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잊혀진 유라시아 이야기

10 '김태희가 밭을 간다'는 우즈베크의 여성이 유난히 예쁜 이유?

浮萍草 2015. 7. 18. 11:19
    ▲  티무르 동상. /조선일보 DB
    국의“유라시아 이니셔티브”,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시대를 맞이하여 유라시아 투르크(Turk)국가 들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왠지 유라시아 대륙은 미지의 땅이자 미개척지인 것처럼 들리고 있다. 적어도 한국인들에게만큼은 그렇게 심리적 거리가 멀게 여겨지는 것 같다. 미국의 시인 에드거 앨런 포의 처녀작으로 《테머레인과 기타 시(Tamerlane and Other poems)》(1827)가 있다. ‘테머레인’은 투르크 족의 정복자“절름발이 티무르”를 영어식으로 옮긴 말이다. 투르크족은 몽골족과 더불어 지난 3000년 동안 48번이나 세계적 제국을 건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국의 건설’은 세계화의 고전적 방식이다. 물론 48번의 제국을 세운 정복자 중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칭기즈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방세계에서는“절름발이 티무르” 테머레인의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연극무대에 올려지거나 문학 작품화되어 있을 정도로 대중성을 띠고 있다. 그들에게 정복자 “절름발이 티무르”는 다양한 스토리텔링의 소재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극작가 니콜라스 로우는 희곡《테머레인》(1702)을 썼고,헨델은 그 희곡을 바탕으로 오페라 《타메르라노(Tamerlano)》를 작곡했다. 결과적으로 티무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잘 알려진 “세계화된” 인물이다. 20세기 서방세계에서 칭기즈칸이 조명받았던 것은 냉전시절 구소련에 대한 심리전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칭기즈칸이 280년간 러시아를 정복했던“악몽”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깔렸었던 것이다. 반면 몽골을 비롯한 구소련권에서는 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지 칭기즈칸은 그저 부랑배 정도로만 알려 졌을 뿐이었다.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칭기즈칸이 몽골에서 복권된 것은 불과 25년 전의 일이다. 방대한 티무르 제국을 건설했던 정복자“절름발이 티무르”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가축도둑 출신이라는 설,투르크족이라는 설,몽골족이라는 설 등 다양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거시적 안목, 야망, 통찰력 그리고 용맹함을 무기로 곧 부족의 족장이 된다. 그러자 티무르는 소수의 군대로 차가타이 한국을 전복시키고 세계를 정복할 꿈을 꾼다. 그는 정복자의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칭기즈칸의 혈통이 흐르는 죽은 적장의 아내 비비한음을 자신의 본부인으로 맞이한다.
    티무르는 비비한음을 끔찍이 사랑했기 때문에 잔혹한 정복자와 사랑이라는 낭만적 테마가 자주 문학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티무르는 지금의 사마르칸트를 거점으로 당시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던 황금한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했고, 러시아, 조지아, 인도, 시리아, 터키까지 침공한다. 우리의 고려여인들이 몽골로 끌려갔듯이, 수천 명의 여인이 티무르의 포로로 잡혀오기도 했다. 패전의 가장 큰 희생자는 역시 여성이다. 우즈베키스탄 여성들이 유난히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에 부분적으로는 정복의 역사도 한몫을 담당하였다. 정복지에서 데려온 가장 아름다운 여성들은 우즈베크 여성들에게 당연히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주었을 것이다.
    Premium Chosun        오은경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euphra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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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무르의 부인 비비한음이 건축가와 키스한 이유
    인하고 끔찍하지 않으면 정복자가 될 수 없을까. 바그다드에서 티무르는 9만 명의 주민들을 참수해 해골로 탑을 세우기도 하고,시바와 터키에서 항복하는 자들에게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해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나서 투항한 3천명의 포로들을 산 채로 매장시키기도 했다.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바자제트를 포로로 잡아 동물 우리에 가두기도 하고 그의 아내들은 발가벗겨서 모든 이들에게 음식과 술시중을 들게 하는 등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모욕을 주기도 했다.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티무르는 자비심이 없었다. 단지 말을 타고 전투를 하는 데에만 몰입했다. 미국 역사학자 저스틴 모로치(Justin Morozzi)의 저서 《테머레인: 이슬람의 칼, 세계의 정복자》 (2004)에 따르면 티무르는 수백만 명을 살육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만 집행했다. 그는 이슬람교도였다. 기독교도들과 힌두교도들을 정벌할 때는 올바른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라고 합리화했으며,같은 이슬람교도교도를 공격하고 학살할 때는 그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중앙아시아 전체와 터키, 인도까지 점령을 마친 그는 중국의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 지금의 카자흐스탄 땅에서 심한 감기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회군을 하게 되는데 69세의 나이에 사망하기에 이른다. 잔인하고 포악한 정복자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티무르는 예술과 학문을 사랑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실크로드의 중심지이며 세계적 관광 명소로 자리 잡은 도시 사마르칸트이다. 사마르칸트는 세계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문화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티무르의 작품이다. 사마르칸트는 티무르가 얼마나 세계화의 달인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국제화된 도시였다. 사마르칸트 도시에 스페인에나 있는 도시 ‘마드리드’라는 지명이 있을 정도였다. 정복자와 세계화의 달인이었던 그는 원정 지역마다 아내를 두었다. 아내만 총 18명이었다. 그중 수도인 사마르칸트에 거주하는 본부인 비비한음은 남편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고 있었다. 티무르와 부안 비비한음의 사랑이야기는 아름다운 비비한음 모스크와 얽혀 한층 안타까움을 더한다. 현명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비비한음은 남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남편이 인도 정벌을 마치고 오기 전까지 사마르칸트에 대리석과 푸른 옥으로 가장 아름다운 사원을 짓기로 결심하고 당시 최고의 건축가를 초청한다. 하지만 젊은 건축가는 60세가 넘은 비비한음에 반해서 티무르가 인도 원정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마무리하려면 자신에게 키스를 허용해주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현명한 비비한음은 하렘에 있는 다른 여성들과 사랑을 나누도록 해주겠다고 역제안하며 회유한다. 여성들은 계란에 색칠을 입힌 것처럼 색을 벗겨 내면 모두 똑같은 존재라고 달랜다. 그러나 건축가는 무색무취의 술이 들어간 잔과 물이 들어 있는 잔을 비유하며 겉으론 똑같지만 자기는 술이 들어 있는 잔처럼 사랑이 끓어오르고 있다며 막무가내로 버틴다. 남편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에서 비비한음은 그녀의 뺨에 키스를 단 한 번 허용한다. 그러자 젊은 건축가는 그녀에게 너무나 뜨겁게 키스를 한 나머지 그녀의 뺨에 붉은 반점을 남기고 말았다. 며칠 후 원정에서 돌아온 티무르는 비비한음의 뺨을 보고 진노를 하여 그 건축가를 붙잡으러 사람을 보냈지만 건축가는 막다른 옥상으로 도망갔다가 거기서 날개를 달고 도망갔다고 전해진다. 비비한음이 티무르에게 헌정한 건축물은 그녀만큼이나 아름다운 자태로 복원되어 지금도 사마르칸트를 장식하고 있다.
    ▲  구미에미르 유적.

