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리 날아 온 가창오리, 그 삶의 여정에 눈물이…
 | ▲ 해 질 녘 가창오리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 올라 군무를 펼치고 있다. 2011년 11월 초 천수만. 조용철 기자 |
어느 날 문득 가슴에 찬바람 한 줄기 불어오는 계절이 있다.
내내 푸르렀던 나무가 헐벗어 옹색한 꼴을 드러내고 무자비한 칼바람이 몇 줌 안 되는 온기마저 앗아가는 계절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자리를 떠버려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계절이 있다.
세상살이가 헛헛해지는 이 계절, 겨울은 지펴진다.
세상 모두가 나를 떠나는 겨울 들머리.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철새다.
그들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짐작도 안 되는 저 북극의 들판에서 날아올라 제 몸에 새긴 일 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 수만 리 하늘을 가로지른 뒤 지난겨울에 내려
앉았던 우리나라 서해안의 어느 논밭에 정확히 내려앉는다.
그 눈물겨운 수고를, 세상 무엇도 막지 못하는 그 도저한 본능을 지켜보기 위해 나는 겨울 초입이면 새를 보러 간다.
이른 새벽 충남 서산에 있는 천수만으로 달려간다.
ㆍ끼룩끼룩 … 땅인가 했더니 하늘이었다
사위는 아직 어둡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되레 왜소하다.
11월 초순 천수만의 오전 6시는 짙은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시동을 끄고 차 밖으로 나온다.
아침 공기가 맵다.
허둥지둥 매무새를 단속하려는 찰나, 청천벽력이 귓가를 때린다.
ㆍ끼룩끼룩, 꾸욱우꾸우욱, 꽥꽥꽥, 까악까악….
가까이서 들리나 싶더니 멀리서 터진다.
땅인가 했는데 하늘에서 울린다.
사방이 흔들리고 천지가 들썩인다.
몇 마리가 울어대는 것인지 가늠도 안 된다.
1만 마리? 10만 마리? 100만 마리?
부지런히 두리번거리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눈앞은 여태 암흑이다.
새 수십만 마리가 토해내는 굉음의 회오리 안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인간은 한없이 작아진다.
세상은 깨어 있다.
눈은 알지 못하지만 귀는 안다.
추운 것도 잊고 한동안 새 소리를 듣고 서 있다.
새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난 다음에야 새가 지척에 있다는 걸 아는 것과 같은 이치다.
꿈틀대는 세상을 오로지 청각으로 인지하는 경험은 기이하다.
해가 뜨기도 전에 천수만에 드는 까닭이다.
ㆍ해 뜰 녘과 해 질 녁, 두 번만 뜨는 새들
해가 떠오른다. 천수만 강물이 비늘처럼 반짝인다.
이 시간부터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진다.
논밭에 박혀 있던 수많은 점과 점이 꼼지락대는가 싶더니 슬그머니 선을 이루고 둥실 떠오른다.
하나 둘 이어진 점과 점은 처음에는 선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한 무더기로 뭉쳐 거대한 점을 형성한다.
벌떼 같기도 하고, 먹구름 같기도 한 검은 무더기가 허공을 날기 시작한다.
점이었다가 선이었다가 다시 점이 된 이 날것 무리는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낮은 하늘에서 용틀임을 한다.
그것들이 그리는 곡선은 강으로 미끄러지는 뱀처럼 부드럽고 그것들이 펼치는 춤사위는 신 내린 무당의 팔짓 모양
현란하다.
창공에서 한참을 비틀대던 덩어리는 물로 건너오더니 마침내 새가 되어 내려앉는다. 가창오리의 군무가 막을 내린다.
가창오리는 하루에 딱 두 차례 군무를 펼친다.
해 뜰 녘.해 질 녘 밤새 뭍에서 배를 채운 뒤 아침에 물로 잠을 자러 갈 때와 물에서 잠을 잔 뒤 저녁에 뭍으로 먹이를
구하러 갈 때 가창오리는 무리를 이루어 춤을 춘다.
