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30> 『로빈슨 크루소』와 대니얼 디포

浮萍草 2013. 8. 30. 00:00
    마음 닫아 스스로를 가둘 텐가

    대니얼 디포(Daniel Defoe,1660~1731)
    젊은 시절 무역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투자에 실패해 여러 차례 파산했고 정치적 사
    건에 연루돼 투옥되기도 했다. 1719년에 쓴
    『로빈슨 크루소』는 영국 근대소설의 출발점
    으로 꼽힌다.
    전은 어떤 책이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나는 그냥 추억이 깃든 책이라고 답해준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작가가 무엇을 어떻게 썼느냐보다 내 기억 속에 그것이 어떤 식으로 남아 있느냐니까. 아, 그때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가슴이 얼마나 먹먹해졌는지? 벼락처럼 내 머리통을 세게 내리쳤던 이 구절은! 접혀 있는 책장(冊張)을 펼칠 때마다 기억이 새로워지는 밑줄 쳐진 문장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의 줄거리는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대충 알고 있을 텐데 무인도에서 실제로 4년 반을 살다가 구조된 알렉산더 샐커크라는 선원의 체험을 소재로 한 것이다. 대니얼 디포는 샐커크의 감상적인 이야기 대신 크루소가 겪는 내면의 동요와 끔찍한 두려움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종교적 성찰을 자세히 들려준다. 가령 처음에 무인도에서 고생하던 크루소는 신을 향해 불평을 늘어놓는다. “어떻게 신께서는 스스로 만드신 존재를 이렇게 완전히 파멸시켜 불행하게 만들고,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홀로 남게 함으로써 철저히 버리실 수가 있는가? 이런 삶에 감사를 드리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이랬던 크루소가 갑자기 양심의 목소리를 듣는다. “철면피로다! 그대가 무슨 짓을 하였는지 묻는단 말인가! 끔찍하게 낭비한 인생을 뒤돌아보고 그대가 하지 않은 일은 무엇인지 되 물어보라. 그대가 이미 오래전에 죽지 않은 이유를 물어보라.” 그렇게 해서 크루소는 외로움과 고난을 이겨내고 위안과 안정을 찾아가는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내가 초등학생 시절 50권짜리‘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가운데 제일 좋아했던 책이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무인도에서 혼자 집 짓고 사냥하고 스무 명이 넘는 식인종을 물리치고 선상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 을 제압하고 마침내 섬의 절대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다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는 모험담이 너무 재미있어서 세 번쯤은 읽었던 것 같다.
    그때 본 책은 지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지만 읽었던 기억만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절망의 섬’에서 27년을 보낸 크루소가 오래전의 자기 모습을 떠올리는 장면처럼 말이다. “내가 섬에 처음 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하던 때가 생각났다. 얼마나 힘이 없었던가. 얼마나 주변을 미친 듯 둘러보았던가. 얼마나 끔찍한 불안에 떨었던가. 맹수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대학 1학년 때 토론 모임에서 읽은『로빈슨 크루소』는 서구 제국주의의 선전물이자 교과서로 변해 있었다. 크루소는 식민지를 사유화하고 지배하는 침략자의 상징으로, 충직한 노예 프라이데이는 스스로 굴종하며 살아가는 피지배 민족의 전형으로 비춰졌다. “무엇보다 섬 전체가 내 소유였으니 통치권은 당연히 내가 가지고 있었다. 나는 절대적인 군주이자 법률을 세우는 이였다.” 1980년대의 암울했던 시대 분위기 탓이었는지 자기 반성을 통해 신앙을 되찾아가는 크루소의 성장 과정이 온통 허위와 가식으로밖에는 읽히지 않았는데 스물 나이 에는 때로 이렇게 한쪽 면만을 보기도 하는 것이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30대가 끝나가던 시절 다시 만난 크루소는 창조적 기업가 정신의 선구자였다. 자신에게 닥친 역경과 고난에 맞서 투쟁하며 자기만의 확실한 질서를 확립해 나가는 용기와 도전 아무리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는 주인공의 정신이 새삼 와 닿았다. “불행이 닥쳐도 늘 다행스러운 면이 있게 마련이며 더 끔찍한 상황에 처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생각할 수 있는 법이다. 내가 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얼마나 많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가?” 크루소는 이렇게 해서 감사하는 마음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데 그러자 사는 게 훨씬 쉬워지고 몸도 편안해진다. 게다가 온갖 사물에 대한 생각들도 모두 달라졌다. 욕심도 버리게 됐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에게 소용이 있는 만큼만 좋은 것이었다. 내게는 돈이 금화와 은화를 합쳐 36파운드 정도 있었다. 그렇게 귀찮고 한심하고 쓸모없는 물건이라니! 돈은 그저 서랍 속에 들어있었고 우기가 오면 곰팡이만 슬었다. 서랍이 다이아몬드로 가득 차 있었다 해도 별로 다를 건 없었다. 내게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전혀 가치가 없었다.” 요즘『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펼치면 유난히 구원이라는 단어가 눈에 자주 들어온다. 난파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 자체가 구원받은 것이지만 크루소는 순간순간 그의 운명을 인도하는 하늘의 섭리로부터 구원받았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구원을 받고 있는가. 의심에 빠져 이리 가야 할지 저리 가야 할지 머뭇거리는 순간에 한쪽으로 가려는 우리를 잡아 이끄는 은밀한 암시는 또 어떤가.” 우리는 무한한 세상을 눈앞에 두고도 아주 조금밖에는 보지 못한다. 마음을 열지 못하면 좁은 섬에 갇혀 살아야 하는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
    Sunday.Joins Vol 311     박정태 굿모닝북스 대표 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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