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30 총리대신이며 뇌물 축재자였던 흥선대원군의 형, 임오군란 때 도망가다 고환 터져 죽어

浮萍草 2015. 4. 27. 11:49
    1. 흥선대원군, 탐욕스런 친형 흥인군 이최응을 멸시해
    흥선 대원군(좌), 흥선 대원군의 아들 고종.
    선 26대 왕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22대 왕 정조의 서자인 은신군의 양손자로 1820년 태어났다. 흥선대원군의 부친은 남연군이었다. 남연군은 19대 왕 숙종비 인현왕후의 백부인 민정중의 4대 손 우의정(추증) 민경혁의 딸과 결혼해 네 아들을 두었는데 흥선군 이하응이 막내이고 셋째가 1815년에 출생한 흥인군 이최응이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흥선군 이하응이 친형 흥인군 이최응을 볼 때 사람으로 보지 않고 더러운 벌레 보는 것처럼 멸시하면서 둘의 사이는 견원지간 같았다. 그 이유는 흥인군 이최응이 어려서부터 탐욕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사이 나쁜 이 두 형제는 모두 권좌에 올랐다. 동생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왕 대신 국정을 통치하는 국태공이 되었고 형 흥인군도 총리대신 으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지위에 올랐다. 그런데 흥인군은 하루도 뇌물을 받지 않는 날이 없었다. 2. 흥선대원군이 권세 누리는 동안 형 이최응은 밥도 못 얻어먹어
    1863년 12월 조선 25대 왕 철종이 아들 없이 사망했다. 세자가 없어 가까운 왕손 중 1852년생인 흥선군의 차남이 조대비의 교지를 받아 왕위(26대 고종)를 계승했다. 흥선군은 왕의 생부가 되었으므로 대원군이 되었다. 당시 흥선군은 외척 안동 김씨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술을 얻어먹고 추태를 부리는 등 시정잡배가 되어 가난하고 한심한 왕손으로 살고 있었다. 식량이 없어 밥과 술을 얻어먹고 주정하고 다니던 왕손이 뜻밖에 왕의 생부 대원군이 되어 정권을 잡고 국정을 총괄하게 하게 되니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별 볼일 없던 흥선군에게 후한 대접을 했던 사람들은 김병학 같은 안동 김씨라도 높은 벼슬을 차지하였다. 반면 흥선대원군의 형 이최응은 땅 한 평 받지 못하고 부엌만 바라보는 굶주린 개 같이 살았다. 불만에 쌓인 이최응은 동생의 권력을 빌려 뇌물을 받다 들켰고, 흥선대원군은 그를 더욱 박대했다. 3. 어린 민비, 시아버지 대원군과 싸울 사람들 조용히 점찍어 놓아
    고종의 정비인 민비(후에 명성황후로 추대)는 19대 왕 숙종비인 인현왕후의 부친이며 노론의 거물인 민유중의 5대손인 민치록의 딸로 1851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 났다. 민치록이 아들 없이 어린 외동딸 하나만 남겨 놓고 죽었다. 처가가 여흥 민씨인 흥선대원군은 죽은 민치록의 외동딸을 왕비로 만들면 외척 세력이 형성 안 될 것으로 예상하고 아들인 고종의 정비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총명한 민비는 여자이지만 어려서부터 부친 민치록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녀는 소학, 효경 등을 즐겨 읽고 특히 역사 서적을 많이 읽어 정치에 관심이 많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권력욕이 많았다. 1866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민비는 7년간 조용히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치 행태를 관찰하면서 시아버지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후에 시아버지 흥성 대원군 공격용으로 활용하려고 미리 점찍어 놓았다. 그리고 시아버지 대원군을 도우는 대원군의 처남 민승호가 자기의 양 오라비가 되면서 슬슬 노론 세력인 여흥 민씨 친척들을 불러들여 외척세력을 구축했다.
    명성황후 민씨(좌), 명성황후 민씨 생가.

    4. 이최응, 민비에게 초대 총리대신으로 발탁되어
    민비가 점찍어 놓은 사람들은 고종의 왕위 계승에 공이 많았음에도 완전 찬밥 신세가 된 조대비의 조카들인 조영하와 조성하 형제,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불만이 극에 달했던 유림 세력의 최익현 그리고 동생 흥선대원군에게 불만이 많았던 흥인군 이최응 등이 있었다. 고종이 22세가 되던 1873년 10월 민비의 요청으로 돈녕부 도정 최익현이 제일 먼저 흥선대원군에게 포문을 열었다. 그는 왕이 이미 어른이 되었으니 흥선대원군은 섭정에서 물러나고 왕이 친정해야 한다고 상소문을 올렸다. 이때부터 민비와 대원군,즉 며느리와 시아버지 간에 피 튀기는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동생 대원군에 한이 많은 흥인군 이최응은 1873년 민비에게 발탁된 후 승승장구하여 1874년 좌의정 1878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그는 동생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였고 1880년 영의정으로서 미국과 외교관계 수립을 주장했다.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이 신설되면서 영의정이 총리대신으로 관직명이 바뀌어 그는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러나 주관과 철학이 없어 아무 말이나 그저 옳다고만 해 유유정승이라 했다.
    Premium Chosun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  ;草浮
    印萍

