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M T = ♣ /한국불교미술사의 난제들

5. 일본 아스카 대불 진위 논란

浮萍草 2016. 3. 15. 10:30
    화재 후 복원된 작품일까, 아니면 신이의 증거일까?
     
    ▲ (左)일본 아스카의 안고인에 봉안된 아스카 대불.원작은 606년이지만,1196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복원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右)아스카 대불의 복원상상도.
    원래의 부분으로 간주되는 얼굴과 손, 발 일부만 진하게 표현되어 있다. 일광삼존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 아스카의 안고인(安居院)은 ‘아스카데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절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서 원래는 호코지(法興寺)라는 이름으로 596년에 창건되었다. 이 절을 세운 사람은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라는 당시의 대신으로,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쇼토쿠 태자(聖德太子)를 도와 친백제 정책 및 불교 중흥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실제 호코지의 창건에도 백제의 기술이 깊숙이 관여하였음을 ‘일본서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588년 백제의 위덕왕은 불사리(佛舍利)와 함께 혜총(慧聰)을 비롯한 여섯 명의 승려와 사공(寺工) 태량미태(太良未太)와 문가고자(文賈古子), 노반 박사(鑪盤博士)인 장덕백매순(將德白昧淳), 와박사(瓦博士)인 마나문노(麻奈文奴),양귀문(陽貴文),능귀문(㥄貴文),석마제미(昔麻帝彌) 등 네 사람,그리고 화공(畵工) 백가를 파견하여 일본 최초의 사찰 건립을 도왔다. 사찰이 완공된 뒤 불탑에 사리를 봉안하는 의식에서는 참석자들이 모두 백제의 옷을 입고 모였다고 하니 당시 일본에서는 백제의 옷이 지금으로 말하자면 턱시도와 같은 최고의 격식을 갖춘 복장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596년 창건한 일본 최초 사찰 호코지 대불 605∼606년 조성 백제의 장인 사마지리가 제작
    1196년 화재 발생해 사찰 전소 현재 대불의 진위 놓고 논란도
    대부분 후대 복원 추정됐으나 최근 조사서 사실상 원형 결론 이제 학계도 아스카대불 품어야

    절이 완공된 뒤에는 백제의 승려 혜총(慧聰)과 고구려의 승려 혜자(慧慈)가 주석하며 불교를 가르쳤다고 하는데,어떤 연유로 고구려의 승려가 이 백제 분위기의 호코지에 관여하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혜자는 595년에 일본에 건너가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있었고 또 혜총과 함께 삼론학을 가르쳤다고 하므로 쇼토쿠 태자 및 삼론종이라는 맥락에서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삼국시대에는 정치적 갈등 속에서도 불교계의 승려들은 서로 교류하며 긴장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나아가 일본과 같은 제3국에서는 정치적 문제를 떠나 상호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다. 여하간 현재는 아스카데라로 불리는 이 호코지에 가보면 나이 지긋한 자원봉사자 분이 바로 이 아스카데라가 일본 불교사찰의 시초임을 설명하면서 한반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임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우리와 일본의 문화교류를 긍정적 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아스카데라의 가람배치 추정도. 탑을 중심으로 법당이 품(品)자형으로 둘러서는 것은 고구려식 가람배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호코지는 1196년 벼락을 맞아 모두 불타버렸다. 그리고 아스카 시대의 것으로서 현재 남아있는 것은 추고천황의 명에 의해 605년에 시작하여 606년 석가탄신일에 맞춰 제작된 ‘아스카 대불(飛鳥大佛)’이다. 청동좌상인 이 대불은 높이 2.7m, 무게 15톤 가량의 장육불상인데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은 구라츠쿠리노도리(鞍作鳥) 불사(佛師) 혹은 사마지리(司馬止利)로도 불리는 백제 출신의 장인이 만들었다고 한다. 결국 우리나라에도 남아있지 않은 삼국시대의 대형 청동불상 사례가 일본에 남아있는 셈이다. 구라츠쿠리노도리는 다음에 살펴볼 호류지 금당의 석가삼존상을 만든 장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장인들의 이름이 사서에 등장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일본에서는 장인들의 이름까지 꼼꼼히 기록하고 있으니,일본 문화가 장인들을 존중 하는 전통을 지닌 것이기도 하고 또한 백제의 장인들에 대한 보다 각별한 배려일 수도 있겠다. 불상을 만들 때의 일화도 전한다. 불상이 완성되자 그 다음으로는 금당 안으로 옮기는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불상이 너무 커서 금당의 일부를 허물지 않고는 들여오기 어려웠다. 그러나 구라츠쿠리노도리가 묘안을 내어 금당을 허물지 않고도 안으로 옮겨와 봉안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를 보면 대형불상의 조성은 단지 불상의 주조 문제만이 아니라 그것을 옮기고 세우고,자리를 잡는 문제 등을 전반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숙달된 장인만이 할 수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Vol 1334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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