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한국의 기도도량

4.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浮萍草 2013. 3. 10. 07:00
    선객들 사자후 어린 도량에 기도 사리 신심으로 이어져
    자장, 마지막으로 사리 봉안
    적멸보궁 뒤 수행 토굴 있어  
    사자산문 선풍 중흥 이끌며 
    한때 2000 선객 정진하기도
    적멸보궁 뒤 자장율사 수행 토굴 축대 위 연꽃 초가 가지런하다. 제 키보다 높은 축대 위로 초를 공양한 뒤 합장하는 어느 보살의
    마음도 가지런할 터다.
    리카락이 주뼛 섰다. 움츠린 피부는 온몸의 털들을 부여잡았다. 흰 머리에 달걀형 얼굴을 한 노파가 두 손을 잡아끌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식은땀이 흘렀고, 단잠은 달아났다. 꿈이었다.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만 참배하고 와서일까. 밑바닥까지 얼어붙은 신심 탓이리라. 2월22일 아침녘, 부리나케 산신각을 찾아 정성 다해 참회했다. 도량은 전각이 중요한 게 아니다. 부처님 지혜 광명이 쏟아지는 곳이라는 굳은 믿음과 우리네 신심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도량일 터다.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사자산 연화봉 중턱엔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적멸도량이 자리하고 있다.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이다. 법흥사 대문 격인 원음루에서 금강송 길을 따라 500m 정도 오르면 적멸보궁이 객을 맞이한다. 세월에 등 굽은 금강송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얼굴을 맞댔다. 금강송은 차마 하늘을 못다 가렸다. 탐심으로 우거진 우리네 마음도 진리를 향한 신심을 미처 가리지 못 하듯. 부처님 전과 객을 위한 약수터에서 가파르지 않은 131개 계단을 쉬엄쉬엄 밟아 올랐다. 여든 넘은 노보살과 굽은 허리에 지팡이를 짚은 노보살이 무릎을 부여잡고 쉬며 기어이 함께 올랐다. 노보살들은 오후 2시30분 기도 시간에 맞춰 보궁을 참배했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귀국한 자장율사는 오대산, 태백산, 영축산, 설악산 등에 사리를 봉안했다. 그 뒤 마지막으로 흥녕사(興寧寺, 현재 법흥사)를 창건, 사리를 모셨다. 보궁 뒤에는 자장이 불사리를 봉안하고 수행하던 곳이라 전해지는 토굴이 있었다. 토굴 안 평면은 입구부터 약간씩 넓어지다 중심부에서 서쪽 한 쪽만을 확장하고 원형에 가깝게 돼 있다고 한다. 내부 높이는 키 작은 사람이 겨우 설 수 있을 정도인 160cm, 너비는 190cm에 불과하다. 앞쪽에 조그마한 숨구멍만 터놓은 것 같다. 지금은 새로이 축대를 쌓아 토굴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곳에서 자장은 알몸으로 들어앉아 가시덤불을 두른 채 생사 인연 고리를 끊고자 했단다. 토굴 옆엔 부도가 하나 있는데 소재가 명확하지 않다. 그 옆엔 자장이 불사리를 모셔올 때 사리를 넣어 사자 등에 싣고 왔다는 석함 잔해가 있다. 자장은 토굴 안에 불사리를 곁에 두고 정진했다고 전해진다. 토굴 축대 위 연꽃 초가 가지런하다. 초마다 간절함으로 불을 밝혔다. 제 키보다 높은 축대 위로 초를 공양한 뒤 합장하는 어느 보살의 마음도 가지런할 게다. 화주 연화성(58) 보살이 말을 건넸다. 노보살이 직접 집에서 쪄온 옥수수와 약밥을 공양했다는 얘기다. 그 정성이 신심과 다르지 않다 했다. 뇌리에 남은 몇 해 전 얘기도 꺼냈다. 부산 사는 한 성인 남자가 78세 노모를 모시고 보궁에 왔단다. 아들은 치매에 걸렸던 노모의 대소변을 받아가며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다 노모의 청에 이끌려 보궁을 찾은 것이다. 노모는 잠깐 정신이 돌아올 때면 이렇게 되뇌었다. “사자산 법흥사 보궁을 가야하는데…….” 5대 적멸보궁 가운데 사자산만 못 가봤다고 했다. 그렇게 사자산에 오른 노모는 눈물을 흘리며 마른 입을 뗐다. “오늘 저녁 눈 감아도 한이 없겠다.”
    보궁 법좌 뒤 자장의 수행 토굴이 보인다.

    보궁 유리로 비친 사자산.

