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한국의 기도도량

5. 고창 도솔산 도솔암

浮萍草 2013. 3. 13. 07:00
    도솔천서 익어가는 참회, 업장을 씻어 내리다

    천마봉에서 바라본 도솔천 내원궁. 굳은 신심으로 새긴 마
    애미륵불이 천년 비바람을 견디며 내원궁을 떠받치고 있었다.
    사화는 애처롭다. 
    꽃과 잎이 평생 서로를 만나지 못한다. 
    꽃은 가을에 핀다. 
    하지만 잎은 봄에 비늘줄기 끝에서 뭉쳐나고 6~7월에 마른다. 
    꽃이 있을 땐 잎이 없고 잎이 있을 땐 꽃이 없다. 
    서로를 생각한다고 해서 상사화(相思花)다.
    상사화 꽃과 잎은 미륵불과 지장보살을 닮았다. 
    지장보살은 부처님 입멸 뒤 미륵불이 사바에 나투실 때까지 하늘과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 등 육도 중생의 성불 원력을 세웠다. 
    고통에 빠진 중생 모두가 빠짐없이 성불하기 전까진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대자대비 화신이다. 
    탐내고 화내며 어리석음에 찌든 중생들이 많은 탓에 지장보살의 
    성불이 늦어지는 건 아닐런지. 
    지장보살이 중생 모두를 성불시키는 그 날, 도솔천 미륵불이 사바에 
    나투리라. 
    고창 도솔산 도솔암은 상사화 군락지다. 
    마애미륵불과 지장보살이 함께 모셔진 기도도량이기도 하다. 
    미륵불이 머물러야 할 도솔천 내원궁에 지장보살이 상주한다.
    3월6일 도솔천이라 불리는 도솔암으로 향했다. 선운사에서 도솔길을 
    따라 나지막한 오르막을 4km 걷다 진흥굴을 만났다.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수행했다고 알려진 토굴이다. 
    잠시 발을 들이자 기도객들이 공양올린 초가 어둠을 사르고 있었다. 
    바로 옆엔 천연기념물 제354호 장사송(長沙松) 한 그루가 그 자태를 
    뽐냈다. 
    600살로 추정되는 장사송은 진흥굴 영향으로 진흥송이라고 불린다.
    도솔산 바람은 찼다. 
    낮이 길어지고 따뜻해져 겨울잠 자던 생명들이 깨어날 경칩이 무색
    했다. 
    대웅전으로 쓰이는 극락보전 앞 연등에 매달린 소원지가 나부꼈다. 
    도시에 두고왔다 믿었던 번뇌도 춤을 췄다. 
    풍경도 바람에 몸을 맡겼다. 
    도량 곳곳 감로 글귀가 눈길을 끈다. “
    모든 생각에서 나고 죽음을 버리면 그것으로써 괴로움의 끝을 
    삼으리라. 
    항상 마땅히 미묘함을 들으면 스스로 그 뜻을 깨달으리라.” 
    “아니온 듯 다녀가세요.”
    
    대웅전인 극락보전과 종무소 옆길로 오르자 나한전이 객을 맞는다. 도량 옆 용문굴에 살던 이무기가 주민들을 괴롭히자 인도에서 나한상을 모셔와 봉안했다고 한다. 이무기를 물리친 나한상치고는 익살스러운 모습이 친근하다. ㆍ마애미륵불과 지장보살 모셔진 참회도량
    도솔암 서쪽 바위 칠송대(七松臺)에 새겨진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마애불(보물 1200호)을 친견했다. 도솔암은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중생들이 기도와 수행을 통해 도솔천에 태어나길 발원하며,미륵불이 사바에 나퉈 모두를 구제해 주길 기원하는 도량으로 검단선사가 창건했다. 전해오는 얘기에 백제 위덕왕이 검단선사에게 부탁해 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했단다. 사람들은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른다. 마애불은 눈이 가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코는 우뚝 솟았다. 앞으로 내민 일자형 두툼한 입술이 참회와 번뇌, 업장소멸에 인색한 중생들에게 토라진 듯하다. 가슴에는 사각형으로 큼직하게 복장 구멍이 보였다. 배꼽에 신기한 비결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내려져왔다. 전라감사 이서구가 1890년 배꼽을 열어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소리가 들리자 두려워 도로 넣어두고 봉했다. 그 뒤 동학교도들 사이에선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이 책이 세상을 개혁할 비책이 적혀 있다! 동학교도들은 미륵불 출현을 앞세워 이 곳에서 집회도 열고 1892년 동학교도 손화중이 비결을 꺼냈다는 설도 들린다.

