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文化財사랑

조선 문명의 틀, 『경국대전(經國大典)』

浮萍草 2013. 8. 1. 19:08

    ㆍ경국대전의 짜임새 론 조선의 법전이 경국대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국대전만 해도 영조 때 속대전(續大典), 정조 때 대전통편(大典通編), 고종 때 대전회통(大典會通)하는 식으로 증보되었다. 아무래도 시대가 변하면서 보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므로‘만세불역’이란 말이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이들을‘대전류(大典類’)라고 부를 수 있을텐데 가장 늦게 간행된 대전회통에 보면 이러한 변화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다. 순서대로‘원(原)’‘,속(續)’‘,증(增)’‘,보(補)’라하여덧붙여편집하였으므로 경국대전을 기초로 대전류가 이후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 수 있게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대전류 외에 중요한 법률의 역할을 한 것이 국왕의 전교(傳敎)였다. 한편 각 관청별로‘편하게 참고하는 규정(便考)’‘일반적으로 두루 참고하는 규정(通考)’하는 식으로 매뉴얼을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요즘으로 치면 시행규칙이나 시행 세칙 지침 등이 될 것이다. 그런데‘조선의 헌법’하면 머리에 첫 번째로 떠올랐던 경국대전은 과연 조선의 헌법이었을까? 경국대전의 본문을 보면 서문을 빼고 모두 6권(卷)으로 되어 있다. 그 6권이 각각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전(工典)으로 구성되었다. 「형전(刑典)」에 들어갈 만한 각 양형(量刑,형벌의 정도를 정하는 일) 규정은 중국의「대명률(大明律)」을 가져다 썼다.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인데「대명률」에 이두를 달아 해석한 것으로, 별도의 형률을 만들지 않고 이를 참조하여 법집행에 활용하였다. 이런 경국대전은 요즘으로 치면 정부조직법과 국가운영에 관한 구체적인 시행 법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상에 기초한 국가의 기본이념과 국민의 기본권을 밝히고 있는 근대의 헌법과는 사뭇 다른점이다. 경국대전이라는 명칭으로 보면 ‘국가를 경영하는 큰 법’이 되므로 일견 헌법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막상 내용을 보면 우리의 관념과 다소 차이가 있는 셈이다. 조선시대와 현대를 그 헌법의 형식에 있어 단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의 헌법이라고 알고 있는 경국대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헌법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결과에 대해 그 이유를 국왕 중심의 전제정치(Despotism)로 돌리고, 그 때문에 근대의 헌법 같은 것은 애당초 조선에서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아마 이런 생각 때문에 조선시대 헌법의 존재에 대한 발상조차도 가능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의적인 국가운영을 통해 500년을 통치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적어도 근대의 헌법과 같은 그 무엇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쉽게 포착되지 않는 것은 혹 우리의 접근 방법과 관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ㆍ 헌법과 역사성
    여기서 헌법의 이념과 조문을 분리하여 생각해보는 편이 일단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근대 헌법에 대하여, 민주주의와 기본권에 대한 자연법사상과 계몽주의가 그 이념이고 그것이 우리가 아는 헌법 조문으로 구체화된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자연법사상과 계몽주의는 역사상 특정한 시점에 등장한 이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아는 헌법이 매우 역사적인 산물이며 동시에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어떤 시기에 뭔가의 형태로 지양(止揚)될 수도 있는 체제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가 조선시대의‘헌법’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헌법’이 초역사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사회규범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 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예치(禮治)와 법치(法治)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는 법 일반의 성격을 좌우하는 이념도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법이 사람들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사실 요즘도 법을 의식하며 사는 또는 법의 규정이 힘을 발하는 삶의 영역은 수치로 보아 10%도 되지 않는다는 보고도 있다고 한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 많기에 그래도 사회가 이만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ㆍ예치와 법치
    ‘법치’라는 관념이 가장 훌륭한 미덕이 된 시대는 우리가 사는 근대 사회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그나 카르타 권리장전 나폴레옹 법전 등을 계보로 삼아 그게 없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생각하는 발상의 저 편에는 바로 근대 사회의 법치주의 이념이 자리 하고있다. 즉 이런 법치를 통해서 인간의 삶을 질서지운 시대에 대한 찬양이 담겨 있고 물론 그 시대인 근대를 인간 역사에서 가장 발전된 시대로 보는 배경이자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법치의 가치를 반성이 없이 동조하는 데 대한 문제 제기는 여전히 다음과 같은 과제를 남겨놓고 있다. 왜 예치가 우선되는 사회에서 법치가 우선되는 사회로 넘어갔는가? 거기에는 필연성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필연성보다는 어떤 단절이 있는 것은 아닌가? 단절이 있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어차피 사회규범이 인간 사회의 필수조건이라면 앞으로 인간사회에서 있을, 있어야 할 규범은 어떤 인간학적 기초에서 고민되어야 하는가? 공자가 말하였다. “행정명령이나 규제를 통하여 인민을 이끌고 형률을 통하여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면 인민들은 그 규제나 형률을 모면하려고 하고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을 모르게 된다. 덕으로 인민을 이끌고, 예로 질서를 유지하면 인민들은 부끄러움도 알게 되고 품격이 있게 된다.” 논어「위정爲政」에 나오는 말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어렸을 때로 기억하는데 당시 교통법규를 위반하면 새끼줄을 친 구역에 위반한 사람을 얼마간 세워두었다가 풀어주는 처벌을 시행했던 적이 있었다. 왜 세워두었을까? 아마 창피를 주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부끄러움이라는(羞惡之心) 질서관념(禮)을 교육하는 시간인 셈이다. 요즘은 벌금을 내게 한다. 길에 세워놓는 방식은 당장인권 침해 논란이 일어났을 일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 윤리학-법학의 질문에 대한 답이 끝난 것일까? 아예 포기한 것이 아닐까? 인간의 자율성 자발성이라는 측면을 중시하여 사회생활의 상호이해 배려 질서를 실현할 때 느끼는 평온함과 달리 강제적 법집행(또는 처벌을 요행히 회피하는 것)이 갖는 한계도 분명하지 않았나? 경국대전이 조선의 헌법이냐, 아니냐에 답이 있지 않다. 경국대전은 나라의 경영에 이러한 윤리학 법철학의 고민을 담은 문화적 성과이다. 상벌이 따르는 법률 규정에서부터 내재적 자발성을 유도하여 나라를 꾸려가려는 이념이 담긴 헌법이자 정부조직법이자 사회규범이다. 이쯤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의‘경국대전’은 무엇이며 어떤 철학적, 역사적 비전에 기초하고 있는지 물어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사진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문화재청 ☜    글 오항녕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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