    티무르가 잔혹한 정복자임에도 서방에서 그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십자군 전쟁의 참전 멤버인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서 오스만 투르크가 서쪽으로 침공해 들어올 수 있는 동력을 차단해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티무르가 사망하고 나서야 오토만 터키는 이 지구상에서 그리스라는 나라를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었다(1460-1830). 이때 티무르는 유럽의 여러 나라와 교류를 했다. 스페인은 두 명의 대사를 티무르 제국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그중 헨리 3세가 파견한 루이 곤살레스 클라비호는 1403년 티무르에게 오스만 투르크를 동쪽에서 협공해줄 것을 약속받는다. 그리고 루이 곤살레스 클라비호는 티무르에 관한 글을 일기 식으로 기술하여 서방세계에 투르크 정복자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다. 결과적으로 티무르는 서방세계로서는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기에 그의 잔혹함은 위대한 정복자의 이름 뒤로 사라져 버렸다. 역시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도 승리한 나폴레옹을 우리는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1941년 구소련의 고고학자 게라시모프는 검은 옥 덮개와 육중한 철관에 눕혀져 있는 티무르의 시신을 분석했다. 1미터 72센티의 시신에서 절름발이의 흔적을 확인했고 69세의 나이였지만 50대 초의 강골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입증해냈다. 600년 전에 그 나름대로 세계화를 달성했던 유라시아 투르크의 정복자 티무르가 보다 장수했다면 명나라의 운명과 그리스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고 세계사가 새로 쓰였을 것이다. 세계화는 영토 확장과 제국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90년대 이후 세계화의 의미 또한 그 의미가 완전히 변화되었다. 세계화의 출발과 시작은 정복자의 정복 전쟁에서 비롯되었고 피의 전쟁을 불사한 것이었다. 오늘날 경제적 의미의 시장 확장과 문화 다양성에로의 개방은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 우리에게는 아직 ‘정복자‘라는 명칭도, 유라시아도 낯설게 들릴 뿐이다.
    Premium Chosun        오은경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euphra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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