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교류 2000년새로운 이웃을 향해

1 日에 벼농사를 가르치다

浮萍草 2015. 7. 15. 15:58
    시리즈를 시작하며
    4세기 백제가 日에 전한 칠지도엔 형제국의 숨결이…
    ▲  칠지도 보러 온 日관람객들 2월 일본 후쿠오카 규슈국립박물관이 개관 10주년 특별전으로 연‘고대 일본과 백제의 교류’전에 모인 일본인들. 중년의 관람객
    들이 백제와 왜의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인 칠지도 앞에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일본 국보 중 국보로 평가받는 칠지도는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신궁에서 빌려왔다고 박물관 측은 전했다.후쿠오카=허문명 국제부장 angelhuh@donga.com

    《 올 2월 23일 일본 후쿠오카(福岡) 다자이후(太宰府)에 있는 국립규슈박물관 1층 전시장은 관람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조용히 줄을 지어 관람하던 일본인들은 유물 앞에 서서 한동안 뚫어지게 보거나 뭔가를 열심히 적는 등 매우 진지한 모습이었다. 관람객들은 대부분 50대 이상 중년들이었다. 전시를 보기 위해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금융회사에서 일하다 은퇴했다는 기시모토 씨(65)는“도쿄에서 5시간 신칸센 기차를 타고 왔다. 평소 일본 고대문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신문에 난 전시 소식을 듣고 짬을 내 왔다”고 했다. 올해로 개관 10년째를 맞는 규슈박물관은 후쿠오카 시에서도 차로 30여 분 가야 닿는 비교적 외곽에 있지만 규모와 건물 디자인 면에서 동서양의 미학을 제대로 살린 건축물이라는 평을 듣는 곳이다. 연 평균 관람객이 10여만 명에 달할 정도로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는 공간이지만 그중에서도 이번 전시가 2개월 (2~3월) 동안 무려 5만 명을 불러 모을 정도로 각별한 주목을 받았던 것은‘고대 일본과 백제의 교류’라는 제목을 내건 특별전 때문이었다. 일본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에 가보면 문화 전파를 언급할 때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두루뭉술하게 표현되어 있기 일쑤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제목에서부터 아예‘백제’를 내걸고 일본과의 문화 교류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 (左)우리에게도 친숙한 반가사유상을 내걸고 ‘고대 일본과 백제의 교류’를 소개한 전시장 입구. ▲ (右)2001년 日王 “일본인에게 백제인의 피가 흐른다”
    한일 월드컵을 한 해 앞둔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일왕이 68세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속일본기에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왕의 자손이었다
    는 기록이 있다”고 말한 것을 제목으로 뽑은 석간 아사히신문 23일자 1면.출처 아사히신문PDF

    제로 둘러본 전시장 곳곳에 걸린 시대별 유물을 설명하는 글들에서는 백제인에 대한 존경과 헌사의 내용들로 가득했다.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백제가 왜(倭)와 연합군이 되어 신라와 중국에 맞서 전쟁을 치른 ‘백천강’ 전투를 조명하면서 두 나라가 혈맹(血盟)이었음을 강조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은 파격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다. ‘신라와 중국 당나라(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660년 백제가 패하자 백제 유민들은 너도나도 규슈로 왔고 3년 뒤 유민들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나자 왜와 손을 잡았다. 663년 백제와 왜 연합군은 백제왕조 복원을 위해 백천강(지금의 금강 하구) 전투에서 나당연합군과 싸우지만 대패한다.’ ‘백천강 전투’는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한일 고대 사학계에서는 익히 알려진 사건이다. 한반도에 고대 국가가 만들어진 330년부터 백제·고구려가 잇따라 망하는 660년대까지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는 적으로 싸웠지만 왜에게는 문명을 전해주고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백천강 전투 때 왜군들은 무려 3만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가 대부분 희생됐다. 전시를 기획한 구스이 다카시 전시과장은 “전투 후 신라와 중국이 쳐들어올 것을 우려한 일본인들은 백제의 병법과 건축 기술을 활용해 미즈키(水城), 오노조 (大野城), 기이조(基肄城) 세 성을 쌓았는데 ‘일본서기’는 이 건축물들에 ‘백제에서 망명한 관료들이 관련돼 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며 “백제인들은 고대 일본이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 깊게 관여한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전시에는 백제와 고대 일본의 문화 교류를 상징하는 토기,장식품,기와,불상 등이 공개됐는데 이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이 백제 칼 ‘칠지도(七支刀)’였다. 