가창오리가 군무를 추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대신 짐작 가는 바는 있다.
가창오리는 오리 중에서도 가장 작은 축에 속한다.
다 큰놈이라 해봤자 몸통이 어른 주먹만 하다.
높이 날지도, 빨리 날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떼로 뭉쳐 다녀야 했다.
이렇게라도 덩치를 불려야 천적으로부터 겨우 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약하고 못난 것일수록 몰려다니는 법이다.
맨 처음 가창오리의 군무를 지켜봤던 2003년 초겨울 아침 나는 정말 많이 울었다.
소리 내지는 않았지만, 눈물은 쉬지 않고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그네들의 춤사위가 아름다워서만은 아니었다.
아침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 낀 우리네 삶을 아름답다고 적을 수만은 없는 이유에서였다.
ㆍ바이칼~한반도 … 기나긴 생존 여행
 | ▲ 천연기념물 제199호인 황새.8·15 광복 전까지 한반도 에서 텃새로 번식하던 황새는 6·25 전쟁과 밀렵 때문에 사라졌다.겨울철이면 천수만에서 5~6마리가 월동하고 시베리아로 돌아간다. |
가창오리의 학명은 Baikal Teal, 다시 말해 ‘바이칼 호수의 오리’다.
시베리아 벌판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호수 바이칼이 가창오리의 원적지다.
가창오리는 광활한 시베리아 벌판에 흩어져 산다.
봄부터 가을까지 시베리아에서 알 낳고 살던 가창오리는 겨울이 오면 남하를 시작한다.
시베리아를 떠난 가창오리가 만주를 지나고 황해를 건너 상륙하는 기착지가 천수만이다.
11월 초순이면 전체 개체 수의 90%에 육박하는 가창오리 30여만 마리가 천수만으로 모여든다.
이 장엄한 순간을 찍기 위해 전 세계에서 사진작가들이 모여든다.
그러나 올해에는 아직 소식이 없다.
지금 백령도 앞바다라도 지나고 있는 건지 11월이 됐는데도 가창오리가 내려왔다는 소식은 여태 들리지
않는다.
겨울의 또 다른 진객인 흑두루미가 벌써 150여 마리나 왔다는데 말이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그리고 어디에선가 길게 누운 해를 등지고 가창오리들이 흐느적 흐느적 춤출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창오리가 천수만에서 지내는 시간은 길어야 한 달이다.
겨울이 더 깊어지면 일부는 군산을 거쳐 해남으로 또 다른 일부는 창원으로 내려가 겨울을 난다.
천수만에서 못 보면 금강 물길이 서해에 몸을 푸는 군산에 가면 되고 군산에서도 못 보면 해남 고천암호에
먼저 가서 기다리면 된다.
숫자는 다를 수 있어도 천수만이나 금강이나 해남이나 모두 같은 무리다.
천수만은 원래 바다였다.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이 방조제를 쌓아 바다를 막은 뒤 엄청난 흙을 쏟아 부어 간척지로 개간했다.
간척지는 농지로 활용되었고 논밭 사이의 바다는 시간이 흘러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강이 되었다.
어느 겨울부터인가 그 강에 새가 내려앉더니 금세 수십만 마리로 불어났다.
지금은 추수가 끝난 뒤 낙곡을 남겨놓는다.
천수만이 더 이상 사람만의 땅이 아니어서다.
천수만이 바다였던 시절에도 새는 있었다.
지금과 달리 도요새 같은 여름 철새나 가마우지 같은 바다 새가 살았다.
간척사업이 시작되고서 도요새와 가마우지는 천수만에서 쫓겨났다.
세월이 흘러 뭍이 된 천수만에는 가창오리를 비롯해 기러기·황새·흑두루미·노랑부리저어새 등 겨울 철새가 날아든다.
사람이 새를 쫓아내고 다시 새를 불러온다.
그래, 세상 모든 건 결국 사람의 일이다.
☞ Sunday.Joins Vol 347 ☜ ■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草浮 印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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