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힐링투어

5 화천 비수구미 마을

浮萍草 2014. 1. 5. 10:30
    고향처럼 마냥 편안한, 온몸이 해제되는 두메산골
    산중 마을 비수구미에도 겨울이 내렸다. 산은 물론이고 길도 눈으로 덮여 하얗다. 마을 앞에는 파로호를 지나 북한강을 이루는 계곡물도 꽝꽝 얼었다.지난해 1월 6일
    촬영한 사진. 신동연 선임기자

    비수구미 마을 화천은 가깝지만 비수구미는 멀다.춘천고속도로가 뚫려 서울시청에서 화천
    읍내까지 2시간이면 족하다.문제는 화천 읍내
    에서 비수구미까지 가는 길이다.화천 읍내에서
    460번 지방도로를 타고 산길 30㎞를 달려야 해산
    터널이 나온다.겨울이면 길도 험하다.스노체인을
    챙겨야 한다.해산터널을 나와 해산령쉼터에
    차를 대고 6㎞ 계곡길을 걸어서 내려간다.
    쉬엄쉬엄 두 시간 거리.장윤일씨네 시골 밥상은
    1만원,민박은 3만원이다.비수구미 앞 파로호가
    얼어붙으면 4륜 구동 오토바이에 매단 썰매를
    타고 파로호를 달리며 놀 수 있다.최대 6명 2만
    원.빙어낚시는 공짜다.채비도 빌려준다.
    033-442-0145. 최근에 막내 만동씨가 경기도
    용인에 식당을 냈다.비수구미에서 받았던 밥상
    으로 산채정식 하나만 판다. 1인 1만5000원.
    031-261-0146.
    는 1971년생이다. 우리 나이로 마흔네 살이 됐다. 예전에는 중년 대우를 받던 나이지만 요즘은 종종 철없는 축에 속하기도 한다. 어정쩡한 세대인 셈이다. 내가 속한 1970년대 산(産)은 이른바 ‘386 이후 세대’ 였다. 캠퍼스에서 최루탄 연기가 잦아드는 때에 우리의 20대가 시작됐다. 말하자면 정치의 시대가 거(去)하고 문화의 시대가 래(來)하던 시절이었다. 또래 소설가 김연수(70년생)는 그 시절을“대뇌의 언어로 말하던 사람들이 모두 성기(性器)의 언어로 떠들어 대기 시작 했다”고 기억한다. 마광수라는 이름이 문화 아이콘이던 시대였다. 우리 세대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고향이다. 정확히 말해서 고향의 부재(不在)다. 우리 바로 윗세대만 해도 고향이라고 하면 하나같이 실개천이 흐르고 복사꽃이 피고 소가 울었다. 봄에는 들에서 쑥을 뜯고 여름에는 개울에서 멱을 감고 가을에는 논에서 메뚜기를 잡고 겨울에는 얼음을 지치고 놀았다. 그러나 우리 세대 대부분의 고향은 잿빛에 가깝다. 우리의 아버지가 고향을 떠나 도시에 정착해 우리를 낳고 길렀으니 우리의 고향은 도시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시골은 우리의 고향이 아니라 아버지의 고향이었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는 집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고향의 기억은 기껏해야 도시 변두리 비좁은 골목에서 딱지 치던 일 정도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함께 딱지를 쳤던 친구 이름의 대부분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기억 속의 골목은 같은 골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낯선 도시에 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우리의 아버지는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 또 다른 또래 소설가 편혜영(72년생)의 말마따나 우리에게 고향은 “찾아가야 반길 이 없고 찾아가고 싶은 마음도 내키지 않는 무덤덤하고 심드렁한 미지의 장소”일 따름이다. 우리 세대는 아마도 고향을 상실한 아니 애초부터 고향이 부재한 첫 세대일 터이다. 우리 세대에게 고향의 기억은 가난하다. 하나 고향이라는 존재가 주는 위안은 안다. 한갓진 시골 마을에 들어갔을 때 딱딱히 굳었던 내 얼굴이 시나브로 풀리는 걸 느끼고서 깨달았다. 고향은 굳이 내 고향이 아니어도 마냥 편안한 존재였다. 강원도 화천의 두메 비수구미를 맨 처음 들어갔을 때 느낌이 바로 그러했다. 이 외진 마을에 머무는 동안 나는 온몸이 해제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늦은 밤 집에 들어오면 긴장이 풀려 온몸이 녹진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1 비수구미 가는 길은 눈 내린 겨울이 되면 여느
    눈썰매장 부럽지 않은 코스가 만들어진다. 2 파로호가
    얼면 4륜 구동 오토바이에 썰매를 매달고 파로호를