일본 국보로 지정된 ‘칠지도’는 고대 일본의 수도였던 나라(奈良) 현 덴리(天理) 시 이소노카미(石上) 신궁에 보관된 것으로 일본인들에게조차 잘 공개되지 않는 국보 중의 국보로 통한다. 비록 일주일 한정이긴 했지만 이번 전시에서 진품이 공개되자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한국인들까지 관람을 했다고 박물관 측은 밝혔다. 전시를 보고 나오며 기자는 박물관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금으로부터 1350년 전 이곳 규슈로 이주한 백제인들을 떠올리며 전시를 기획했다”고 했던 말이 귀에 생생했다. 작금의 한일 관계는 매우 답답한 형국이다. 뭔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이에 본 시리즈는 다음 두 가지 시각으로 기획되었다. 첫째, 위안부문제 독도문제 등 현안도 중요하지만 동아시아 문명사의 전래와 확장이라는 역사적 시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 문명사는 북에서 남으로, 바이칼 황하 등 물에서 육지로,기마민족에서 농경민족으로 확산되어 왔다. 우리 선조들이 수렵과 어업이 주축이던 일본에 벼 농사와 문명을 전파하고 진출한 것은 어쩌면 역사의 필연에 가까운 것이었다. 둘째,지금 이 시점에서 한일 관계는 양국의 평화와 더불어 지구촌 공영에 공동 기여 한다는 미래지향적 시각이 중요하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역사를 잘 가르쳐 미래의 주역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 한일 두 나라 관계가 단순한 일방적 교류나 식민 피지배 시기로만 한정되는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오랜 시공간적 시간으로 보면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동질적인 문명적 복합체 성격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고 본다. 차제에 한일 젊은이들이 미래에 함께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한일 간의 2000년 교류 역사 속에서 재발견해야 하는 이유이다. 한편 이 대목에서 일본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피 속에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한국과 일본인들이 서로를 더 잘아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있으니 다름 아닌 아키히토 일왕이었다.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1년 앞둔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일왕은 68세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일본 고대문화 전성기 헤이안 시대를 연 왕)의 생모(生母)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 했었다. 이어 “두 나라는 한층 더 서로의 과거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노력하고,개개인으로서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일왕의 이 말은 같은 날 아사히신문 석간 1면과 4면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2015년 한일 수교 50주년이라는 뜻 깊은 해를 맞았지만 한일관계는 그때보다 오히려 후퇴했다는 느낌이다. 옛 조상들의 흔적을 살피며 과거 고대로부터 이어진 두 나라의 인연을 되살려 새로운 이웃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제 우리 두 나라 후손들에게 남겨진 몫이다.
    ㆍ칠지도
    쇠로 된 긴 몸체에 좌우 여섯 가지가 엇갈려 배열돼 몸체와 함께 모두 7개의 가지를 가진 칼(刀)이라는 뜻. 몸체에 백제왕이 왜왕에게 전한 외교 문서가 담겨 있다.
    Donga        후쿠오카=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장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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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지명 ‘韓津’ 쓰던 가라쓰, 日엔 없던 볍씨-석검 고스란히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큰 그림 보기가 가능합니다
    국과 더불어 수천 년 동안 자포니카(단립종) 쌀을 주식으로 먹고 살아 온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 둥근 모양의 자포니카 쌀은 밥을 지으면 차진 것이 특징으로 동남아에서 생산되는 길고 점성이 없는 인디카(장립종) 쌀과 밥맛이 확연히 다르다. 일본의 논농사는 2500∼2600년 전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 유적이 있는 곳은 규슈(九州)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이다. 가라쓰 시는 규슈의 최대 도시 후쿠오카(福岡)에서 서남쪽으로 약 40km 떨어져 있다. 인구는 약 13만 명. 후쿠오카 공항에서 내려 JR 지쿠히(筑肥)선을 타고 환승 없이 1시간 만에 닿을 수 있었다. 가라쓰는 부산까지의 거리가 약 180km로 일본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다. 가라쓰의 ‘가라’는 일본말로 ‘외국’이란 뜻으로 본래는 한국을 의미한다는 게 일본 학계의 정설이다. 