    뇌물 총리 이최응의 손자는 이완용과 함께 을사오적 중 한명
    5. 이최응, 민비에게 개 같이 충성하면서 마음껏 뇌물 받아
    흥인군 이최응(좌), 군사들에게 썩은 쌀을 급료로 지급한 선혜청.
    욕스런 흥인군 이최응은 조카며느리인 민비가 높은 벼슬을 주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조카며느리에게 목숨을 내 놓고 개 같이 충성하리라 결심했다. 그 결과 그는 소원대로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흥인군 이최응은 권력이 있을 때 재물을 챙겨야만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닥치는 대로 뇌물을 챙겨 축재했다. 뇌물을 주지 않고는 결코 이최응의 집 문턱을 넘을 수가 없었고 그를 만날 수도 없었다. 이최응의 집에서 관직의 인사전보와 신규 임명 등이 모두 뇌물로 거래되었다. 그의 집안은 뇌물을 바치는 자들과 뇌물을 받아 정리하는 이최응의 하수인들로 붐벼 마치 남대문 시장 같았다. 이최응은 매일 아침 뇌물로 가득 찬 창고들을 점검했는데 9개의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창고에 쌓인 뇌물들을 계수해 볼 때마다 너무 기분이 좋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입을 쫙 벌리고 큰 소리 내어 웃었다고 한다. 6. 이최응, 임오군란 때 담 넘어 도망가다 추락해 불알 터져
    이최응의 식품 창고에는 손도 전혀 안 댄 비싼 전복,민어,도미 등 고급 생선,그리고 꿩고기와 소갈비 썩는 냄새가 가득하여 들어가기가 보통 역겨운 것이 아니었다. 이최응은 썩은 고기 한 점도 이웃은 커녕 하인들에게도 조차 주지 않은 매우 인색한 사람이었다. 온 동네에 이최응 집 창고의 생선과 고기 썩는 냄새가 진동하여 그 집 근처를 지날 때는 코를 막아도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최응이 이렇게 뇌물을 받아 즐기면서 축재를 하던 중 1882년 6월 5일 구식 군인들이 13개월간 월급을 받지 못하다가 겨우 1개월분 월급으로 쌀을 받았다. 그런데 양이 대폭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쌀은 썩었고 거기다 모래가 대량 섞여 있었다. 이 가증스러운 정부의 행동에 구식 군인들의 분노가 폭발해 1882년 6월 9일 군란을 일으켰다. 이 군란이 임오군란이다. 굶주림에 성난 군인들은 다음날인 6월 10일 창고에서 곡물과 고기가 넘쳐 썩어 가는 이최응의 집을 공격하였다. 이최응은 살기 위해 급히 담을 넘으려는데 군인들이 이최응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이최응이 담에서 추락하면서 불알이 땅에 부딪혀 터졌다. 넘어진 그는 죽음을 재촉하는 통증에 터진 불알을 잡고 꼼짝도 못했다. 분노한 군인들이 창과 칼로 그의 몸을 찌르고 난도질을 했다. 군인들은 이최응 집 창고 문을 열었다. 쌀은 물론이고 금은보화, 보석,비단,돈,고급 생선,과일,육포,소갈비 등 없는 것이 없었다.

    7. 뇌물 받는 고위 공직자는 국가위기 시 나라 팔아먹어
    조선 22대 왕 정조 사후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여 노론인 안동 김씨의 외척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외척 고관들은 관직을 팔아먹는 것은 기본이고 죽은 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수탈하고 생후 3일 된 아기까지 군적에 올려 군포(軍布)를 강탈했다. 고종이 친정하고 나서는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인 노론 여흥 민씨가 새로운 외척세력이 되어 권력을 휘두르고 각종 뇌물로 축재했다. 조선말 백성을 수탈하고 뇌물로 축재하던 왕족과 양반 사대부 등 76명이 한일합병 시 일본에 협조하여 일본 귀족 작위를 받은 식민지 귀족이 되었다. 그들 중 56명이 노론세력이었다. 뇌물을 그렇게 좋아하던 흥인군 이최응의 손자 이지용은 왕족임에도 매국노 이완용과 함께 을사오적 중의 하나였으며 한일합병 후 훈 1등 백작 작위를 받았다. 뇌물 받는 부패 고위층들은 국가가 위험할 때 도망가거나 나라를 적에게 팔아먹는 비겁자라는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 성완종 뇌물 사건으로 온 나라가 요란하다. 이 기회에 뇌물 받은 고위층들을 모두 색출해 엄중히 처벌하지 않으면 아래와 같이 고위층 뇌물 사건이 계속 발생하여 우리 한국의 장래는 점점 암담해질 것이다.
    Premium Chosun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dschang28@hanmail.net

    ;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