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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끝> 예술 꽃피운 기생

浮萍草 2013. 7. 7. 11:06
    기녀·서녀 출신들최초 여성문예 동아리‘삼호정시사’ 만들다
    1 한복디자이너 이영희 선생이 현대적으로 디자인한 기생 이미지의한복을 입은 모델들.사진 이영희 2 기생 죽향의 그림 ‘花鳥花卉草蟲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박영민 교수 3 이영희 디자이너가 2000년 미국 카네기홀 쇼에서 선보인 기생 스타일 전통 한복. /사진 이영희
    “부용당의 가을 밤 이슬 무성한데 고운 마음을 슬퍼하며 묵죽을 마주하네 바람이 불고 잎이 흩날려 두 칼이 쌍검무를 추는 듯 천연스레 일어나 춤추는 푸른 비단 치마여” 이 멋진 시를 읊은 사람은 평안남도 성천 출신의 기생 운초(雲楚) 김부용(1805?~1850?)이다. 묵죽화를 감상하고 난 소회를 담아낸 시다. 운초와 함께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라는 문예동아리 멤버였던 죽향은 묵죽화에 뛰어났다. 19세기 최고의 화가였던 신위는 죽향의 묵죽화가“소산 송시랑(蘇山 宋侍郞)으로부터 비롯됐다”고 평했는데 소산의 묵죽화는“시각적 감흥과 내면적 흥취,강렬한 표현 욕구를 거리낌 없이 화폭에 옮겨 담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운초의 시는 이러한 죽향의 묵죽화에 대한 평가와 나란히 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의 용산 근처에 있던 삼호정이라는 별장에서 모여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며 스스로를 ‘삼호정시사’라 불렀다. 18세기 이후 문화 향유 계층이 신분을 뛰어넘어 확대되어 가는 현상이 일반화되어 갔다. 마침내 19세기 초반 재능 있는 여성들의 문화활동으로 꽃피기 시작했다. 삼호정시사는 최초의 여성문예활동 그룹이다. 이들은 시서화의 창작과 감상, 비평, 수장 등 고차원의 문화를 향유했다. 참여 구성원의 면면도 빼어나다. 운초와 죽향 이외에도 14살에 남장을 하고 금강산 유람을 다녀와서『호동서락기』를 쓴 금원(錦園),가야금 솜씨가 빼어난 죽향의 언니 죽엽(竹葉) 시를 잘 지은 금홍 (錦紅) 죽향처럼 시화에 이름난 경혜(瓊蕙) 등이 그들이다. 모두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났다는 점 이외에도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기녀 혹은 서녀 출신 소실들이라는 점이다. 조선의 기방문화를 연구한 고려대 박영민 교수(한국학)는‘기생의 문화와 예술’ 강의에서 이들이 기녀라는 낮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조선의 문화적 풍경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조선시대의 기방은 남성들의 저급한 욕구 충족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 아니었다. 기방은 중세적 신분사회에서 재능을 갖춘 여인들이 훈련 받고 활동하던 특수한 문화적 공간이었다. 기방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생’에 대한 균형 잡힌 시선이 필요하다고 박 교수는 말한다. 1908년 관기 제도 폐지까지 계층적 속성이 유지되었던 기생은 광대와 마찬가지로 문화적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국가의 관리를 받던 노비 신분이었다. 당시는 종모법(從母法)에 의해 어머니의 신분을 따랐다. 즉 어머니가 기생이면 딸은 세습기가 되어야 했다. 『호동서락기』를 쓴 금원은 아버지가 사대부였지만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관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양인이나 사대부의 딸로 태어났으나 의지할 곳이 없는 신세가 되어 노비가 된 경우에도 기생이 되었다. 이들 중에서 선발된 아이들이 7~8살에 기적에 올라 기생수업을 시작했다. 각종 악기 연주와 춤을 비롯해 시문학을 배웠다. 기방은 여성 예능인이 양성되는 중요한 통로였지만 단순히 예능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신분적인 굴레가 컸다. 평상시에는 국가의 잡역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신분 때문에 기생이 된 것이지 자발적인 매춘을 위해 기생이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춘향이처럼 수청을 거부하는 일도 당연했다. ‘기생의 정절’ 같은 형용모순적인 상황은 기생의 신분과 이들이 학습한 유교사회적 가치 사이의 모순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박 교수는 기생 운초를 ‘조선 시대 최고의 기생’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황진이가 주로 남성들의 시각이 투영된 하나의 전설 같은 존재라면 운초는 300수의 많은 시를 남긴 여류 시인이며 19세기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사적인 인물이라 는 것이다. 운초를 중심으로 한 여성 그룹의 문예활동은 “조선 후기 예술 문화계의 지형도를 다 바꿔놓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박 교수는 강조했다. 물론 그녀들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기생의 처지를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기생이 면천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능한 유일한 탈출구는 사대부의 소실이 되는 일이었다. 운초에게도 김이양(1775~1845)과의 오래된 사랑 이야기가 전해온다.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한 김이양은 운초의 시재를 인정하고 아꼈다. 운초라는 이름을 준 것도 김이양이었다. 운초는 10대 중반에 그를 만나 십 년 넘게 기다려 50살이나 많은 김이양의 소실이 되었다. 김이양의 부인이 죽고 난 후의 일이다. 운초의 선택은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고 아낀 이에 대한 사랑이었으며 동시에 기방생활에서 우아하게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운초처럼 삼호정시사 구성원이 모두 사대부의 소실이었던 것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재능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던 조건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호동서락기』를 쓴 금원은 추사 김정희의 육촌형제인 김덕희의 소실이었다. 김정희도 금원의 글재주를 높이 평가했다. 19세기 문화를 주도한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이 이들의 재능을 인정하고 활동을 지원해 주었던 것은 19세기 전반기에 불기 시작한 사대부 사회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개방적 문화를 가졌던 경화사족들은 특히 청나라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당시 청에서는 여성예술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원매(袁枚)는 ‘수원여제자(隨園女弟子)’라고 하는 ‘여성제자그룹’을 교육하고 그들의 시집을 간행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신위·김정희·조희룡 등 당대 지식인들은 청나라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그들로부터 여성 예술가들을 소개받기도 했다. 그런 만큼 “청의 예술가들에게 조선의 여성 예술가를 소개했을 것”으로 박영민 교수는 추측한다. “조선과 청의 예술 교류의 장에 두 나라 여성의 예술 활동이 중요한 매개로 작용을 했다”는 점은 19세기 전반기의 중요한 문화적 특성이었다. 삼호정시사회 성원들 역시 청나라의 문화예술계 동향에 민감해 청에서 수입한 화보(畵譜)·화적(書籍) 등을 학습, 모방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운초 그룹’은 기생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연회 장소가 아니라 순수예술창작 공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세기 전반기 중인 출신 직업화가 이재관의 작업실 ‘흔연관’에서는 조희룡ㆍ김양원ㆍ김예원 등 중인층 문인예술가들이 모여 시와 그림을 창작ㆍ감상하는 모임이 자주 있었다. 여기에 여성예술가 운초도 참여해 재능을 뽐냈다. 박 교수는 지금까지 기생에 대한 연구가 ‘기생이 술자리에서 어깨 너머로 사대부 문화를 듣고 간접적으로 흡수했다’는 수준을 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운초그룹의 예술활동은“19세기 문예사의 지형도를 변화시킨 적극적인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호정시사회는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활동은 남녀차별이 극심했던 유교 사회에서 매우 이례적이고 선구적인 일이었다.
    Sunday.Joins Vol 330     글 이진숙 미술평론가 kmedich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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