    달린다. 비수구미만의 겨울 레포츠다. 3 비수구미 주민 김영순
    씨가 된장 독을 열어 보이고 있다. 이 집
    밥맛이 기가 막힌다.
    비수구미는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오지마을이다. 사실 오지(奧地)는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를 기준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오지다. 그러나 비수구미는 화천 읍내에서도 오지로 통한다. 마을이 들어앉은 자리 때문이다. 비수구미는 아직도 자동차로 들어갈 수 없는 정말로 전국에 몇 안 남은 오지마을이다. 비수구미 마을은 파로호 북쪽, 평화의댐 바로 아랫녘 물가에 들어앉아 있다. 마을 뒤로는 해발 1140m의 해산령이, 앞으로는 파로호 물이 가로막고 있다. 하여 마을에 들어가려면 해산령에서 마을까지 시오리(理) 남짓 계곡을 따라서 걸어 내려가거나 평화의댐이나 파로호 선착장에서 배를 타야 한다. 보통 비수구미에 들어갈 때는 걸어서 들어가고 나올 때는 동네 주민이 모는 배를 타고 나온다. 비수구미처럼 출입 방법이 낭만적인 마을도 없다. 비수구미 가는 길은 조용하다. 비수구미에 사는 네 가구에만 허락된 길이어서 인적이 드물다. 다람쥐마저 아직 사람이 무서운 줄 몰라 사람을 봐도 길을 비키지 않는다. 길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계곡 물소리와 숲 속 새소리가 전부다. 굳이 소리가 더 있다면 당신과 당신 벗의 걸음 소리다. 비수구미 가는 길은 예쁘다. 봄과 여름에는 길섶에 야생화가 지천이고 가을에는 계곡에 고운 단풍이 드리운다. 걷기에도 편하다. 널찍할뿐더러 평탄하다. 마을까지 내내 내리막이 이어져 2시간을 걸어도 힘들지 않다. 비수구미 가는 길은 이제 비수구미보다 더 유명하다. 비수구미 가는 길은 겨울이 제일 재미있다. 화천은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이어서 아침 일찍 서두르면 순수의 눈밭을 만끽할 수 있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적막한 겨울 산을 울린다. 겨울날 비수구미에 들어가려면 준비물이 필요하다. 비료 포대다. 제법 경사가 가파른 길에서 비료 포대를 깔고 앉으면 비수구미 가는 길은 여느 리조트 부럽지 않은 눈썰매장으로 변신한다. 그렇게 걷고 뒹굴고 웃다 보면 파로호를 껴안고 앉은 비수구미 마을이 보인다. 비수구미에는 모두 네 가구가 살고 있다. 이 중에서 장윤일(69)·김영순(53)씨네 집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 마을 어귀에 놓인 다리를 건너 첫 집이 장씨 부부 집이다. 장씨는 60년대 초반 비수구미로 들어왔다. 앞은 물이 가로막고 뒤는 산이 에워싼 이 궁벽한 터에서 그는 화전을 일구거나 낚시꾼을 받으며 살았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비수구미는 낚시꾼이나 찾던 곳이었다. 파로호 상류 지역은 예부터 낚시꾼 사이에서 씨알 굵은 붕어가 잘 나오는 포인트로 통했다. 이 막다른 산에서 장씨는 김씨를 만나 결혼을 했고, 3남1녀를 두었다. 장씨 부부는 지난해 TV 프로그램 ‘인간극장’에 출연하고서 유명인사가 됐다. 단풍이 절정이었던 지난 가을 주말에는 한꺼번에 100명이 넘게 들이닥쳐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맏아들 복동(47)씨 내외와 막내아들 만동(39)씨 그리고 손주 녀석들까지 불러 모아 겨우 밥을 먹여 보냈다. 부부가 내놓는 밥상은 소박하다. 산나물무침·된장찌개 따위가 전부다. 그러나 너나 할 것 없이 밥을 더 찾는다. 나도 꼭 두 그릇을 깨끗이 비운다. 곤드레·곰취·취나물·얼레지·엄나무순·참나물·당귀·뽕잎 등등 장씨가 온 산을 뒤져 뜯어온 산나물이 맛깔스럽긴 하다. 하나 된장찌개는 물론이고 밥도 맛있다. 늘 표정 밝은 김씨가 들려준 일화를 전한다. “언젠가 손님들이 밥을 남기고 나가더라고 이유를 물었더니 한 손님이‘이 산 속에서 멸치조림이 뭐냐?’며 화를 내는 거야. ‘멸치가 아니고 빙어예요. 요 앞에서 잡은 거요’라고 했더니 다시 들어와서 다 먹더라고. 호호호.” 혼자 욕심으로 말한다.
    비수구미가 지금 이대로 모습이면 좋겠다. 아무 때나 가도 예의 그 넉넉한 모습이면 좋겠다. 아무 때나 가서 온갖 나물에 된장·고추장 넣고 썩썩 비빈 밥 한 그릇 뚝딱 먹고 나오면 좋겠다. 비수구미 덕분에 가슴에 고향 하나 품고 산다.
    Sunday Joins Vol 356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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