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한국의 기도도량

19. 삼각산 삼성암

浮萍草 2013. 4. 19. 07:00
    기도객 신심 양분 삼아 간절함의 향기 피워 올리다
    1872년 고상진 거사 창건 중부제일 독성기도 도량 나반존자 영험담으로 유명 대웅전, 독성각 쪽 벽 유리로
    삼각산 삼성암 대웅전 옆 은행나무에 노란 단풍이 들었다. 경내엔 독성기도와 관음기도가 한창이었다. 삼성암 찾는 기도객의
    원력이 만개했으리라. 노란 은행 앞세운 백의 관음보살 미소가 지긋하다.
    리는 빛보다 먼저 새벽을 열었다. 향 사르는 소리가 방안을 스쳐 지나갔다. 그윽한 향내가 퍼질 무렵, 좌복 펴는 소리가 뒤를 따랐다. 한 알 한 알, 염주 돌리는 소리와 함께 나지막이 칭명염불이 흘렀다. “나반존자, 나반존자, 나반존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꿈일까 생시일까. 빛이 세상을 찾기 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노파가 말했다. “염주를 내 던져라.” 다짜고짜 물었다. “염주를 던지면 받아 주실 건가요?” “받아 주리라.” 무릎이 너무 안 좋아 집에서 시작한 기도였다. 재작년이었다. 독성기도로 이름난 삼각산 삼성암을 찾았다. 말 듣지 않는 무릎 달래가며 삼성암에서 독성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오전 12시경 기도가 끝날 때면 독성각 나반존자를 친견했다. 무릎이 아프다며 몸부림쳐도 거르지 않았다. 돌계단 양쪽 옆 난간을 부여잡고 올랐다. ‘ 나반존자와 눈을 맞춰야 한다.’ 그 일념뿐이었다. 10월31일 삼각산 삼성암(주지 세민 스님)에서 독성기도 마친 한 노보살은 절뚝거리며 독성각을 내려왔다. 이내 관음기도가 끝나지 않은 대웅전에 들러 참배한 뒤 칠성각과 산신각,은행나무 뒤 관음보살에게도 합장하고 허리를 굽혔다. 대웅전 옆 은행나무가 노랑 웃음을 지었다. 낙엽 몇 송이 흩날리며 노보살을 배웅했다.
     
    ▲ (좌)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뒤쪽 관음보살의 자비로운 미소 못지않게 따사롭다.▲ (우) 나반존자가 모셔진 독성각. 홀로 선정
    닦는 도량이다

