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힐링투어

1 겨울 들머리의 충남 서산 천수만

浮萍草 2013. 12. 1. 06:00
    수만 리 날아 온 가창오리, 그 삶의 여정에 눈물이…
    해 질 녘 가창오리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 올라 군무를 펼치고 있다. 2011년 11월 초 천수만. 조용철 기자
    느 날 문득 가슴에 찬바람 한 줄기 불어오는 계절이 있다. 내내 푸르렀던 나무가 헐벗어 옹색한 꼴을 드러내고 무자비한 칼바람이 몇 줌 안 되는 온기마저 앗아가는 계절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자리를 떠버려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계절이 있다. 세상살이가 헛헛해지는 이 계절, 겨울은 지펴진다. 세상 모두가 나를 떠나는 겨울 들머리.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철새다. 그들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짐작도 안 되는 저 북극의 들판에서 날아올라 제 몸에 새긴 일 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 수만 리 하늘을 가로지른 뒤 지난겨울에 내려 앉았던 우리나라 서해안의 어느 논밭에 정확히 내려앉는다. 그 눈물겨운 수고를, 세상 무엇도 막지 못하는 그 도저한 본능을 지켜보기 위해 나는 겨울 초입이면 새를 보러 간다. 이른 새벽 충남 서산에 있는 천수만으로 달려간다.
    ㆍ끼룩끼룩 … 땅인가 했더니 하늘이었다
    사위는 아직 어둡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되레 왜소하다. 11월 초순 천수만의 오전 6시는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시동을 끄고 차 밖으로 나온다. 아침 공기가 맵다. 허둥지둥 매무새를 단속하려는 찰나, 청천벽력이 귓가를 때린다.
    ㆍ끼룩끼룩, 꾸욱우꾸우욱, 꽥꽥꽥, 까악까악….
    가까이서 들리나 싶더니 멀리서 터진다. 땅인가 했는데 하늘에서 울린다. 사방이 흔들리고 천지가 들썩인다. 몇 마리가 울어대는 것인지 가늠도 안 된다. 1만 마리? 10만 마리? 100만 마리? 부지런히 두리번거리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눈앞은 여태 암흑이다. 새 수십만 마리가 토해내는 굉음의 회오리 안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인간은 한없이 작아진다. 세상은 깨어 있다. 눈은 알지 못하지만 귀는 안다. 추운 것도 잊고 한동안 새 소리를 듣고 서 있다. 새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난 다음에야 새가 지척에 있다는 걸 아는 것과 같은 이치다. 꿈틀대는 세상을 오로지 청각으로 인지하는 경험은 기이하다. 해가 뜨기도 전에 천수만에 드는 까닭이다.
    ㆍ해 뜰 녘과 해 질 녁, 두 번만 뜨는 새들
    해가 떠오른다. 천수만 강물이 비늘처럼 반짝인다. 이 시간부터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진다. 논밭에 박혀 있던 수많은 점과 점이 꼼지락대는가 싶더니 슬그머니 선을 이루고 둥실 떠오른다. 하나 둘 이어진 점과 점은 처음에는 선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한 무더기로 뭉쳐 거대한 점을 형성한다. 벌떼 같기도 하고, 먹구름 같기도 한 검은 무더기가 허공을 날기 시작한다. 점이었다가 선이었다가 다시 점이 된 이 날것 무리는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낮은 하늘에서 용틀임을 한다. 그것들이 그리는 곡선은 강으로 미끄러지는 뱀처럼 부드럽고 그것들이 펼치는 춤사위는 신 내린 무당의 팔짓 모양 현란하다. 창공에서 한참을 비틀대던 덩어리는 물로 건너오더니 마침내 새가 되어 내려앉는다. 가창오리의 군무가 막을 내린다. 가창오리는 하루에 딱 두 차례 군무를 펼친다. 해 뜰 녘.해 질 녘 밤새 뭍에서 배를 채운 뒤 아침에 물로 잠을 자러 갈 때와 물에서 잠을 잔 뒤 저녁에 뭍으로 먹이를 구하러 갈 때 가창오리는 무리를 이루어 춤을 춘다. 가창오리가 군무를 추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대신 짐작 가는 바는 있다. 가창오리는 오리 중에서도 가장 작은 축에 속한다. 다 큰놈이라 해봤자 몸통이 어른 주먹만 하다. 높이 날지도, 빨리 날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떼로 뭉쳐 다녀야 했다. 이렇게라도 덩치를 불려야 천적으로부터 겨우 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약하고 못난 것일수록 몰려다니는 법이다. 맨 처음 가창오리의 군무를 지켜봤던 2003년 초겨울 아침 나는 정말 많이 울었다. 소리 내지는 않았지만, 눈물은 쉬지 않고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그네들의 춤사위가 아름다워서만은 아니었다. 아침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 낀 우리네 삶을 아름답다고 적을 수만은 없는 이유에서였다.
