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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본인(?)이 쓴 백과사전의 명성황후 시해 설명 (2부)

浮萍草 2013. 12. 6. 22:45
    우리의 관점이 아닌 일본인의 관점으로 기술한 명성황후 시해 설명
    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인터넷 백과사전의 상세한 설명을 보기로 하겠다. 
    아래 백과사전의 내용은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잡종(?)인 사학자가 쓴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참고로 적색으로 표시한 용어는 우리에게 맞게 괄호와 같이 수정되어야 옳을 것이며, 청색 문구는 필자의 해설이다.) 
    원래 고종이란 묘호도 승하 후 추증된 것이며 명성황후도 승하 후 2년이 지나 대한제국의 성립 후 추증된 것이므로 당연히 명성황후로 써야 한다. 
    1895년은 대한제국 성립(1897년) 2년 전이므로 명성왕후가 옳을 수도 있으나 명성왕후로 추증된 것이 아니므로 명성황후가 옳다고 본다.
    명성황후는 대한제국이 세워진 후 명성황후로 추증된
    후 국장이 거행진다.
    ㆍ(백과사전의 을미사변 설명)
    1895년 3국 간섭 이후 한국(조선)정부 내에서 이완용·민영환·윤치호 등 소위 '정동파'들은 민비(왕후)세력을 앞세워 친러·친미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일제는 세력만회를 위해 7월 13일 이노우에 대신에 군국주의 군벌인 미우라를 주한공사로 임명했다. (우선 한국이란 용어는 옳지 않다. 1895년 당시는 대한제국 성립 전이므로 조선이란 국호를 써야 한다. 그리고 ‘민비’라는 역사용어는 일제가 자기네 마음대로 부르던 명칭으로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그리고 을미사변은 을미참변 또는 을미치욕으로 씀이 옳을 것이다) 한국(조선)정부는 10월 민영환을 주미전권공사로 임명하는 한편 일본군 장교가 훈련시키던 훈련대를 해산 하고 미군장교 다이가 훈련시킨 시위대를 중용하기로 결정했다. 또 친일계인 어윤중·김가진을 면직시키는 대신 친러계 이범진을 등용하는 등 배일정책을 더욱 추진했다. 일제는 한국(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민비(왕후)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고 방책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미우라 등은 대원군이 궁중을 감독하되 내각에 간섭하지 않으며 김홍집·어윤중·김윤식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이재면과 이준용을 중용할 것 등을 조건으로 대원군 세력의 협조를 얻었다.
    이와는 별도로 미우라는 일본인 아다치가 경영하는 한성신보사의 수십 명의 일인 낭인(일제조폭) 일본 수비대와 거류지 담당 경찰관들을 하수인으로 고용하고 훈련대 간부인 우범선·이두황·이진호 등 친일파들도 포섭했다. (우범선은 시해 후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대한제국이 보낸 자객에게 처형당한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육종학자 우장춘박사의 아비로 우박사는 아비의 과오를 씻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와 조국의 농업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명성황후 시해의 행동대원 우범선 가족사진.우범선
    의 처는 일본인이고,가운데 어린아이가 우장춘박사이다.
    훈련대의 해산으로 다급해진 미우라 등은 민비제거(왕후시해) 예정일이었던 8월 22일을 앞당겨 8월 20일 새벽에 행동을 개시했다. 일인(일본조폭)들은 우선 대원군에게 가서 고유문(告諭文)을 결재 받고 서대문(돈의문)에서 훈련대 병사 들과 합류하여 광화문에 도착했다. 여기서 폭도들은 훈련대연대장 홍계훈을 죽이고 왕궁을 호위하던 다이 지휘하의 시위대들과 교전하여 패배 시켰다. (8월 20일은 음력으로 양력으로는 10월 8일이다. ‘동대문’‘남대문’ 등 용어는 일제가 만든 용어이므로 당시 조선에서는 서대문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다. 조폭 또는 깡패로 표현되어할 부분을 일인이란 젊잖은 용어로 표현했다. 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폭도들은 고종과 민비(왕후)의 침소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하여 고종에게 미리 준비한 왕비의 폐출조서 (廢黜詔書)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했다. 그러나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왕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등 극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 궁내부대신 이경직을 살해한 뒤 옥호루(玉壺樓)에서 민비(왕후)를 무참하게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화장하는 야만적 행동을 저질렀다.
    명성황후 시해장면 상상도. (명성황후는 이렇게 젊잖게 시해되지 않았다. © 편집부

