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고려사 재발견

5 석관(石棺)

浮萍草 2013. 9. 8. 09:39
    망자의 극락환생 빌며 화장한 유골 갈무리 
    고려시대에 제작된 석관의 모습. 전면에 보이는 청룡을 비롯해 백호·주작·현무 등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 국민대 박물관
    자나 대장경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문화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문화재가 석관(石棺)이다. 석관은 1916년 개성 개풍군에 위치한 고려 문신 송자청(宋子淸: ?~1198년)의 분묘에서 처음 출토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길이 90㎝, 너비 46㎝, 높이 45㎝, 두께 3㎝ 정도 크기다. 망자의 시신을 담기 위해 사람 키보다 크게 만든 오늘날의 석관과는 다른 크기와 용도임을 알 수 있다. 송자청의 석관에선 묘지명과 부장품도 발굴됐다(『조선고적도보』 7집).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약 60점의 고려 석관도 모두 이 정도 크기다. 전부 개성 일대에서 출토된, 고려의 문화재다. 석관들이 만들어진 형식도 한결같다. 천판(天板: 덮개)과 지판(地板: 밑부분)으로 구성된 두장의 판석(板石)에다 지판 위에 설치돼 천판을 전후좌우에서 지탱하는 4장의 판석 등 모두 6장의 판석으로 조립되어 있다. 이 때문에 고려 석관은 조립식 석관으로 불린다. 석관은 고려 장례문화와 관련된 유물이다. 석관을 통해 당시 장례 풍습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용도로 사용됐을까? 석관과 함께 출토된 송자청의 묘지명엔 다음 같은 기록이 있다. “1174년(명종4) 서경의 반역자 조위총(趙位寵)이 공격하자, 공(송자청)은 1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먼저 나가 화살을 맞으면서 싸워 격파했다. (중략) 공은 1195년(명종25) 3품의 벼슬로 은퇴했고 1198년(신종1) 12월 20일 병이 들어 집에서 돌아갔다(숨졌다). 영×산(靈×山) 서쪽에 장례를 지냈다가 얼마 뒤 다시 무덤자리를 점쳐 유골을 안장했다.”(송자청의 묘지명) 망자가 숨진 뒤 사흘간을 전후해 빈소에서 조문을 받은 뒤 화장 혹은 매장을 하는 요즘의 장례 형식을 단장(單葬)이라 한다. 반면 위의 기록에서는 송자청의 장례를 치른 뒤 얼마 후 다시 무덤자리를 정해 유골을 안장했다고 한다. 요즘의 장례와는 다른 형식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다음의 기록이다. “공은 향년 83세다. 올해(*1144년) 봄 2월 을미일(*14일)에 집에서 돌아가셨으며 3월 10일 신유일에 정주 땅 동쪽 기슭에 화장했다. 임금이 듣고 몹시 슬퍼하며 특별히 부의를 더하게 하고 조서를 내려 대부(大傅: 정1품)라는 벼슬을 내렸다. 가을 8월 18일 정유일에 이곳에 유골을 묻고 묘지명을 짓는다.”(허재 許載: 1062~1144년: 묘지명)
    ㆍ오랜 기간 제례 올려야 망자에 대한 예의
    유골을 담는 뼈항아리(골호).통일신라기에 제작된
    것으로 국보 125호로 지정됐다.
    고려 중기의 문신 허재는 숨진 뒤 26일 만에 화장됐고 그 뒤 5개월 만에 화장으로 수습된 유골이 다시 매장된다. 사망→화장→유골 수습과 안치→매장까지 약 6개월이 소요된 셈이다. 이런 고려의 장례 형식을 ‘복장’(複葬)이라 한다. 여러 차례 장례를 치렀다는 뜻이다. 복장은 1·2·3차 장(葬)이라는 3단계의 의식을 치른다. 사망 후 빈소를 차려 손님을 맞는 빈례(殯禮)에 이어 화장(火葬)이나 매장(埋葬)을 통해 탈육(脫肉)하는 과정을 거쳐 유골을 수습하는 단계가 1차 장이다. 묘지명 기록에 따르면 사망 후 대체로 5일에서 29일 사이에 화장을 한다. 화장 외에 시신을 땅에 매장해 탈육하는 경우 약 8~20개월이 걸린다. 12세기 중반부터 불교의 영향으로 매장보다는 화장이 보편화된다. 이어 유골을 수습한 뒤 사찰 등에 임시로 안치해 제사를 지내는 단계를 2차 장이라 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 기간은 4개월에서 6년4개월까지 차이가 많다. “옛날 조상을 장례 지낼 때 날을 멀리 받는 것(遠日: 오랜 기간의 장례)이 예의다. 사대부가 3일장을 하는 것은 결코 예법이 아니다.”(『고려사』 권85 형법 금령 충숙왕 복위8년(1339)조) 고려 장례 풍습은 이렇게 오랜 기간 제례를 올리는 것을 망자에 대한 예의로 생각했다. 이 기간 동안 망자의 안식처이자 후손의 발복지(發福地)인 길지를 택하고 분묘를 조성하며 석관과 묘지명 및 부장품을 준비한다. 하지만 유골을 사찰에 방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요즈음 세상의 도가 쇠퇴해 풍속이 경박하다. (중략) 부모의 유골을 사찰에 임시로 모셔두고 수년 동안 매장하지 않은 자들도 있다. 관리들은 이를 조사해 죄를 줄 것이며, 만일 가난해 매장하지 못한 자는 관에서 비용을 지급하라.” (『고려사』 권16 인종 11년(1133) 6월) 복장을 치르는 데 과다한 비용이 든 탓에 유골을 방치한 경우가 적지 않았고 국가가 경비를 지원해 장례를 마무리하는 관행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에 안치된 유골은 석관에 담겨 매장됨으로써 장례 절차가 최종적으로 마무리된다. 이를 3차 장이라 한다. 석관은 이같이 복장식 장례에 필요한 물품이었다. 