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3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밀란 쿤데라

浮萍草 2013. 9. 3. 00:00
    무거움보다 더 무서운, 가벼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
    체코 태생으로 1975년 프랑스로 이주해 현재
    파리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초현
    실주의를 연상케 하는 실험적인 소설 기법으로
    삶의 본질적인 질문들을 다루고 있다.
    장 때려치워야지! 출근할 때마다 수백 번도 더 그렇게 외쳐댔던 직장을 막상 그만두고 난 다음날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이제는 사표 낼 회사도 없어졌구나.” 그동안 두 어깨를 짓눌러왔던 무거운 짐이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얼굴이 낯설어 보인다. 코 옆의 팔자주름은 언제 이렇게 깊어졌지? 그러다 문득 생각해본다. “코는 어차피 산소 공급 장치 말단부에 불과하고 얼굴이란 시각 청각 후각 기관이 모여있는 계기판일 뿐이야.” 그렇다면 육체는 가볍고 영혼은 무겁다는 말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 earable Lightness of Being)』은 시종일관 이런 물음을 던진다. 그래서 좀 어렵고 사색을 요구한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식 철학적 놀이공원은 읽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모험이다. 즐기면 된다. 주제는 무거워도 문장은 가벼우니까. 가령 처음에 나오는 장면을 보자. 토마스와 테레사의 극적인 만남은 여섯 개의 우연이 연속적으로 존재한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다. 테레사가 사는 시골마을에 우연히 치료하기 힘든 편도선 환자가 생겼고 토마스가 일하는 병원 과장이 급히 호출 됐지만 우연히 좌골신경통에 걸리는 바람에 그가 대신 가게 됐다. 마을에 호텔이 다섯 개 있는데 토마스는 우연히 테레사가 일하는 호텔에 투숙했고 우연히 열차 출발 시각까지 시간이 남아 식당에 들렀다.
    우연히 그 시간 테레사가 토마스의 테이블을 담당 당번이었고 그가 코냑 한 잔을 주문했을 때 우연히 라디오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베토벤의 현악 4중주가 흘러나왔다. 테레사는 그 순간 이 낯선 남자가 그녀의 미래의 운명임을 알아챘다. 우연은 뭔가 마술적인 힘을 갖고 있다. “오로지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보여진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하나의 사랑이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여러 우연이 합쳐져야 한다.” 많은 여자를 추구하는 남자는 두 개의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낭만적 집착형과 바람둥이 집착형이다. 전자는 모든 여자에게서 자신의 고유한 꿈과 주관적인 개념을 찾고 후자는 객관적인 여성 세계가 지닌 무한한 다양성을 수중에 넣고자 한다. 이런 말이다. 낭만적 집착형은 맨날 늘씬하고 예쁜 여자만 좇는다. 늘 애인을 자랑하고 스캔들을 일으킨다. 반면 바람둥이 집착형은 기이한 것을 수집하듯 다양한 여성을 좇고, 쉽게 애인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토마스가 바로 바람둥이 집착형인데 그는 에로틱한 우정을 내세우며 애인들에게 상대의 인생과 자유를 독점하지 말라고 한다. 그에게는 3자 법칙이라는 게 있다. “짧은 간격을 두고 한 여자를 만날 수도 있지만 3번 이상은 안 된다. 혹은 수 년 동안 한 여자를 만날 수 있지만 이때는 3주 이상의 간격을 두어야 한다.” 덕분에 토마스는 고정적인 애인과 결별하지 않으면서도 수많은 하루살이 애인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었다. 이랬던 토마스가 순전히 테레사를 책임지기 위해 프라하로 돌아간다. 스위스에 그냥 있었더라면 의사로 안락한 삶이 보장됐겠지만 소련군이 점령한 체코에서 위험 인물로 찍혀 유리창 청소부에 트럭 운전사로 힘들게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길이 더 나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초벌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초벌그림’이란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초벌그림은 무엇인가에 대한 밑그림 한 작품의 준비작업인데 비해 인생이란 초벌그림은 완성작 없는 밑그림 무용한 초벌그림이다.” 폴란드의 여류 시인 쉼보르스카가 ‘두 번은 없다’에서 읊었듯이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 아무런 단련 없이 죽는다. 한 번밖에 살지 못하니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고 현생과 비교해 다음 생을 수정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한없이 가벼워도 되는 것인가? 토마스의 연인 사비나는 체코를 떠나 파리에서 아무 일 없이 편안하게 산다. 그녀는 부모와 남편 사랑 조국까지 버렸지만 더 이상 배반할 것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제 그녀를 짓누르는 것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인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공허를 느끼던 그녀에게 토마스와 테레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녀를 과거와 연결해주었던 마지막 끈마저 끊어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쿤데라는 역사도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체코인들에게 역사는 한 번뿐이다. 다시 수정될 기회도 없이 어느 날 완료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가벼움은 무거움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Sunday.Joins Vol 317     박정태 굿모닝북스 대표 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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