    충북 제천 어느 보살은 초하루 사시예불 때마다 꽃을 공양한단다. 3년 공양하겠다는 원력으로, 예불에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꼭 부처님에게 꽃을 공양한다 했다. 서울에 있는 아들이 부처님 자비인연을 찾도록 신심을 다하는 거라 연화성 보살은 말했다. 화주실 희견성(67) 보살은 마지를 메고 보궁에 오른다. 해마다 정월이면 한 달 간 사시예불 마지를 거르지 않았다. 올해로 3년째다. 마지가 보통 무게는 아니련만 희견성 보살은 “즐겁고 행복한 마음 뿐”이라고 했다. “부처님 공양물을 메고 십리도 너끈하다”고 웃었다. 보살은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일심으로 기도하면 그 사람과 마음이 하나임을 느낀다”고 확신했다. 한국불교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보궁 뒤로 사자산 연화봉이 펼쳐져 있었다. 사자산은 바위와 나무가 사자 머리와 갈기 모습을 하고 있어 말 그대로 사자 형상이다.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지혜의 영물 사자, 법흥사 적멸보궁은 사자산을 병풍처럼 둘렀다. 중간에는 장삼 자락을 휘날리고 있는 스님 같은 바위가 자리했다. 스님은 자장이 오로지 날짐승만 넘나드는 연화봉 벼랑에 봉안했다는 불사리를 천년 세월 넘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사자산 연화봉이 법좌에 앉은 듯 보궁 뒤쪽 유리에 비치는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전날 밤 꿈 속 산신 노파는 한 푼어치 신심으로 사자산에 든 객을 꾸짖은 게다. 1000일 기도를 회향하고 다시 1000일 기도에 입재해 1년이 지난 지금에도 보궁에서 기도 올리는 스님 얘기가 또 회초리를 든다.
    문수보살이 타는 사자형상을 닮은 사자산. 병풍처럼 보궁을 둘러싸고 있다.

    보궁이 있는 법흥사는 중국선종 중흥조인 마조 도일선사 법맥을 이은 신라 선승 도윤 철감국사 제자 징효 절중대사가 선문을 열었던 곳이다. 나말여초 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사자산문(獅子山門)이다. 신라 말 도윤 스님은 남전 보원선사에게“우리 종(宗) 법인(法印)이 동국으로 가는구나”라는 말을 듣는다. 847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도윤 스님이 절중 스님에게 법을 전했고 절중은 886년 법흥사(당시 흥녕사)에 구산선문 중 규모가 방대 했던 사자산문을 연다. 7세에 출가한 절중은 19세 때 청양 장곡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이때 마조선사 제자인 남전선사에게 법을 받고 돌아온 도윤 스님이 금강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수학했다. 정강왕과 진성여왕이 절중의 도를 흠모했으며,스님 법통을 이은 선객이 10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 때 이 곳 흥녕선원에는 수좌 2000여명이 운집해 수행했었다고 한다. 구름 같은 선객들 중 번뇌 여읜 이는 득의양양 사자산 부처님께 빙긋 미소 한 번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법흥사 대웅전으로 사용하는 극락전 옆에 징효대사 보인탑비(보물 제612호)와 부도(강원도 지정유형문화재 제72호)가 있다. 비문 기록을 살피면 고려 혜종 1년(944)에 부도비를 세웠으며 보인이라는 탑호를 받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도 흥녕선원 길을 알려주는 안내탑 3개와 수호불상이 있다. 제천시 장락과 수주면 무릉리와 주천리 3층 석탑 그리고 절중이 입적한 요선정의 마애여래좌상이다. 제천 장락동에 제1 안내탑,주천 수주면에 2, 3탑을 세웠으니 2000 선객이 정진했다는 사자산문 규모가 눈 감고도 훤히 펼쳐진다.
     
    ▲ (좌)징효 절중대사 부도. ▲ (우)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금강송 숲길

    불사리를 모시고 선풍을 드날렸지만 법흥사는 적지 않은 부침을 겪었다. 891년 흥녕선원이 소실되자 1163년 고려 의종 때 중창됐다. 조선 영조 6년(1730), 조선 정조 2년(1778), 조선 헌종 11년(1845)까지 소실과 중창을 반복하며 그 맥만 근근이 이어왔다. 그렇게 버려졌던 흥녕사를 1902년 비구니 대원각 스님이 법흥사로 이름을 바꾸고 재건했다. 허나 1912년 화마를 입었고, 현재 터로 적멸보궁을 이전해 중수한 뒤 1991년 삼보 스님이 보궁을 증축했다. 1999년 도완 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은 뒤에서야 비로소 사격을 갖췄다. “안으로 흥녕선원 사격을 되찾고 사자산문 선풍을 복원하며 밖으로 희망불씨를 피워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원력이 그 힘 이었다. 일주문부터 법운당, 원음루, 흥녕원, 심우장, 다향원, 산신각, 현심당 등 여러 불사가 이뤄졌다. 도량 곳곳에선 기도객들이 쌓은 돌탑들을 쉬이 볼 수 있었다. 세찬 산바람에도 돌탑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이리라. 분당서 산신기도를 회향코자 법흥사에 머문 어느 보살을 만났다. 해인사 백련암서 해마다 아비라기도를 하며 매일 집과 사무실에서 2시간씩 기도하는 신심 돈독한 불자였다. 기도는 오롯이 일념으로 부처님을 마음에 담는 시간이랬다. 하여 기도하는 순간만큼은 탐욕과 번뇌가 끼어들 틈이 없다고 했다. 기도가 하루를 너끈히 살아가는 힘이라 했다. 노력 없이 무엇을 바라는 마음만 가지면 기도가 아니라고 말했다. 법흥사를 나섰다. 날은 따스해졌지만 법흥계곡은 얼어붙어 있었다. 얼음을 깨고 물소리가 흘렀다. 비록 물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얼음 밑으로 물이 흐른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허나 누구나 얼음 밑 물소리에 귀 기울이진 않는다. 사자산문 선풍을 드날렸던 사자산 법흥사. 적은 숫자지만 삼삼오오 기도객들이 적멸보궁으로 향했다. 적멸보궁 가는 길 옆, 하늘 가린 금강송 가지 끝에 신심 한 자락 걸렸다. 차갑게 식어 꽁꽁 언 우리네 신심 그 아래도 맑은 물이 흐를 게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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