현재 가라쓰를 표기하는 한자 ‘唐津’은 옛날에는 ‘한진(韓津)’이라고 쓰고 가라쓰라고 불렀는데 이후 당나라와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韓’ 자만 ‘唐’으로 바뀌었다고 일본 고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 요인 때문에 가라쓰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와의 교류가 활발했다. 훗날 조선 도자기가 처음 전해진 곳도,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 병력을 집결시켰던 히젠 나고야 성도 이곳에 있다. 이런 지역에서 일본 최초의 벼농사 유적이 발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유적이 발견된 가라쓰 나바타케에는 ‘마쓰로칸(末盧館)’이라는 이름의 벼농사 박물관이 있다. 기원전 가라쓰 지역에 존재했다는 마쓰로(末盧)란 원시 국가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마쓰로칸은 가라쓰 시내를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자락 안에 있었다. 가라쓰 역에서 걸어서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일본식 주택들이 늘어서 있는 동네에 높은 통나무 울타리로 가려져 있어 대문에 ‘마쓰로칸’이란 표지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치기 쉬웠다. 현장에 와 보면 왜 옛날 사람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뒤에는 울창한 산이 있고, 1km 정도 평지를 사이에 두고 바다가 있다. 수렵과 채집, 어업이 가능한 데다 산골짜기로 흘러내려오는 물을 이용해 논농사를 짓기엔 최적의 장소로 보였다. 다지마 류타(田島龍太) 마쓰로칸 관장의 안내를 받으며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일요일인데도 찾아오는 관람객은 한 명도 없었다. 마쓰로칸은 땅에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고상식(高床式) 형태의 특이한 2층 목조 건물이다. 고상식 가옥은 맹수나 독충을 피하고 장마철 습기를 최소화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신석기시대 동굴을 벗어난 원시인들의 대표적 주거 형태이다. 나바타케 유적에서도 고상식 가옥 흔적으로 보이는 나무 말뚝이 2개 발견됐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입구에 이 일대에서 발굴된 검은색 탄화미(炭化米)를 확대경으로 볼 수 있게 전시해 놓았다. 나바타케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미는 기원전 600년경 재배된 것으로 분석됐다. 주요 전시물은 2층에 있었다. 2층 중앙에는 조몬시대(기원전 1만3000년∼기원전 300년) 말기 이 지역에 존재했던 마을을 상상으로 복원해 만든 큰 모형이 놓여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벼농사와 수렵, 축산업,어업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때 이미 제사를 지내는 풍습도 있었다. 마쓰로칸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면 한반도 고유 문명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발굴된 독 항아리 사발 굽접시 등은 토기의 주둥이 부분에 검은 반점이 있거나 소뿔형 손잡이로 마무리한 점이 눈에 띈다. 이는 한반도와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공통적으로 발굴되는 유물의 특징이다. 홈자귀라고 불리는 돌도끼나 손잡이 부분을 깊게 판 마제석검, 버들잎 모양의 석촉 등 한반도에서 고유하게 발굴되는 석기들도 이곳에서 나왔다. 다지마 관장은 석검 하나를 가리키며 “이것을 만든 재질의 돌은 일본에 없으니 한반도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마쓰로칸을 둘러보면 일본의 농경문화는 한반도에서 농경문화를 향유하던 주민들이 직접 일본 열도로 이주함으로써 개화한 문화라는 확신이 굳어진다. 박물관 안내문에도 ‘나바타케는 2500∼2600년 전 조선 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에 의해 벼농사가 전해진 곳으로,이는 일본 벼 재배의 시작으로 알려졌다’라고 적혀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이곳 유적 발굴 과정에 다양한 석기와 함께 세형단검, 청동거울 등 청동기문화 유적도 나온 것이다. 벼농사와 청동기의 도입은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던 일본의 신석기시대 조몬인들을 농경문화에 기반을 둔 야요이(彌生) 시대로 이끌었다. 동국대 윤명철 교수는“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벼농사를 전했다는 것은 단순한 식량 문제의 해결을 넘어서 농업 기술력은 물론이고 식량을 담는 그릇 문화(토기)에서 부터 무기의 전파까지 이뤄지는 과정으로 원시인들을 촌락에 이어 국가로까지 만드는 결정적 계기”라며“한반도가 일본에 벼농사를 전한 것은 명실상부하게 일본인 들이 공동체를 만들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수”라고 했다. 그의 말은 나바타케 유적에서 산 하나를 넘어 약 40km 떨어진 일본 청동기 문화 유적 요시노가리(吉野ヶ里)에서 확인할 수 있다.
    ㆍ탄화미(炭化米) ::
    불에 타거나 지층 안에서 자연 탄화된 쌀을 말한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을 통해 분석한 재배 연도는 벼농사의 기원과 전래를 밝혀내는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된다.

