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한국문화 대탐사

<27·끝> 선비정신과 미래 리더십

浮萍草 2014. 9. 28. 10:32
    참다운 인간상 지향하면 누구에게나 선비의 길 열려
    조선의 대표적인 선비와 선비군주로 불리는 윤두서(왼쪽),최익현(가운데)과 정조(오른쪽).윤두서(1668~1715년)는 윤선도의 증손으로 숙종 때 과거(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당쟁을 피해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서화로 생애를 보냈다.최익현(1833~1906)은 구한말 학자로 74세 때 의병을 일으킨 독립운동가다.정조(1752
    ~1800년)는 조선의 22대왕으로 왕정체제를 강화해 위민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꼿꼿한 지조와 강인한 기개를 지닌 독서인 유교철학이 설정한 이상적인 인간상(像)이 바로 선비다. 최고통치자인 왕도 이런 선비의 전형에서 벗어날 순 없다. 세종과 정조는 대표적인 선비 군주였다.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은 선비 리더십이 발휘된 국가였다. 벼슬길에 나갔건 사림에 머물렀건 선비들은 당대의 공론의 장을 이끌었다. 이런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에 대한 뜨거운 토론의 장이 열렸다. 지난 26일 아산정책연구원이 주최한 아산서원 개원 2주년 기념 학술회의장. ‘선비정신과 한국사회’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선비정신을 통해 미래의 리더십을 찾으려는 열띤 토의가 벌어졌다.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관료사회의 적폐와 리더십 부재의 대안을 전통가치에서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ㆍ한국인 74.5% “선비정신 중요”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는 선비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시작했다. “문명 교체기라 할 수 있는 개화기에 이르면 선비들의 의식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지게 된다. 그들은 시대사조를 읽을 안목도 없었고 중화(中華)에서 서구로 눈길을 돌릴 의지도 없이 ‘갈라파고스 거북증후군’에 머물러 있다가 망국을 초래했다. 현재 우리 학계가 예찬하는 실학자들이야말로 몰락한 지식인들이다. 개화기에 동서 문명이 충돌할 때 실학자들은 그야말로 ‘풀잎 하나 움직일 바람’도 일으키지 못했다.” 김석근 아산서원 부원장은 선비정신이 다시 부각된 때를 1960년대로 잡았다. 52년에 발표된 이희승의 수필 ‘딸깍발이’가 나온 이후 조지훈 같은 고전적 교양을 갖춘 논객들이 지식인의 윤리적 자세를 강조하기 위해 선비정신을 공론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시대가 선비정신을 다시 불렀다”며 “일제 강점기와 광복 후 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지식인들이 보여줬던 무능함과 현실 타협적인 처신은 전통시대의 꼿꼿했던 선비를 그리워하게 했으며 이런 경향성은 아직까지도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된 설문조사도 공개했다. 아산서원이 19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 74.5%가 선비정신이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선비정신이 필요한 이유로는 사회 지도층과 지식인들의 인격수양 부족, 엘리트층의 사리사욕 추구 정치권의 잦은 분열과 갈등을 꼽았다. 김 부원장은 “현대 사회의 문제점들을 선비정신을 빌어 해결할 수도 있다는 시민들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선 선비의 몰락 이유에 대한 논의도 활발했다. 신복룡 교수는 우선 토지와 신지식 부족을 들었다. 자본주의가 시대정신으로 바뀌었을 때 궁핍한 선비의 가치는 무기력했고 중화주의에 눈멀어 신지식을 능동적으로 흡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래 가난하면서 인의(仁義)를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행실’이라고 모질게 나무란 사마천의『사기』「화식열전」을 예로 들며 청빈 곧‘착한 가난(good poor)’은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의 선비에 해당하는 영국의 지주계급인 젠트리(Gentry)는 탄탄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지방 의원직과 치안판사 등을 독점했다. 뿌리 깊은 영국신사의 전통이 이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젠트리의 자격 요건으로 빚 없는 경제적 여유 존경 받을 만한 교육 품위 있는 생활 종교로 다듬어진 관용 사회 공헌 의지와 봉사 3대에 걸친 원만한 가족관계 등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고 소개했다.