    세상을 바꾸는 힘이 어찌 책 한 권에 있으랴. 원효 스님은 도솔천에 왕생하는 9가지 인연을 말했었다. 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거나 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다든지,깊은 선정을 닦아야 한다. 또 경전을 수지독송하고 번뇌를 다 못 끊었더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거나 계를 수지한 뒤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 을 잊지 않아야 한다. 복업을 닦고 악을 범했어도 정성껏 참회하며 미륵 이름을 듣고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으로 예배해야 한다. 현생을 참회하고 번뇌와 업장을 소멸하는데 소홀한 어리석은 중생심이 마애불 입술을 일자로 만들었으리라. 도솔천 내원궁에 이르는 입구에 섰다. 내원궁으로 161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나갔다. 총무스님이 계단을 오르는 마음가짐을 일렀다. 현생에 지은 잘못을 하나하나 108번 참회하고 업장소멸을 발원하며 108계단을 딛으랬다. 나머지 계단은 선재동자가 53 선지식을 친견하는 심정으로 디뎌야 정갈해진 마음으로 내원궁을 참배할 수 있다고 했다. 내원궁엔 미륵불이 없었다! 미륵불 머무는 정토 내원궁엔 1m에 조금 못 미치는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었다.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280호)이다.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 중품인을 취했다. 왼손은 가슴과 배 중간쯤 법륜을 살포시 잡았다. 부처님 입멸 뒤 미륵불 출현까지 56억 7000만년 무불시대 육도 중생을 남김없이 해탈시킬 대비대원 지장보살. 무불시대를 종식 시키겠단 단단한 서원처럼 수인은 굳건했다. 그래서일까. 기도객들에게 유명한 일화 한 토막이 마음을 붙든다. 1996년 여름, 대구의 한 보살은 유방암 투병 중이었다. 그는 1분1초 다가오는 죽음을 편안히 맞고자 가족들에게 작별을 알린 뒤 도솔암을 찾았다. 100일 기도를 시작했다. 요사로 내려와 식사 하기도 쉽지 않아 끼니를 거른 채 지장보살 명호를 절절히 불렀다. 23일째 되는 밤이었다. 몸이 기도를 허락하지 않았다. 몸을 가누지 못해 쓰러지고 말았다. 문득,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차려라. 저승사자가 기다리는데 어찌 잠만 자고 있느냐?” 꿈인지 생시인지. 지장보살이 가슴 뒤쪽 등을 잠시 어루만지더니 큰 바늘로 세 번 찔렀다. 세 번째 침을 빼는 순간, 그는 잠을 깼다. 가슴 주위가 시원해짐을 느낀 그는 그 길로 요사를 뛰어내려왔다.
    도솔산에 안긴 도솔암.
    같은 시각 다른 장소, 스님들은 새벽 도량석 중이었다. 갑자기 내원궁에서 환한 빛이 하늘로 치솟았다. 대중은 화마로 알았고 큰 소란이 일었다. 정신을 수습하고 가만히 보니 붉고 푸른빛 방광이었다. 스님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벅차오르는 환희심으로 3배 예를 올렸다. 100일 기도를 회향한 보살은 씻은 듯 병이 나은 뒤 도반과 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내원궁을 참배한다고 한다. 법륜 들고 수인 맺은 내원궁 지장보살 손이 목숨을 살려냈으리라. 입술 끝에 맴도는 미소가 그윽하다. ㆍ검단선사 창건…매주 업장소멸 철야기도
    내원궁 화주로 6년째 기도 중인 대원화(59) 보살이 얘기를 끝낸 뒤 조심 스럽게 경험담을 꺼냈다. 먼저 세상을 등진 남편은 그를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굿을 해봐도 꿈자린 뒤숭숭했다. 불교 문턱엔 얼씬도 않았던 그는 도솔암을 찾았다. 도솔암서 살다시피 하며 무작정 기도를 시작했다.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또 배웠다. 3년 간 온 마음을 다해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부부 연을 맺은 뒤 저지른 온갖 업들도 참회했다. 절절한 그의 모습에 도솔암을 찾은 기도객들이 놀랄 정도였다. 고향 냇가가 꿈에 나왔다. 그는 맑은 물속 그득한 물고기를 채로 뜬 다음 다시 놓아주는 행동을 끊임 없이 반복했다. 그가 스님에게 물었다. “여러 생명 천도시켰줬다”는 답을 들었다. 그 뒤로 남편은 그의 꿈을 찾지 않았다. 연골이 닳아 허리와 다리에 매월 영양제를 맞아야 하는 증상도 사라졌다. 꿈에 나타난 한 남성이 은침으로 침을 놓았고 그 침은 허리까지 닿았다.
    내원궁에 오르는 계단이 편해졌다. 그는 “철야기도에 졸더라도 꼭 참석해 스님 염불과 목탁소리라도 듣는다” 며 “우주법계 축생 영가까지 축원하는 기도를 평생 도솔암에서 드리겠다” 고 서원했다. 화주보살 마음이 내원궁이다. 이미 미륵불이 나툰 게다. 내원궁 건너편 천마봉과 도솔산 자락 풍경이 번뇌를 씻긴다. 도솔암이 왜 도솔천이라 불리는 지 그 이유를 짐작케 했다. 도량이 도솔산 품에 폭 안겼다. 천마봉에 서서 바라본 도솔천 내원궁은 절경이었다. 굳은 신심으로 새긴 마애미륵불이 천년 비바람을 견딘 채 도솔천 내원궁을 떠받치고 있었다. 중생들은 번뇌로 인해 수천년 동안 수없이 신심이 피고 졌다. 허나 피고 지는 신심이라도 성불을 기원하는 사무친 발원은 진실할 게다. 그 신심이 천마봉 건너편 풍경 속에 담겨 있었다. 절로 합장이다.
    릴레이 자비등.

    언제쯤 마애미륵불 눈과 입술이 빙그레 웃을까. 도량을 내려오는 도솔길엔 자신이 아닌 이웃을 위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립습니다” 마음들이 주렁주렁 영글고 있었다. 릴레이 자비등이 도솔길 전부를 장엄하며 기도객을 맞을 때가 그 때 이려나. 잎이 태양 에너지를 힘껏 빨아들여 꽃을 피우고 사라지는 상사화처럼 지장보살의 기도와 미륵불의 기다림이 애처롭다. 지장보살의 중생 구제 원력이 우리네 신심을 자양분 삼아 미륵불로 피어날 그 날을 기다린다. 매주 토요일 밤 도솔암, 참회하는 마음과 업장 그리고 번뇌소멸을 바라는 지장기도가 익어간다. 4월1일부턴 생전예수재로 살아 생전 악업을 참회하고 업장을 소멸한다. 내원궁 오르는 길목에 덩그러니 걸린 글에 시선이 머문다. “과일이 익어갈 때 한꺼번에 익는 것이 아니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Beopbo Vol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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