    Donga        가라쓰=주성하 동아일보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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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日, 길고 깊은 ‘우애의 과거사’
    ▲  일본 도쿄에서 차로 한 시간가량 떨어진 히다카 시의 ‘고마 신사’에는 고구려 조상들을 모셨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힌 ‘고려왕묘’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히다카=허문명 국제부장 angelhuh@donga.com

    본 도쿄에서 서북쪽으로 70km 떨어진 사이타마(埼玉) 현 히다카(日高) 시에 가면 고려천,고려산,고려치(峙·고개),고려역,고려 소학교 등 도처에‘고려(高麗·일본어로 고마)’로 시작하는 지명이나 시설이 있다. 히다카 시 역시 통폐합 전 ‘고려군’으로 불렸다. 여기서 고려란 ‘고구려’를 뜻한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인 668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평양성이 무너지면서 나라를 잃게 된 고구려 유민들이 대거 건너와 뿌리를 내린 곳이기 때문이다. 유민 1대(代)를 시작으로 장자 상속으로 무려 60대를 이어 온 가족이 있으니‘고구려 신사’(이하 고마 신사)를 지키고 있는 궁사(宮司· 일본 신사를 운영하는 책임자) 고마 후미야스 씨(49·사진)다. 5월 신사에서 만난 고마 궁사는 피는 속일 수 없는지 언뜻 봐도 선 굵은 외모가 전형적인 일본인보다는 한국인과 가깝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임진왜란 때 3형제가 뿔뿔이 흩어져 두 명은 전사하고 장손만 숨어 살아남아 겨우 대를 이을 수 있었다. 32대 할아버지는‘절대 전쟁에 나가거나 나랏일에 끼어들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 자손들은 종교인으로 이곳 신사를 지키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알고 살았다.”
    한국의 생활한복과 비슷한 궁사 유니폼에 왼쪽 손에는 최첨단 명품 시계를 찬 그의 모습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의 연속성이 느껴졌다. “한일 관계를 언뜻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뿌리가 고대로부터 깊다는 것은 우리 집안이 증거이다. 한일 근대사에는 전쟁도 있었고 지배와 피지배도 있었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한일 교류 2000년 역사에는 좋은 시절이 더 많았다.” 그에게선 한국인의 후손으로서 일본에서 겪어 온 차별이나 소외라는 말 대신 “나의 뿌리는 한국이지만 내가 크고 자란 곳은 일본이다. 내 조국은 둘”이라는 말이 나왔다. “옛 조상들처럼 한국과 일본이 다시 새로운 이웃으로서의 인연을 이어 갔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22일 한일 수교 5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날을 기념해 한일 관계를 교류의 역사로 보는 ‘한일,새로운 이웃을 향해’ 시리즈를 기획했다. “동아시아의 미래는 한일 두 나라가 고대로부터 쌓았던 인연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재발견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미국의 석학 재러드 다이아몬드(‘총,균,쇠’의 저자) 의 말을 새기며 연재를 시작한다.
    Donga        히다카=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장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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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인 어떻게 日에 갔을까
    한일 중간지점의 쓰시마섬, 부산-日가라쓰서 모두 보여… 항해 기준점-피신처 역할 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때쯤 중국 대만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하나의 땅덩어리였다. 빙하기가 끝나 수천 년 동안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낮은 지대에 바닷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면서 서해가 생겨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땅은 반도가 됐고 대한해협이 생겨나 동해가 태평양과 연결되면서 일본은 섬나라가 됐다. 일본이 떨어져 나간 뒤에도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는 이어졌다.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규슈는 일본 열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통로였다. 규슈 가라쓰 시에 가면 우리 옛 조상들이 뗏목을 타고 거친 바다에 나가 위험한 항해 끝에 일본에 도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름 아닌 쓰시마(對馬) 섬 때문이다. 경남 함안 지역에 존재했던 아라국(561년 멸망) 후예들의 일본 이주를 연구한 정효운 동의대 교수에 따르면 쓰시마섬은 양국 해상 교류를 쉽게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부산에서 멀리 쓰시마섬이 보이듯 가라쓰에서도 쓰시마섬이 보인다. 이는 일본으로 배를 타고 간 우리 조상들에게 정처 없는 항해가 아닌 정확한 목적지를 보면서 가는 항해였다는 것을 뜻한다. 정 교수는 “전라도 영산강이나 섬진강 하구 등의 한반도 서남해안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의 섬들을 거점으로 삼아 쓰시마섬까지 가는 해로가 백제가 이용한 주요 해상 교통로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바다의 흐름인 해류(海流)도 교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요즘도 가라쓰 해변을 거닐다보면 한국 상표가 붙은 생수 병이나 라면 봉지 같은 한국에서 떠내려온 각종 쓰레기를 볼 수 있다. 가라쓰 시 이데 겐조(井手憲三) 국제교류과장은 “그 옛날 한반도인들도 이 해류를 타고 일본 섬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했다. 가야 고구려 백제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일부는 자신들의 국가가 멸망하자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부흥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멀리 보이는 일본 땅은 그들에게 또 다른 희망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와 매우 비슷한 이곳 규슈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 건설에 힘을 보탰던 것이다.
    Donga        가라쓰=주성하 동아일보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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