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고려사 재발견

3 대장경

浮萍草 2013. 8. 25. 09:10
     불교 지식과 첨단 인쇄술 결합된 5000만 자의 하이테크
    해인사에 소장돼 있는 재조대장경. 국보 제32호로 지정돼 있다. 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자 고려 왕조가 11년에 걸쳐 만든 두 번째 대장경이다.
    / 중앙포토
    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장(經藏) 그것을 해설하고 내용을 보완한 논장(論藏) 수행자의 계율을 담은 율장(律藏) 등 불교와 관련된 경전을 전부 모은 게 대장경이다. 대장경에는 편찬 당시까지 전래된 모든 경전이 포함되어 있다. 한 왕조에서 두 번이나 대장경을 만든 세계 유일의 왕조가 고려다. “국왕(*고종)은 서문 밖 ‘대장경판당’(大藏經版堂)에 행차하여 백관과 함께 분향을 했다. 현종 때 만들어진 판본이 임진년(*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자 왕이 군신들과 함께 다시 발원하여 도감(都監)을 세워 16년 만에 마쳤다.” (『고려사』 권24 고종 38년(1251) 9월) 두 번째 대장경(1236년 시작)이 16년 만에 완성된 사실을 이같이 전하고 있다. 완성된 경판 숫자가 8만여 개라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부른다. 고려 때 두 번째로 만든 대장경이라서 ‘재조(再彫 두 번째 새겼다는 뜻)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후자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재조대장경은 현재 세계에 남아 있는 것 중에 가장 오래된 대장경이다. 세계 최초의 대장경은 983년 완성된 송나라 대장경이지만 1127년 금나라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다. 고려는 991년(성종 10년) 송나라에서 이 대장경을 입수했다. 1011년(현종 2년) 거란의 침입을 받자 고려는 송나라 대장경을 토대로 대장경 판각 작업에 착수한다. 이 작업을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李奎報·1168~1241년)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옛날 현종 2년(1011) 거란주(契丹主: 거란 국왕)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침략하자 국왕은 남쪽으로 피난했다. 거란군은 송악성(松岳城)에 주둔한 뒤 물러가지 않았다. 현종은 신하들과 함께 더할 수 없는 큰 서원을 하여 대장경을 판각하여 완성하기로 했다. 그러자 거란군사는 스스로 물러갔다.”(『동국이상국집』 권25 ‘대장경판각 군신(君臣)기고문(祈告文)’, 1237년) 1054년(문종 8년) 거란이 자신들의 대장경을 완성하자(1034년 시작), 10년 뒤인 1063년(문종 13년) 고려는 이를 입수한다. 그리고 현종 때 착수한 대장경을 보완하여 1087년(선종 4년) 최종적으로 완성한다. 초조(初彫고려에서 처음 새겼다는 뜻)대장경이다.
    ㆍ고려, 대장경 두 차례 만든 유일한 왕조
    당시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사상과 지식체계는 유교와 불교였다. 오늘날의 보편적인 사상과 지식체계인 민주주의 이념과 같다. 민주주의 이념의 어젠다를 우리가 선점하고 주도한 적이 있었던가? 대장경 판각은 고려가 당시의 불교 지식과 사상체계를 완전히 이해하고 소화하여 동아시아 사상과 지식체계를 주도했다는 생생한 증거물이다. 대장경을 단순히 불교유산으로 그 역사적 의미를 제한시킬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장경 판각에 관한 이규보의 증언은 계속된다. “그때(현종 때)나 지금이나 대장경은 한 가지고 그것을 새긴 일도 한 가지고, 군신(君臣)이 함께 하늘에 서원한 것도 한 가지이다. 그런데 어찌 그때만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가고, 지금의 달단(韃靼*몽고)은 그렇지 않겠는가? (중략) 진실로 지성으로 (서원)하는 것이 그때(*현종)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원하건대 제불성현 삼십삼천(諸佛聖賢三十三天)은 간곡하게 비는 것을 헤아려 신통한 힘을 빌려 완악한 오랑캐가 발길을 거두고 멀리 도망 하여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하소서.”(『동국이상국집』 권25, ‘대장경판각 군신(君臣)기고문(祈告文)’, 1237년) 1232년(고종 9년) 몽고 침략으로 불타 없어진 대장경을 다시 만들 당시 모든 군신의 비장한 뜻이 잘 드러나 있다. 초조대장경은 70여 년 만에 완성되었는데(1011~1087년), 재조대장경은 16년 만에 완성되었다(1236~1251년). 그러나 재조대장경에 표시된 작성연대를 검토하면, 실제로 1237년(고종 24년)에 제조가 개시됐고 1248년(고종 35년)에 완성되었다. 알려진 것보다 더 짧게 11년 만에 완성된 것이다. 재조대장경 판각 도중 몽고와 두 차례 전쟁(3차: 1235~1239년, 4차: 1247~1248년)이 있었다. 전쟁 중인 3년간(1237~1239년, 1247~1248년) 전체의 16%만 판각되었다. 대부분(84%)은 전쟁이 없던 7년(1240~1247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판각되었다. 특히 1243년 지방에 분사(分司)대장도감이 설치되어 중앙과 지방에서 동시에 판각이 이루어지면서 대장경 판각은 급속하게 진행됐다. 전쟁이 없던 1243년(전체 20%) 1244년(24.7%) 1245년(10.3%) 1246년(6.6%)의 4년 동안 전체의 약 62%가 완성됐다(최연주,『고려대장경 연구』, 2006).
