까지 외적(일제)의 손에 죽어갔지만 그래도 고종은 대한제국의 성립을 통하여 당당히 외세와 대등함을 보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의식을 거행한 원구단. 지금은 없어져 조선호텔이 들어서 있다

    ㆍ대한제국의 황후로 책봉되는 명성황후
    나라의 국모가 외적(外賊)에게 시해되었지만 조선조정은 장례식도 치루지 못했다. 여하튼 고종은 이렇듯 잔악하게 왕비까지 죽이면서 침략하는 일본이 싫어 1896년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한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약 1년간 지내다 돌아와서는 드디어 1897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성립을 선포한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왕조는 그동안 명나라와 청나라의 속국이었으나 505년 만인 1897년에 드디어 자주국가임을 선포한 것이었다. 고종은 원구단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지내며 고하고는 국호를 대한(大韓) 년호를 광무(光武)라 하는 초대황제위에 즉위한 것이었다. 비록 스러져가는 힘없는 나라였지만 스스로 황제국임을 선포했다는 것은 ‘우리는 러시아/청나라/일본과 대등하다’는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는 아주 뜻깊은 것이었다. 이 때 명성황후는 황후로 책봉되고 드디어 국장이 치러진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의 대한제국의 성립과 명성황후 책봉 기록이다. 1) 1897년 정유 / 대한 광무(光武) 1년, 10월 12일(양력)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왕후 민씨를 황후로 책봉하다 “올해 9월 17일 백악산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에 올라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심순택이 나아가 열두 무늬 곤룡포와 면류관을 성상께 입혀드리고 씌워 드렸다. 이어 옥새를 올리니 상이 두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 해를 광무(光武) 원년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2) 1897 정유 / 대한 광무(光武) 1년, 11월 6일(양력) 빈전에 시호를 올린 조서를 반포하다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서를 내리기를“생각건대 황후 민씨(閔氏)는 영특하고 슬기로우며 착하고 온화하며 단정하고 엄숙한 자품으로 왕비에 간택되어 왕실의 빈(嬪)이 되었다. 아름다운 신정 왕후(神貞王后)를 계승하여 정성과 효도가 두터웠고 종묘(宗廟)를 공손히 받들어 엄숙하게 게을리 하는 일이 없었다. 궁중에서는 새벽부터 정사에 부지런해야 한다고 짐을 일깨웠고 태자를 낳아 자손들이 번성하게 될 복이 깃들게 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역사를 널리 알고 옛 규례에 익숙하여 나를 도와 궁중 안을 다스림으로써 짐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어려운 때를 거듭 만나서 온갖 근심을 다 맛보았으며 사변에 대처하여서는 경도(經道)와 권도(權道)에 합치되었고 황후로서의 위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위태 로운 상황을 편안한 데로 인도하여 태평의 기반을 다졌으니 어찌 거룩하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내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32년이 되는 을미년(1895) 8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런 궁내의 사변은 너무나 불측스러운 것이어서 만고에 없었던 일이다. 원수를 갚지 못한 채 상복을 벗은 지금, 나의 슬픔과 동궁의 애통함은 끝이 없다. 생각건대 오늘날 큰 왕업을 중흥하여 자주 국권을 찾은 것은 실로 황비(皇妃)가 도와준 성과이다. 이 해 음력 10월 11일에 명성 황후(明成皇后)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예의와 정리에 부합되므로 큰 은택을 널리 베푸노라.
    원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마치고 환궁하는 고종황제. 현판에 분명 대안문으로 되어 있다.

    3) 1897 정유 / 대한 광무 1년, 11월 22일(양력) 대행 황후의 지문의 어제 행록을 내리다 “짐이 일찍이 황후의 말이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일찍 용단을 내려 김홍집 유길준 조희연 정병하 네 역적을 제때에 처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외국 군사를 몰래 불러들이게 하였으며 훈련대를 남모르게 사주하여 을미년(1895) 만고천하에 없었던 큰 변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아! 짐(朕)이 황후를 저버렸다. 황후는 짐에게 간절한 일념으로 받들었다. 비록 문안하는 것과 같은 절차에 대해서도 오직 빠짐이 있을까봐 근심하여 성실하게 하였으나 짐은 황후의 몸을 궁금(宮禁)에서 잘 보존하지 못하였다. 아! 내가 황후를 저버린 것이다. 지금 슬퍼하고 추모한들 후회와 여한을 어찌 그칠 수 있겠는가? 황후는 경복궁의 곤녕합에서 8월 20일 무자일 묘시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45세이다. 이 날 새벽에 짐과 황후가 곤녕합 북쪽의 소헌에 있을 때 흉악한 역적들이 대궐 안에 난입하여 소란을 피우니 황후가 개연히 짐에게 권하기를‘원컨대 종묘사직의 중대함을 잊지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위급한 중에도 종묘사직을 돌보는 마음이 이와 같았는데 조금 후에 황후를 다시 볼 수 없었으니 오직 이 한 마디 말을 남기고 드디어 천고에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다. 아! 슬프다” “여러 신하들이 옛날 시호법을 상고하여 온 나라에 빛이 미쳤다 해서 ‘명(明)’이라 하고 예악이 밝게 갖추어졌다고 하여'성(成)’이라고 하였다. 올리는 시호는 ‘명성(明成)’이라 하였고, 능호(陵號)는 ‘홍릉(洪陵)’이라고 하였으며, 전호(殿號)는 ‘경효(景孝)’라고 하였다. 대체 황후가 훌륭한 공덕으로 짐의 곁에서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내가 정사를 잘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짐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나 황후는 볼 수가 없으니 아! 슬프다. 아! 황후가 대궐에 있으면서 정사를 도와준 것이 30년인데 실로 순리에 처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길을 밟지 못한 관계로 도리어 간고하고 험난한 일만 하더니 제 명을 살지 못하고 중년 나이에 죽었다. 이것이 어찌 하늘 탓이겠는가? 보좌가 서로 이루어지고 안에서 다스리는 것이 어질고 밝아서 만대(萬代)에 훈계로 삼을 만한 것이 진실로 한두 가지가 아니었건만 곤란한 일이 많고 지극히 비통한 와중이라 대체로 기억할 수 없다. 아! 황후로 하여금 오래 살게 하였더라면 숨은 공로와 부드러운 덕화가 나라를 빛나게 하여 책에 기록할 것이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 짐이 하늘의 이치를 의심하는 것이고 유감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아! 슬프다.”하였다.
    Greatcorea     高句麗역사저널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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