송자청의 석관 크기(90×46×45㎝)가 당시 표준이었던 것으로 보아, 석관은 수습된 망자의 유골을 담는 용기와 부장품을 담는 데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석관은 화장식 장례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661~680년 재위)은 자신의 장례를 화장으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때부터 화장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다. 원래 화장은 불교와 관계없이 신석기 시대에 발생해 청동기·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일대에서 성행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행해진 화장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삼국·통일신라시대를 거쳐 불교가 발달된 고려 때 성행했다. 고려 때 화장은 승려뿐 아니라 왕족·귀족과 민간 일부 계층까지 확산됐다. 석관은 이런 과정에서 부각된 문화재다. 고려 때 왜 석관 문화가 성행했느냐는 물음은 당시 왜 화장을 했느냐는 물음과 통한다. 화장에 대한 고려인의 생각은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장(葬)’이란 감춘다(藏)는 뜻이다. (망자의) 해골을 감추어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근래 불교의 다비법(茶毗法*화장)이 성행해 사람이 죽으면 모발과 피부를 태워 해골만을 남긴다. 심한 경우는 뼈를 태우고 재를 날려 물고기와 새에게 베푼다. 이렇게 해야 망자가 하늘에 가서 다시 태어나 서방세계(*서방정토의 극락)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고려사』 권85 형법 금령조 공양왕 원년(1389)조)
    ㆍ관료·지배층 문화 … 서민들은 매장·풍장
    모발과 피부는 물론 뼈까지 태우는 화장을 해야만 망자가 극락으로 갈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석관은 망자를 서방정토로 이끌어주는 도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화장 후 유골을 수습한 뒤 일정기간 안치해 제례를 올린 후 다시 석관을 만들어 유골을 정성스럽게 담아 매장했다. 그렇지만 화장이 고려의 일반적인 장례 풍습은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의 경우 장례 도구를 갖추지 못하면 들판 가운데 버려두고 봉분도 하지 않고 비석도 세우지 않았다. 개미, 까마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놓아두어도 사람들이 잘못됐다고 하지 않았다.”(『고려도경』 권22 잡속(雜俗)조) 이 글에서 드러나듯 고려의 일반 주민은 시신을 바로 땅에 매장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것조차 어려워 들판에 시신을 놓아두는 풍장(風葬) 같은 ‘단장’(單葬)을 했다. 묘지명의 주인공이 왕실·관료층과 그 가족이듯이 석관도 관료·지배층 장례문화의 일부였다. 석관은 미술사적인 가치를 지닌다. 석관의 네 벽은 관의 좌우에 해당하는 길이가 긴 장벽(長壁)과 석관의 앞뒤에 해당하는 길이가 짧은 단벽(短壁)으로 구성된다. 석관의 네 벽 외면에는 주로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다. 네 벽 가운데 2장의 장벽 좌우에 각각 청룡(靑龍*좌청룡)과 백호(白虎*우백호)를 나머지 2장의 단벽 전후에 각각 주작(朱雀*남주작)과 현무(玄武*북현무)를 선으로 깊이 새겼다. 또는 돋을새김을 했다. 사신(四神)은 사방을 수호하는 방위신이다. 석관을 매장할 때 위치를 표시하는 기능도 했다. 동서남북을 상징한 청백주현(靑白朱玄)의 네 색깔은 중국 황제가 관리를 지방에 파견할 때 사방의 방향에 따라 각각 해당 색깔의 흙(*色土)를 내려준 데서 연유했다. 사신도는 석관 내부를 망자의 소우주로 간주하고 망자의 안식을 위해 석관의 외면에 사신을 배치한 그림이다. 그 밖에 연꽃무늬(*蓮花文), 당초문(唐草文) 비천상(飛天像) 봉황문(鳳凰文) 구름무늬(雲文) 12지신상 모란무늬 등이 그려진 경우도 있다. 석관의 뚜껑과 밑판의 판석에도 테두리를 선으로 새긴 뒤 위와 같은 그림을 새겨 넣었다. 석관의 장식은 남북조 이후 중국 역대 왕조와 거란의 석관에 새겨진 그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석관의 사신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신라왕릉의 12지신상을 계승한 것이다. 또 석관에 새겨진 장식기법은 고려의 도자기와 금속용품, 부도 등의 장식문양을 계승했다. 고려 예술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또 석관의 양식은 거슬러 올라가보면 화장유골을 담은 삼국시대의 ‘골호’(骨壺*뼈항아리)를 계승하고 있다. 골호는 돌덩이 속을 파내어 화장유골을 담고 그 바깥(*石函이라 함)을 여러 형태의 문양으로 다듬은 것이다. 석관은 내부에 골호와 같은 기능인 망자의 화장유골을 담은 그릇(*주로 나무상자)이 있다. 이와 함께 청자, 동전, 숟가락 등 부장품이 들어있고 그 외부에는 사신도를 새겨 골호보다 양식적으로 더 발달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Sunday.Joins Vol 339     박종기 국민대 교수 j9922@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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