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일본 조계지엔 강대국 각축의 그림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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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인천 연안부두 입구에 있던 ‘인천개항100주년기념탑’이 철거됐다.
인천 개항 100주년인 1983년 세워진 이 탑은 높이 33m, 길이 9m의 거대한 석조물이었다.
선박과 문(門)을 형상화했으며 인천항이 근대의 관문 구실을 한 것을 상징했다.
인천시는 기념탑의 철거 이유로 교통 흐름에 방해가 된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그전부터 일본에 의한 인천 강제 개항이 과연 기념할 만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계속 제기해 오던 터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앞으로도 인천 개항을 기념하는 탑은 다시 세워질 기미가 없어 보인다.
ㆍ 청나라와 일본의 치외법권 지역
구한말 이후 인천의 역사는 항상 개항이란 단어와 맞물려 왔다.
인천은 개항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조선 최대의 국제도시로 변모해 갔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이 도시에 발을 붙인 각국의 이방인들은 ‘조계(租界)’란 자치구역을 만들어 생활했다.
조계에선 외국인이 자유로이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강대국들의 ‘시험장’ 같았다고나 할까.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당연히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
중국(청나라)과 일본의 조계지였다.
나는 종일 그 두 나라의 조계지가 있던 곳을 둘러보며 스케치를 했다.
청나라 조계지 자리의 차이나타운과 일본 조계지가 남긴 근대 건축물들 그 사이에는 두 조계지의 경계 역할을 했던 계단이 있다.
계단 맨 위에 앉아 스케치여행을 마무리하며 인천항의 모습을 담았다.
첨단 건축의 총아인 인천대교와 송도의 동북아트레이드타워가 멀리 보였다.
내항 근처에선 오랜 역사를 간직한 섬, 월미도(이젠 간척으로 섬이 아닌 공원이 되었지만)가 눈에 들어왔다.
부두에선 거대한 초록색 크레인들이 현재의 살아 있는 인천항을 말해주려는 듯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ㆍ 장미밭처럼 붉은 노을
그때 묘하게도 풍경에 어우러져 저녁 바람을 흔드는 현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에 이끌려 가보니 근처 카페 앞에서 한 남자가 악기를 연주하며 열창을 하고 있다.
그는 카페 ‘낙타사막’의 주인 오혁재 씨.
악기는 우쿨렐레였다.
인천 태생 김정희 시인이 지은 시에 자신이 곡을 붙인 노래라며 노랫말인 ‘꽃밭에서’란 시를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면 시 속의 ‘소사’는 인천이 아닌 부천에 있다.)
삼십여 년 전
소사 심곡동 장미밭 고랑에는
물지게 진 노인이
한 장미처럼 피어서는
벌판 끄트머리
물집 같은 외딴방 쪽으로 흘러가서는
신기루가 되었는데
카페 한쪽에는 인천을 다룬 책이 즐비했다.
그는 그중 한 권을 뽑더니 카페 문 앞 계단참에 서서 인천항을 바라보며 바뀐 모습들을 설명해 주었다.
“뭐, 이제 남은 것은 길들뿐이군요!”
커피를 마시고, 여러 이야기를 나눈 후 그림을 그리던 계단 꼭대기로 돌아왔다.
물론 그림은 아직 미완성이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며 저녁을 알리고 있었다.
노을빛은 노랫말 속의 장미밭처럼 붉고 사랑스러웠다.
여름이 끝나가는 걸까.
저녁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들었다.
들려오는 음악에 빠져 있던 나의 그림도 좀처럼 완성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스케치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만히 턱을 괴고 음악을 감상했다.
하늘에 펼쳐져 있던 장밋빛은 짙은 파란색이 섞인 검붉은 어둠으로 변해갔다.
물지게를 진 노인이 장미밭을 지나 서서히 페이드아웃 되며 희미해져 갈 무렵, 그 아래 인천항의 야경이 신기루처럼 모습을 드러
냈다.
옛날 월미도 앞의 그렇게 드넓었다는 갈대밭에서부터, 개항을 즈음해 나타난 낯선 외국 배들과 상륙작전의 무수한 포화, 그리고
현대 도시의 다리와 빌딩들까지….
이 언덕은 그중 어떤 기억을 간직하고 싶어 할까.
한 세기 전의 개항이 어떠했든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인천항은 그저 아름답고 아련한 모습으로, 조용히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자료 협조=인천문화재단 이승욱 씨
■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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