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종교

십자가는 상징인가 주물숭배물인가 / 김경재

浮萍草 2011. 5. 5. 23:12
자가는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상징으로서 2000년 동안 자리매김해왔다. 
미래에도 변함없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도심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교회당의 십자가 조명등이 ‘수면권’ 
침해라고 항의하는 민원 발생의 빌미가 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행정기관의 옥외광고물관리법 시행령 개정 과정에서 종교적 조명상징물을 
합법화한 일에 특정 종파의 압박성 로비활동이 있던 것으로 보도되는 형국이다.
(<한겨레> 5월2일치 11면) 
경북 문경 둔덕산에서는 십자가 처형 형태로 시신이 매달린 엽기적 사건이 발생하여 
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다. 
십자가의 본래적 상징성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증거다.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통치수단적 형법 규정에 있어서 반제국적 정치범과 특별한 
흉악범에게 가하는 가장 가혹하고 수치스런 사형 집행 형식이었다. 
당시 유대 사회를 통치하던 로마총독 빌라도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협박과 포퓰리즘에 
몰려 예수를 십자처형 방식으로 죽였다. 정의·자유·평등·사랑이 지배하는 공동체를 실현
하려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예수의 처형과 더불어 끝날 줄 예상했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매우 역설적으로 심원하게 받아
들였고 그것은 바로 우주적 보편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 탄생의 직접 동인이 된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십자가’는 자기 비움,자기희생, 비폭력적 저항과 진실의 관철, 
그리고 무엇보다도 화해와 사랑의 상징이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임당함은 그가 약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약해지고 낮아져서 하늘의 거룩한 뜻을 이루려 함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그리스도교가 정치권력과 야합하면서 십자가의 상징성은 점점 본래의 의미를 잃고 정복과 지배와 통치의 
‘십자군’ 군기의 표지로 변해갔다. 
자기 비움과 겸비, 그리고 봉사와 평화의 상징 기능은 증발해 버리고 정반대로 자기과시와 공격적 힘의 상징물로 변질해갔다. 
더 나아가서,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나 광신적 신도들에게는 ‘십자가 형태물’ 자체가 주물적(呪物的) 능력이 있다고 맹신하는 
물신숭배적 모습까지 보인다. 
종교사에서 물신숭배 형태의 ‘페티시즘’이란 원시종교 집단에서 흔히 보듯이 나뭇조각이나 뼛조각 등 특정 물건 자체 안에 주술적 
힘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맹목적 신앙을 말한다. 
밤하늘에 빨간 전광 십자가를 고집하는 많은 한국 개신교 목회자들과 교인들 속에서 주물신앙의 퇴행적 형태로 전락할 위험의 
단초를 간파하는 것은 필자만의 지나친 기우일까? 
세상 사람들은 붉은 페인트나 붉은 전광판의 색상 효과가 아닌 진실한 산 생명의 ‘사랑과 화해의 피’를 보기 원한다. 
밤에 도심을 붉게 밝히는 전광판 십자가를 바라볼 때나 붉은 페인트를 칠한 십자가를 들고 거리행진을 하는 전도단을 목도할 경우, 
그것들에 의해 종교적 감동을 받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도리어 시민적 공공의식이나 공동체 윤리를 무시하는 안하무인적인 한국 개신교의 오만과 폭력적 종교 광기성을 읽는다. 
교회 야광조명등 십자가는 주민의 거부감이 발생하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교회 건물 안팎에서 본래적 상징으로서 사용되는 경우일지라도 신중하게 때와 장소에 따라 바르게 사용되도록 절제되어야 한다. 
진주·보석이 아무리 귀중한 물건일지라도 졸부가 절제 없이 몸치장에 도를 넘치게 사용하면 품위를 떨어뜨리는 역효과가 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마음 밖에 세우는 십자가를 마음속에 세우는 일대 종교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본래 참종교의 계명과 핵심 상징은 돌판이나 나무판에 기록하지 않고 마음판(心碑)에 새기는 법이기 때문이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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