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18. 해인사

浮萍草 2013. 5. 9. 07:00
    고승의 굴욕, 대장경 살리다
    
    ㆍ‘센 놈 한 명만 팬다’ 신료들 똘똘
    비빈들 신뢰 깨려 온갖 추문 양산
    경판에 깃든 ‘학조의 수난’ 기억을
    
    <조선왕조실록>에는 ‘공공의 적’으로 등장하는 스님이 3명 있다. 
    신미와 학조, 보우가 그 주인공이다. 
    신미스님은 세종을 불교로 이끌어 이단에 현혹되게 하였고,한글 제 및 한글경전 유포에 적극 참여했다는 이유로 온갖 욕을 먹었다. 
    또 보우스님은 문정왕후를 유혹하여 승과(僧科)를 다시 시행케 하고 선교(禪敎)양종까지 부활시켰으니,국가의 기강을 흔든 대역
    죄인으로 꼽혔다.
    오늘의 주인공인 학조스님은 신미스님이나 보우스님에 비해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실록’에서는 신미스님과 보우스님 이상으로 욕을 많이 먹은 스님이다. 
    이 스님에게는 왕실 부녀자들을 미혹시켜 불사를 일으키게 하고,왕실여인들과 추문에 휩싸인 풍기문란죄가 적용되었다.
    학조스님은 당대의 최고 학승으로 널리 알려져 세조가 왕사(王師)로 추앙했던 인물이다. 
    세조의 두터운 신망을 얻어 왕실의 경찬법회에 자주 초청되었으며,유점사,봉선사,흥복사 등 왕실원당의 중창불사를 주도하였다.
    이 스님의 최고 공적은 팔만대장경을 수호한 일등공신이라는 점이다. 
    팔만대장경은 원래 강화도에 보관되다가 태조 7년 해인사로 옮겨져 보관되었다. 
    이후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비가 새고 서까래가 썩어 몇 년 지나지 않아 무너질 지경에 이르자 정희왕후는 판당의 중수를 
    위해 학조스님을 주지로 임명하고 공사를 주관하도록 했다. 
    그런데 몇 해 동안 장마와 가뭄이 연달아 겹쳐 공사를 채 시작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정희왕후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희왕후로부터 약속받은 조정의 지원이 내려지지 않자 학조스님은 결국 성종 18년(1487) 조정에 나아가 판당을 고쳐주지 않는다면 
    주지직을 사임하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이에 성종은 내수사의 물품과 공장을 보내 해인사 판당을 증.개축 하도록 하였다. 
    이후 3년에 걸쳐 해인사에서는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진행되었고,판당은 물론 해인사 전체가 전면 보수되었다. 
    이때 해인사 경내에 세조의 원당이 설치됨으로써 해인사는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왕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해인사 대장경을 간인하고, <지장경언해> <금강경삼가해언해> <천수경언해> 등 수많은 불경을 한글로 번역.출간하였다.
    이처럼 학조스님이 온갖 불사를 주도하고 왕실비빈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자,조정의 신료들은 이 스님을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고 
    똘똘 뭉쳐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상소를 올려 학조스님을 헐뜯다가 나중에는 학조스님을 구타하기까지 했다. 
    한번은 유생 정광정이 원각사에서 놀다가 학조스님의 머리를 부채로 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그럼에도 학조스님에 대한 왕실의 옹호가 계속 이어지자, 나중에는 이 스님을 둘러싼 온갖 스캔들을 제조해냈다.
    학조스님과의 스캔들에 연루된 대표적인 인물이 광평대군 부인 신씨와 영응대군 부인 송씨였다. 
    광평대군 부인은 봉은사의 전신인 견성암을 중창한 인물로,광평대군의 재를 올리기 위해 학조스님을 자주 초청하였는데,사관(史官)
    은 이를 광평대군 부인과 학조스님의 로맨스로 둔갑시켰다. 
    영응대군 부인 송씨는 학조스님이 주석하는 절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이는 스님과 대군 부인의 부적절한 관계로 기록되었다.
    실록에서 학조스님과 사통을 했다고 언급된 여인은 거의 10여명에 가깝다. 대군 부인들뿐만 아니라 비구니,사당패,사간(司諫) 구인
    문의 여동생 이름까지 거론되었고,심지어 양어머니와 사통했다는 이야기까지 쏟아져 나왔다. 
    스님이 왕의 며느리와 스캔들에 휩싸인 것도 놀랄만한 일이지만,이처럼 수많은 여인들과의 루머가 낱낱이 거론된 인물 또한 학조
    스님이 유일하다.
    학조스님이 활동하던 시기는 세조대부터 중종대까지로,사림들의 정계진출이 본격화된 시점이었다. 
    사림들은 성리학을 통해 지배권을 강화해가고자 했지만,세조와 정희왕후,인수대비,인혜대비 등 호불(護佛) 성향의 왕과 왕비들로 
    인해 대놓고 왕실불사를 반대할 수가 없었다. 
    이에 조정의 관료들은 대군 부인들의 사찰 출입을 스님과의 스캔들로 둔갑시킴으로써 이들의 불사를 막고자 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왕실에서 가장 신임이 두터운 스님을 지목해 그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한 놈만 패는’ 사림들의 집요한 덫에 걸린 첫 번째 인물이 바로 학조스님이었던 것이다.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불교신문 Vol 2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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