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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약령시의 유래

浮萍草 2013. 12. 6. 06:00
    조선시대 배고픈 백성 허기 달래주던 곳… 1960년대 이후 한약 유통 메카로
    
    전국 한약재의 70%가 거래되는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서울약령시 입구(왼쪽 사진). 1960년대 경기 동북부와 강원에서 올라온 농산물을 모아 팔기 위해 자생적
    으로 형성되기 시작해(오른쪽 사진) 1970, 80년대 종로 쪽에 있던 한약재상들이 옮겨오며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동대문구 제공
    울 동대문구 청량리로터리에서 제기동 방향으로 가다 보면 어디선가 쌉싸름한 한약 향기가 솔솔 풍겨온다. 고개를 들어 보면 한옥 맞배지붕의 큰 일주문이 반긴다. 전국 한약재 유통의 70%를 책임지고 있는 한약의 메카 ‘서울약령시’다. 서울약령시의 실제 역사는 1960년대 경동시장부터 시작하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백성 구휼기관인 보제원(普濟院·널리 구제하는 곳)까지 이어진다.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여행자를 위한 숙식시설로 원(院)과 역(驛)을 설치했다. 한양도성에는 동대문 밖 보제원, 서대문 밖 홍제원 남대문 밖 이태원, 광희문 밖 전관원 등 4곳을 두었다. 이 가운데 동대문에서 3리 떨어진 곳에 있던 보제원에는 진제장(賑濟場·배고픈 백성들의 허기를 진정시켜 주는 곳)이 설치됐고 약방과 의원을 배치해 의지할 곳 없는 병자들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보제원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고 경기 북부와 강원 산간지역의 농산물과 약초가 집중되면서 시장과 약전골목을 형성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사람과 문물, 정보가 모이는 장소를 폐쇄하기 시작하면서 보제원도 문을 닫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져 갔다. 지금은 제기동 안암오거리에 있는 표석만이 옛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중단됐던 서울약령시의 역사는 1960년대 중반부터 다시 시작된다. 6·25전쟁 이후 서울 동부 도심권의 교통요충지였던 청량리역과 옛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경기 북부와 강원도 일대의 농산물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다. 물건을 집하하고 판매하기 위해 청량리역과 옛 성동역 인근 논을 매립한 공터에서 상인들이 노점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시장이 형성됐다. 오늘날 경동시장과 서울약령시의 시초다.
    이후 1970년대에 들어서면 종로4, 5가 일대에 모여 있던 약재상인들이 서서히 제기동 일대로 옮겨오기 시작 했다. 한약재의 본거지였던 종로4 5가에 1957년 보령약국이 들어선 이래 양약 시장이 세력을 넓혔기 때문.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전통 한옥에 자리 잡은 150여 개 점포뿐이었으나 지금은 제기동 용두동 일대 23만 5000m²에 한의원 한약도매상, 탕제원 등 한약 관련 업체가 1000여 곳에 이른다. 1995년 전통한약시장지역으로 인정돼 ‘서울약령시’라는 이름으로 경동시장에서 독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간의 단절은 있었지만 백성의 구휼과 건강을 챙겼던 옛 보제원 일대에 국민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서울 약령시가 들어선 것이 흥미롭다. 서울약령시로 가면 상황 차가버섯 영지버섯 구기자, 오미자 황기, 백하수오 등 250여 종의 약재를 시중 시세 보다 20∼30% 저렴하게 살 수 있다.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약령시 내에는 동대문구에서 운영하는‘서울약령시 한의약박물관’이 있는데 다양한 한약재와 한방 관련 유물 들을 볼 수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3∼10월은 오후 6시까지) 매주 월요일은 휴관. 시장 내에 한방카페도 있어 다양한 전통차와 한방차를 맛볼 수 있다. ‘한방체험장’에서는 사상체질 진단 한방차 시음, 뜸과 침 시술 등 한방의료와 한방비누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02-355-7990
    Donga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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