    ㆍ김정희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 쓴 글”
    고려가 짧은 기간에 대장경을 완성한 것은 이규보의 증언과 같이 불심(佛心)으로 몽고 침략을 물리치려는 고려인의 혼과 정성의 결과였다. 추사 김정희가 재조대장경을 보고 “이것은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신선이 쓴 글이다(非肉身之筆 乃仙人之筆)”라고 극찬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 규모도 대단하다. 재조대장경에 새겨진 글자 수는 약 5200만 자다. 500년 역사가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의 글자 수가 5600만 자인 점을 감안하면 그 규모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 숙련공이 하루 평균 40자를 새길 경우 5200만 자를 새기는 데 연인원이 약 130만 명 동원됐을 것이다. 16년의 작업을 전제로 하면 하루 평균 300명에서 1000명 이상이 동원된 셈이다. 평균 길이 68~78㎝ 폭은 약 24㎝ 두께 2.7~3.3㎝인 경판을 가로로 눕혀 쌓으면 백두산 높이에 가깝다. 그것을 이으면 150리가 된다. 1개 경판을 만들기 위해 지름 40㎝인 원목은 2만7000그루 지름 50~60㎝인 원목은 1만~1만5000그루가 필요하다(박상진『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2007년)
    대장경 간행에 크게 기여한 대각국사 의천.
    재조대장경 작업이 단기간에 끝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초조대장경을 제작한 경험이다. 재조대장경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저본(바탕이 된 경전)의 60%는 초조대장경이다. 재조대장경이 단기간에 완성된 가장 큰 이유다. 초조대장경은 불타 없어졌지만 그것을 종이에 찍은 인본(印本)은 현재 1900점 정도 남아 있는데 일본(약 1700점)과 한국(약 200점)에 각각 전해지고 있다. 둘째 재조대장경이 저본으로 삼은 나머지 40%는 초조대장경 이후 송과 거란에서 새로 수집한 경전이다. 즉 초조대장경 제작 이후(1087년) 재조대장경 제작(1236년)까지에 이르는 약 150년 동안 동아시아에 유통된 수많은 불교 경전을 꾸준히 수집·정리한 것이다. 이처럼 축적된 연구가 있었기에 고려의 불교 연구와 이해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에 이른 것이다. 재조대장경의 독창성과 우수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고려 최고의 학승(學僧) 대각국사 의천(義天·1055~1101)의 역할이 컸다. “(선종) 2년(1085) 4월에 왕후(王煦*義天)가 몰래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송나라 상인의 배를 타고 송나라에 갔다. 의천은 사방을 돌아다니며 불법을 배우기를 (송 황제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아 관리를 데리고 오(吳) 땅의 사찰들을 방문했다. (중략) 의천은 귀국하면서 불교와 유교 경전 천 권을 (선종에게) 바쳤다. 또 국왕(선종)께 아뢰어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거란과 송에서 사온 불교 경전 4000권을 간행 했다.”(『고려사』 권90, 대각국사 왕후(王煦) 열전) 의천이 1085년(선종 2년) 송나라에 가 여러 사찰에서 불교를 연구했으며, 거란과 송나라에서 수천 권의 불교경전을 구입하여 간행했다는 기록이다. 의천은 이렇게 초조대장경을 완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의천에 이어 승통(僧統) 수기(守其)는 재조대장경을 조판하기 위해 여러 불교 경전을 수집하고 교정했다.
    ㆍ고려 금속활자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
    대장경은 한편으로 인쇄술 발달이라는 기술의 진보가 없었다면 완성될 수 없었다. 인쇄술은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전파할 수 있는 최첨단 기술로서 인류 문화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가치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인문적 가치 혹은 인문정신과 결합된 것이다. 기술과 정신이 결합된 정화(精華)가 바로 인쇄술이다. 현재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본은 751년 통일신라 때 제작된 『무구정광다라니경』(無垢淨光陀羅尼經·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이다. 목판인쇄술이 통일신라 때부터 발달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기술 전통에 힘입어 고려가 두 차례나 대장경을 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재조대장경 간행 직전인 1234년(고종 21년) 고려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이란 책을 펴낸 바 있다. 재조대장경 제작 당시 고려 인쇄술은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의 단계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흔히 재조대장경을 ‘5000만 자의 하이테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인쇄술이라는 최첨단 과학기술이 대장경 제작에 큰 역할을 했음을 두고 한 말이다. 불교 지식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쇄술이라는 최첨단 기술이 결합됐기에 대장경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조판했다”는 이규보의 말 속에는 첨단 지식과 기술이 결합된 당시 고려 문명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담겨 있다.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만으로 대장경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현대문명의 총아인 스마트폰은 흔히 인문정신과 첨단기술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대장경 또한 그것에 비유할 만하다. 대장경은 고려 명품의 지위를 넘어 기술과 지식의 결합이라는 한국형 전통문화의 정수이자 미래 한국문화의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Sunday.Joins Vol 337     박종기 국민대 교수 j9922@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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