    ㆍ바이칼~한반도 … 기나긴 생존 여행
    천연기념물 제199호인 황새.8·15 광복 전까지 한반도
    에서 텃새로 번식하던 황새는 6·25 전쟁과 밀렵 때문에
    사라졌다.겨울철이면 천수만에서 5~6마리가 월동하고
    시베리아로 돌아간다.
    가창오리의 학명은 Baikal Teal, 다시 말해 ‘바이칼 호수의 오리’다. 시베리아 벌판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호수 바이칼이 가창오리의 원적지다. 가창오리는 광활한 시베리아 벌판에 흩어져 산다. 봄부터 가을까지 시베리아에서 알 낳고 살던 가창오리는 겨울이 오면 남하를 시작한다. 시베리아를 떠난 가창오리가 만주를 지나고 황해를 건너 상륙하는 기착지가 천수만이다. 11월 초순이면 전체 개체 수의 90%에 육박하는 가창오리 30여만 마리가 천수만으로 모여든다. 이 장엄한 순간을 찍기 위해 전 세계에서 사진작가들이 모여든다. 그러나 올해에는 아직 소식이 없다. 지금 백령도 앞바다라도 지나고 있는 건지 11월이 됐는데도 가창오리가 내려왔다는 소식은 여태 들리지 않는다. 겨울의 또 다른 진객인 흑두루미가 벌써 150여 마리나 왔다는데 말이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그리고 어디에선가 길게 누운 해를 등지고 가창오리들이 흐느적 흐느적 춤출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창오리가 천수만에서 지내는 시간은 길어야 한 달이다. 겨울이 더 깊어지면 일부는 군산을 거쳐 해남으로 또 다른 일부는 창원으로 내려가 겨울을 난다. 천수만에서 못 보면 금강 물길이 서해에 몸을 푸는 군산에 가면 되고 군산에서도 못 보면 해남 고천암호에 먼저 가서 기다리면 된다.
    숫자는 다를 수 있어도 천수만이나 금강이나 해남이나 모두 같은 무리다. 천수만은 원래 바다였다.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이 방조제를 쌓아 바다를 막은 뒤 엄청난 흙을 쏟아 부어 간척지로 개간했다. 간척지는 농지로 활용되었고 논밭 사이의 바다는 시간이 흘러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강이 되었다. 어느 겨울부터인가 그 강에 새가 내려앉더니 금세 수십만 마리로 불어났다. 지금은 추수가 끝난 뒤 낙곡을 남겨놓는다. 천수만이 더 이상 사람만의 땅이 아니어서다. 천수만이 바다였던 시절에도 새는 있었다. 지금과 달리 도요새 같은 여름 철새나 가마우지 같은 바다 새가 살았다. 간척사업이 시작되고서 도요새와 가마우지는 천수만에서 쫓겨났다. 세월이 흘러 뭍이 된 천수만에는 가창오리를 비롯해 기러기·황새·흑두루미·노랑부리저어새 등 겨울 철새가 날아든다. 사람이 새를 쫓아내고 다시 새를 불러온다. 그래, 세상 모든 건 결국 사람의 일이다.
    Sunday.Joins Vol 347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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