    고종과 왕세자에게 행한 무례한 행동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과연 단순한 ‘학살’과 단순한 ‘화장’이었을까? 그리고 학살이란 용어가 적절한 표현일까? 참고로 학살이란 용어의 법적 정의를 보면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한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구체적으로 집단의 일원을 살해하거나 심각한 육체적ㆍ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고의적으로 육체적 파멸을 의도한 생활 조건을 강제하는 것 집단 내 출생을 막는 것, 집단의 아동을 다른 집단으로 강제 이주하는 것")
    명성황후를 참혹하고 치욕적으로 시해한 후 석유를 뿌려 소각하는 장면의 상상도. © 편집부

    이후 대원군을 고종과 대면시켜 미리 준비한 조칙 3개안을 재가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왕비학살을 일본인(일본조폭)들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위장처리방안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이번 사건은 훈련대와 대원군이 결탁하여 행한 쿠데타이며 일본군은 고종의 요청에 의해 출동하여 훈련대와 시위대의 싸움을 진압했고 민비(왕후)시해는 아는 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세운 다음, 8월 22일 민비(왕후)의 폐위조칙을 위장 발표했다. 그러나 고종 러시아인 사바틴, 미국인 다이 등 목격자가 많아 사건의 은폐에 실패했다.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외교관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이에 미국공사대리 앨런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각각 군병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하는 한편 각국 공사의 회합 후 일본의 관여사실과 폐위 조치 불인정 등을 발표했다. 또 이들은 일본이 뒷받침하고 있는 김홍집 내각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난처해진 일제는 사건관련자를 형식적으로 처벌하기로 결정하고 관련 일인(일본 조폭)들을 체포하여 히로시마[廣島]로 압송하는 한편 미우라 대신 고무라를 주한공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철수와 대한불간섭 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이노우에를 왕실위문사로 파견하여 사건에 관련된 훈련대를 해산하고, 민비(왕후)를 복위시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10월 12일 정동파들이 러시아와 미국인의 협조를 얻어 고종을 궁 밖으로 빼돌리려 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 사건에 외국인들이 개입 되었다는 것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자신들의 만행을 희석하려고 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주동자들을 재판하고 있는 히로시마 법정 © 편집부

    그리하여 다음해 1월 만행을 자행한 미우라 이하 폭도 48명을 ‘증거불충분’이란 명목으로 석방했다. (이 재판에 대해 지금이라도 대한민국 정부는 당연히 재심을 청구해야 옳을 것이다. 그 만행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 시해를 자행한 조폭들은 재판 후 일본정부와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영웅으로 추대된다.) 한편 12월 1일 고종은 정식으로 민비(왕후)가 승하했음을 발표했으나 일본인(일본조폭)의 관련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부는 사건을 은폐하여 이주회·윤석우를 범인으로 몰아 처형하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한 후 이준용이 일본으로 망명하는 데서 사건을 매듭지으려 했다. 또 내외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개혁정책을 추진 단발령과 건양(建陽)이란 연호의 사용 친위대·진위대 등으로 군제 개편 소학교령 공포 태양력 사용 등을 시행했다. 그러나 왕비학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극도에 달한 상황에서 친일내각에 의해 추진된 개혁은 전국적인 반일의병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의병은 친일내각에 의한 개혁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바로 처참하게 살해당한 명성왕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역사교과서에는 단발령 등에 반발해 의병이 일어난 것으로 적혀 있다.) 이상 백과사전 명성황후의 시신은 석유를 뿌려 완전히 소각되어 뼈조차 없었다. 장례는 사후 즉시 치뤄지지 못하고 2년 2개월이 지나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의 명에 의해 명성황후로 추증된 후 치뤄지게 된다. 그 장엄한 장례식에 대한 준비과정이나 장례식 광경을 기록한 책이 바로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본왕실로 기증 되어 현재 일본 궁내청에서 가지고 있다가 얼마 전에 국내로 환수되었다.
    1897년 치뤄진 명성황후의 국장 모습을 상세히 기록한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편집부

    Greatcorea     高句麗역사저널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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