    삼성암 가는 길은 가을이 수놓았다. 단풍이 객을 양옆으로 맞이했다. 일주문은 단풍 품에 안겨 다소곳했다. 도량 곳곳에서 흘러나온 목탁소리는 삼각산을 장엄했다. “나반존자, 나반존자, 나반존자….”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경내엔 독성기도와 관음기도가 한창이었다. 대웅전을 호위하듯 왼쪽엔 칠성각과 산신각, 오른쪽엔 독성각이 자리했다. 대웅전 옆 은행나무에게는 가을이 노란색이었다. 단풍이 들었다. 삼성암 찾는 기도객 원력이 만개한 것이리라. 가을국화가 곳곳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고, 노란 은행 앞세운 백의 관음보살 미소는 지긋했다. 독성기도가 끝나야 독성각 나반존자를 친견할 수 있었다. 독성각 아래 독성단에서 ‘나반존자’ 칭명염불이 넘실댔다. 투명유리로 나반존자를 우러러보며 쉴 새 없이 절 올리는 기도객들 모습이 작은 유리 사이로 내비쳤다. 주름진 손은 염주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누가 될까 뒷걸음칠 쳤다. 종무소 옆 의자에서 비친 틈새 가을 햇살이 한갓지다. 고요한 틈새 햇살을 나반존자 칭명염불이 파고든다. 간혹 은행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빈틈을 메웠다. 독성각엔 영험하기로 이름난 나반존자가 모셔졌다. 오른쪽 벽면에 글귀가 매섭다. “천만가지 생각을 다 놓아버리고 오로지 독성님을 생각한다면 이것이 여래선이요 이 또한 조사선이라.” 보살 3명이 기도 중이었다. 독성단 오른쪽 귀밑 하얀 노보살이 가부좌 틀고 삼매다. 합장한 젊은 보살은 숙인 고개를 들지 않고 합장한 손이 간절하다. 108염주 돌리는 한 보살의 다문 입이 절절하다. 시간이 멈춘 듯 했다. 공양올린 초를 태우는 불빛도 미동이 없다. 취재수첩 위를 노는 펜이 내는 끼적이는 소리가 무안했다. 시침소리만 가을 중턱을 넘고 있었다. 대웅전의 기도가 멎자 새삼 산바람이 차다. 찬바람에 삼각산 나무들이 몸을 비벼댔다. 대웅전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좌우 관음, 지장보살이 협시했다.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사이엔 현재 삼존불 전 본존불이던 작은 아미타불이 있었다. 이 부처님은 한국전쟁 때 심원사(당시 철원 보개산 심원사,현 원심원사)가 불타게 되자 거기 살던 스님들이 천불전에 있던 부처 님을 업고 피난하여 모셔오게 된 것이라 한다. 삼존불 양쪽으로 아미타 천불을 봉안했고 법당 서북방향에 있는 독성각을 향해 기도할 수 있도록 투명유리를 설치한 독성단이 눈에 띄었다. 대웅전엔 등산복 입은 중년 남성이 정성스럽게 절을 공양하고 있었다. “3000번 절해도 그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면 1번 절하는 것만 못하다”는 어느 스님 말씀이 떠올랐다. 마음 다하면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을 게다. 중년은 108염주 합장한 손에 걸고 1배 1배 정성을 다했다. 일정한 속도와 고두례와 접족례가 이어졌다. 108배에 담긴 중년의 마음이 익어가자 법당 안을 맴도는 찬 공기가 자리를 내줬다. 객도 지난 시간 못 내려놓은 ‘나’를 참회하고자 108배다.
    대웅전 오른쪽 벽은 유리다.나반존자를 향한 불자의 신심이 투과할 수 있게 했다.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
    이 좌우를 협시하고 있다.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사이엔 현 삼존불 전에 본존이던 작은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고즈넉한 가을 중턱이 내려앉은 삼성암은 종일 기도의 기운이 머물렀다. 왜일까. 노보살이 아픈 무릎에도 이곳을 찾은 이유는 독성기도 영험이 입소문을 타서다. 불보살 가피가 도량 전체를 호위하고 있어서다. 1955년 봄, 3월이었다. 종로구 충신동에 사는 황명휴 거사는 앞두고 있던 한의사 시험이 걱정이었다. 50일 동안 삼성암에서 독성기도를 올렸다. 행여 제 실력 발휘하지 못할까 노심초사했다. 지극정성으로 나반존자를 부르짖었다. 기도가 끝난 뒤 기이한 꿈을 꿨다. 검은 옷 입은 동자가 나타나 “함께 가자”며 거사를 이끌었다. 큰 학교 문 앞에 다다른 동자가 2층으로 올라가면서 “따라오라”고 하자 무조건 뒤따랐다. 교실문을 열자 교단에는 선생님 같은 분이 서 있고 칠판엔 시험문제가 쓰여 있었다. 사람들이 시험을 치는 중이었다. 거사는 깜짝 놀랐다. 자신도 한의사 시험을 치러야 하는 데 벌써 시험을 치니 황망했다. 동자가 입을 뗐다. “걱정하지 말게나. 저 칠판에 있는 시험문제 중 세 번째 것을 똑똑히 잘 봐두시게.” 과연 칠판을 보니 갑, 을, 병 이렇게 세 문항이 있었고, 세 번째 문제는 소화기의 순서를 쓰고 소화기 순서를 그대로 명시하라는 질문이었다. 거사의 눈은 문제를 따라 읽었고 기억에 새겼다. 밖으로 나간 동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거사는 꿈이 하도 이상해 꿈에 본 시험문제를 적어놓았다. 평소 양의학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거사는 꿈을 떠올리며 소화기를 집중 공부했다. 1년을 두고 하루 한 번씩 소화기 순서를 위장에서부터 비장, 소장, 대장까지 그림으로 그려보기까지 했다.
    독성각 나반존자.
    이듬해, 한의사 시험장이었다. 시험관이 문제를 뜯어 칠판에 적었다. 갑, 을 두 문제는 한의학이라 별관심이 없었다. 거사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제3문제가 어떻게 나올건가. 꿈처럼 나올까, 아니면 다를까.’ 소화기는 한자로 ‘化器’다. 삼수변을 쓰고 적을 소(小)밑에 달월(月)을 밑에 적으면 한의사는 따논 당상이었다. 점 세개 찍으면 살고 아니면 끝이었다. 시험관은 점 세개부터 찍었다. 적을 소, 달월을 적고 화(化)를 이어 썼다. 가슴이 툭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거사는 제3문제까지 막힘없이 적었다. 다른 사람들은 1, 2문제는 대개 잘 썼으나 3문제는 전부 못썼다. 채대식 박사가 답안을 채점했다. 거사는 집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내내 초조했다. 태양이 어둠에게 자리를 양보하자 마음까지 그늘이 드리우는 듯 했다. 웬 자동차가 집 앞에 서더니“여기가 황명휴씨 댁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다짜고짜 자동차에 거사를 태웠다. 그는 채대식 박사 비서였다. 채 박사가 거사에게 물었다. “전국에서 한의사 시험 친 사람이 수백명인데 모두 40, 50점 정도다. 당신은 어떻게 양의학인 해부학 공부까지 했는가. 하도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청했다.”
    거사는 기도와 공부 얘기를 털어놨다. 채 박사는 감탄했다. 청도 운문사 사리암과 함께 중부 제일 독성기도도량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상서로운 일은 이뿐만 아니다. 한 법당에 2개 현판이 걸린 칠성각과 산신각에 서린 비화가 있다. 1984년 여름, 장마는 산사태를 일으켰다. 많은 물과 토사가 함께 밀려와 칠성각과 산신각이 무너질 위기를 맞았다. 놀랍게도 뿌리 채 뽑혀 내려오던 소나무 한 그루가 마치 문어가 다리로 감싸듯 줄기와 뿌리로 법당을 감싸 위기를 피했다. 신이한 광경을 본 대중들은 비가 그치자 소나무를 치우고 정성들여 3일간 산신기도를 봉행했단다. 궁금했다. 삼각산에 삼성암이 깃든 건 언제부터일까. 주차장에서 700m만 산길 오르면 다다르는 삼성암은 재가자가 창건했다. 1872년(고종 9년) 고상진 거사가 산문을 열었다. 한양 살던 박선묵 거사는 16세에 발심하고 불교에 귀의했다. 박 거사는 유성종,서윤구,고상진,이원기,장윤구,유재호 등 7인의 신도와 1870년 봄, 현재 삼성암 자리의 천태굴에서 3일 동안 독성기도했다. 정성 다해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박선문 거사가 고상진 거사에게 말을 건넸다. “이곳에 절을 지으면 참 좋겠구려.” 창건 논의는 몇 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2년 뒤인 1872년 봄, 고상진 거사가 여러 칸의 정사를 짓고 이름을 작은 절이란 뜻에서 ‘소난야(小蘭若)’로 명명했다. 창사 뒤 부근 산지를 매입해 사격을 점차 넓혔다. 10년이 지난 뒤인 1881년, 박선묵 거사가 독성각을 새로 짓고 절 이름을 삼성암으로 바꿨다.
    삼각산 단풍 품에 안긴 삼성암 일주문.

