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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격전지 강화도 광성보

浮萍草 2012. 11. 15. 04:00
    물러간 미군을 물리쳤다고 착각… 
    5년뒤 더 악랄한 일본 침략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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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도는 한강으로 들어가는 내륙 뱃길이 시작되는 관문이다. 
    교통의 요충지였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특히 외적이 침략했을 때 왕실이 피란할 제1의 후보지였다. 
    조선 조정은 병자호란 이후 강화도의 방비를 더욱 강화해 5진과 7보, 153개의 돈대(평지보다 높은 곳에 설치한 관측소)를 설치했다. 
    섬 전체가 하나의 요새가 된 것이다. 조선시대 군사시설들은 오늘날에도 비교적 잘 남아있다. 
    그중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때 많은 전사자를 낸 격전지 광성보를 찾았다.
    ㆍ미군 3명과 바꾼 조선군 350명 목숨
    양요(洋擾)는 서양인들로 인해 일어난 난리다. 19세기 중엽 조선은 통상을 요구하는 서양 선박의 빈번한 출몰에 높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 와중에 흥선대원군은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을 지시했다. 병인년(1866년)의 박해로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해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처형됐다. 프랑스 함대가 이를 구실로 조선을 침입하는데 이를 병인양요라 한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했지만 이후 문수산성(김포)과 정족산성(강화) 전투에서 연이어 패한 뒤 한 달여 만에 물러갔다. 그들은 퇴각하면서 대량의 은괴와 서적을 약탈하고 외규장각에 불을 질렀다. 이는 서양에 대한 적개심과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천주교 박해를 이어갔다. 병인양요 5년 뒤인 신미년(1871년), 이번에는 미국 함대가 쳐들어오니 곧 신미양요다. 전장은 또 강화도였다. 미국은 대동강에 정박했던 제너럴셔먼호가 조선 군민의 공격에 불탄 것을 따지며 통상을 강요했다. 미군과의 전투는 무기가 열세였던 조선군의 참패로 끝났다. 가장 치열했던 광성보 전투에서 미군은 3명이 전사한 데 반해 조선군은 350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후 계속된 조선의 완강한 저항에 미군은 철수를 결정했다.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일어난 이 두 양요는 엄밀히 말하면 조선의 승리가 아니라 침략국의 문제로 인한 강압행위의 중단으로 끝 났다고 봐야 옳을 듯하다. 하지만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조선은 서양세력을 물리친 것으로 착각해 쇄국정책을 더 강화했다. 머지않아 더 큰 야욕을 가진 제국주의 일본에 의한 불평등조약(강화도조약·1876년)이 맺어졌다.
    ㆍ국경 없이 자유로운 철새들
    가을빛 그윽한 광성보의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바다를 향해 걸었다. 전사자들이 안장된 무덤들(신미순의총) 한쪽으로 삼삼오오 모인 참배객들이 꽃다발을 내려놓고 제를 지내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적적함을 떨어지는 노란 낙엽들이 채우는 듯했다. 용두돈대에 이르러 크게 심호흡을 해봤다. 숲길 뒤로 드러난 가을하늘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바다로 둘러싸인 돈대 주변으로 거센 물살에 싸인 손돌목이 보였다. 물결 주변의 소용돌이는 사라졌다 생겨났다를 반복하며 강화해협을 수놓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미국의 제너럴셔먼호를 흉내 내 철갑선을 만들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발달된 서양 무기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철갑선의 증기기관엔 석탄이 없어 목탄을 대신 쓰기로 했다. 배를 진수하던 날 최초의 국산 화륜선(火輪船)을 보기 위해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다. 증기기관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소리만 요란했을 뿐 선체 중량에 비해 증기력이 턱없이 모자랐던 배는 한 시간 동안 고작 열 걸음 정도밖에 나아가지 못했다. 군중의 웃음 속에 끝난 이 해프닝은 폐쇄적인 기술 개발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결국 나라를 위한 흥선대원군의 깊은 고민도 화륜선처럼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를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부지런한 철새 한 무리가 소리를 내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세상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풍경. 그 모습은 편안하고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북녘으로 멀어졌다. 이양선의 침입부터 오늘날 남북의 대립까지, 인간의 역사는 서로의 영역을 나타내는 선을 경계로 아직도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국경 없이 자유로운 철새들의 날갯짓이 한없이 부럽게만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새들이 멀리 사라진 가을의 강화 하늘을 한동안 올려다보았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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