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향연

<3> 18세기 도시 건설

浮萍草 2013. 5. 26. 11:30
    물과 땅의 성질에 맞춰 청계천 정비한 영조 신도시 화성 세운 정조
    이인문,송석원시사아회도,<옥계청유첩>,지본담채,25.6×31.8cm, 1791년.
    시는 살아 있다. 때로는 자연발생적으로, 때로는 계획에 따라 성장한다. 도시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다. 최근『오래된 서울』(동하 2013)을 펴냈고‘서울학’창설의 주역이라 불리는 최종현 통의도시연구소 소장의 강의 주제는‘18세기 서울 의 도시적 양상-사회 변화와 도성의 변모’였다. 18세기 서울의 모습을 만든 사람은 누구이며 어떻게 변화하고 있었는가? 최 소장은 18세기 서울의 도시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우선 ‘경강상업’과 ‘위항문학’의 발달을 꼽는다. 18세기에 이르러 서울은 전국적인 시장 유통망의 중심지로 30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거대 도시가 되었다. 그 핵심에는 한강이 있다. 조선 기술과 해상 교통의 발전으로 전국적인 해로 유통망이 형성되었다. 한강·서강·용산·마포·망원·두모포·서빙고·뚝섬 등 주요 포구는 상품 유통의 거점이 되었고 육로를 통해 주요 시장들과 연결되었다. 이런 꾸준한 발전을 반영하듯 19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지도들에는 한강변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강변의 취락 발달, 물류의 움직임 성장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표시되어 있다. 서울이 상업도시로 발달함에 따라 주변 도시도 함께 성장하고 서울 외곽의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개성·수원 등지는 서울 상권과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배후 도시로 성장했다. 생활 영역이 사대문 밖, 한강 등으로 넓어지면서 땅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대되었다. 신경준이 한반도 전체의 산맥체계를 백두대간으로 정리한 ‘산경표’가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금강산 유람은 18세기 조선인들의 최대 로망 중 하나였다. 최 소장은 18세기를 “학문적으로 심오했고 활동은 다양한 시기”라고 요약한다. 위항인 혹은 여항인이라 불리는 중인 계층의 문예활동이 문화계의 주요한 흐름으로 등장한다. 자연과 삶을 노래하는 ‘풍월 읊기’는 더 이상 양반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전성기 때는 시 쓰기 솜씨를 겨루는 ‘백전(白戰)’에 수백 명의 중인 지식인들이 참여해 계층을 초월한 지성과 풍류를 뽐냈다. 위항문학의 활성화는 계층을 넘어 문화향유가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한양도성도, 채색필사본, 128.6×102.7cm, 1760년 이전, LEEUM 소장.

    여러 위항문학단체들이 활동을 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정조 때 결성된 옥계시사(송석원(松石園) 시사)다. 이들은 위항인들의 정신적인 중추 역할을 했으며 그 흐름은 19세기 말까지 이어져 근대 개화운동의 구심점이 된다. 이들은 인왕산 아래 지금의 사직동·누상동·옥인동에 해당하는 지역 삼청동 등을 거점으로 모임을 가졌다. 모두 서울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던 곳이다. 원래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서촌은 경복궁 주변으로 건국 초기에는 왕족이나 권력층의 주거지가 밀집해 있던 지역이었다. 이곳에 중인들이 함께 기거하게 되면서 다양성의 문화를 함께 만들어 나갔다. 서촌 출신으로 유명한 중인 중 한 사람이 겸재 정선이다. 정선은 ‘인왕제색도’를 비롯한 여러 그림에서 서촌과 서울의 전경을 아름답게 전한다. 중국풍의 관념 산수에서 진경 산수로의 이행은 생활 공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의 등장을 의미한다. 당대의 삶은 그려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도시의 모습은 통치자들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영ㆍ정조 시기의 도시개량사업은 유교적‘애민’사상의 발로이자 그 결과물이다. 자주 범람해 민초들을 괴롭히던 청계천의 준천은 영조의 주요 치적 중 하나다. 이때 남긴 영조의 기록을 보자. “역시 너희들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군사의 행진하는 것과 달라서 비록 친히 판 삽을 잡고 여러 사람을 용동하려고 하나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내년 봄에 비록 시역을 하더라도 지금 미리 정한 뒤에 이 일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불편한 마음을 가졌다면 각기 생각한바를 진달하고 억지로 따르거나 물러가지 말도록 하라.” 이것이 왕의 명이었다. 아무리 필요한 일이었어도 충분한 의견수렴 과정을 거친 후에 행했다. 치적을 과시하는 일보다 중요했던 것은 국민들과 공감하는 일이었다. 18세기 도시 변모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정조의‘화성축조’(1789)다. 생부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는 데서 시작된 이 일은 신도시의 기획 건설로 이어진다. 이것은 정약용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의 협업 속에서 만들어진 가장 지적인 프로젝트였다. “성의 부속건물들은 모두 다르게 지어져 있는데 이렇게 다양한 건물군의 동시적인 건축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점을 최 소장은 강조한다. 정조는 행정적 기능 이외에도 상가와 저수지 조성 등 다양한 기반시설을 기획했다. 정조는 도시의 생태계를 이해했으며 민생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금감면 혜택과 전매권 부여 등 이주민들의 안착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계획은 치밀했고 실행은 효율적이었다. 10년 걸릴 일을 2년7개월 만에 끝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국가가 일꾼을 부릴 때 부역이 아니라 정당하게 임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화성 축조 및 수원의 건립에는 조선 개국 이후 일관되게 흐르는 조영 사상이 적용되고 있다. 이는 경회루의 연못 조성 영조의 청계천 준설에도 적용되었던 원칙이다. “건축이든 원림이든 간에 조성하는 데 필요한 흙은 그 입지 안에서 해결한다는 원리와 수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물의 정화를 자연 스럽게 하기 위해 계기적(繼起的)으로 순환하는 방식”이다. 이것은“자연의 순리 즉 물과 땅의 성질을 탐색·이해하고 그 원리에 부합하는 조성기술을 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도시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그것이 오래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는 태도다. “도시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개변ㆍ창조되는 산물이다. 국토는 유한하다. 단기적인 경제적 목표는 도시 개발의 논리가 전부가 아니다. 후손에게 무엇을 남겨주고 갈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모든 생명체가 함께 살 수 있는 지구에 대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말로 최 소장은 강의를 마무리했다. 그는 지금의 서울은 고려 문종(1046~1083) 때 삼경 중의 하나인 남경으로 지정되면서 역사적인 의미를 갖게 되므로 서울의 역사를 1000년으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대로 천년 고도‘오래된 서울’의 재발견과 함께 우리가 앞으로 오래 살아갈 미래의 서울 천년에 대한 고민도 끊임없이 이어 져야 한다.
    Sunday.Joins Vol 324        정리 이진숙 미술평론가 kmedich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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