    삼성암은 몇 차례 고초도 겪었다. 1942년 7월, 그 해 여름 장맛비는 거셌다.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절이 무너졌다. 이 때 상황을 태흡 스님은 이렇게 적었다. “맑은 밤이면 부처님의 이마 위로 별들이 빛나고 비오는 때문 신중탱화에 물이 흐르니 한갓 사람들만 슬퍼할 뿐만 아니라 신들도 울었으며,산이 찡그리고 시내가 울부짖기에 이르렀다.” 지붕이 사라지고 탱화가 물어 젖어 너덜거리는 모습은 가히 가슴이 찢어졌을 게다. 안타깝게 여긴 화계사 주지 회경 스님이 중창의 뜻을 세웠다. 권선 중 김용태 거사로부터 목재를 시주받고,삼성암 중현 스님과 성섭 스님,인근 사찰 신도 도움으로 1943년 3월 대방등 12칸 을 준공했다. 1943년 3월 금화산인 태흡 스님의 ‘화계사삼성암중건기’를 지었는데 현재까지 내용이 전한다. 난초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윽한 향을 피워 올린다. 소난야(小蘭若)였던 삼성암. 홀로 묵묵히 독성기도도량으로 청청하다. 삼성암은 11월14일 오전 10시부터 12월4일까지 삼칠일 관음기도를 봉행하고 매월 정기기도를 한다. 음력 1~3일엔 신중 3일기도, 음력3~5일엔 3일 독성기도, 음력 16일은 산신기도, 음력 18일엔 지장재일법회가 이어진다. 작은 난은 간절함을 공양하는 기도객 신심을 양분 삼아 그 향을 멈추지 않으리라.
    Beopbo Vol 1169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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