    ㆍ종교·계층에 관계없이 선비 나와야
    성리학자인 이형성 전주대 교수는 참다운 인간상을 지향하면 누구나 선비가 될 수가 있다고 강조했다. “공자의 제자들은 선비(士)에 뜻을 뒀지만 각기 다른 양상을 보였다. 안연(顔淵)은 학문을 좋아하면서 인(仁)을 어기지 않으려 했고 증점(曾點)은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이나 쐬며 시나 읊으려고 했으며, 자로(子路)는 용맹을 좋아하여 삼군(三軍)을 진두 지휘할 수 있었고 자공(子貢)은 화식(貨殖)에 능하여 재물을 잘 축적했다. 우리 시대 선비상은 경제·과학·문화·종교 등에 걸쳐 훨씬 다양해야 옳다. 목사나 신부 스님 가운데서도 선비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고정된 선비상은 없으며 ‘때에 따라 중도를 취하면 선비에 가깝다’는 수시처중(隨時處中)에 의미를 부여했다. 유광호 연세대 교수의 주장은 논란이 컸다. 그는“같은 맥락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동서고금에 정통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 먹고 사는 문제가 절박했을 때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 고(故) 이병철·정주영 회장 같은 창업자들도 ‘통유(通儒)’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유는 세상사에 통달하고 실행력이 있는 유학자에 붙이는 칭호다. 체(體)도 잘 갖추고 용(用)에도 능해야 가능하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객석의 한 노교수는 “현대사를 움직인 인물들이지만 통유라기보다 신(新)실학자라면 어떨까”라며 “선비의 덕목인 학문과 수신에는 다소 미흡한 면이 있었지만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며 리더로서 우선해야 할 바를 한 것은 큰 업적”이라고 말했다.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장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들어“여말선초에 주자학을 받아들인 건 주자학이 송대 강남 농업혁명의 철학적 토대가 됐기 때문이기도 하다”며 “성리학에 산업의 발달과 민생의 풍요를 꾀하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측면이 있음에도 19세기 문명의 전환기에 글로벌 스탠더드를 받아들이지 못한 건 유감”이라 고 평가했다. 한편 본격적인 학술토론에 앞서 아산서원에서 교육을 받은 서원생들은 “동양고전과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PPE(Philosophy Politics and Economics)를 결합한 고전 중심 교육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기숙사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공부하고 국궁과 국악, 서예는 물론 해외연수까지 했다. 우리 시대에 맞는 선비교육을 받은 셈이다. 이들은 또 ‘청문(淸問)’이라는 아주 오래됐지만 매우 참신한 화두를 던졌다. 동양고전『서경』에 나오는 이 말은 지도자가 마음을 비우고 백성에게 거리낌 없이 묻는 걸 뜻한다. 미래에 리더가 될 서원생들의 청문은 또 있었다. ‘오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간상이 무엇인가’였다. 이날 학술회의는“지금은 세계시민정신에 부합하면서도 한국인의 혼을 지닌 우리 시대 선비의 덕목을 제시해야 할 때이며 그것이 진정한 전통의 재창조”라는 과제를 제시했다.
    Sunday Joins Vol 394 ☜        김종록 객원기자·문화국가연구소장 kimkisan7@na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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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선비정신, 원활한 사회적 소통에 큰 기여”
    일본 도호쿠대 가타오카 류 교수가 본 선비정신
    "조선(한국)의 선비정신은 사회가 원활히 소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권력자들뿐 아니라 민중들과도 호흡을 함께하며 합의를 거친 통일된 여론 형성을 주도했던 것이 선비들이며 이들이 가진 철학이 바로 선비정신이다.” 26일 아산정책연구원 주최 학술회의에 참석한 가타오카 류(片岡龍·49·사진) 일본 도호쿠(東北)대 교수는 선비정신에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와세다대 대학원에서 동양사상사를 전공한 그는 일본 내 한국사상 전문가다. 숙명여대에서도 교편을 잡았으며「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공공’ 용례의 검토」등 한국과 관련된 여러 편의 논문을 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선비정신을 정의한다면. “공공성이 강한 ‘통합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혈액을 통해 산소와 영양분이 온몸 곳곳에 전달돼야 하듯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정신과 시스템이 필요하다. 선비정신은 사회가 바람직하게 움직이는 데 필요한‘사회적 생명의 원천’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예전에는 상류층이 주로 사회를 대변했는데 이를 보완한 것이 선비정신이다. 민중들의 의견을 상층에 전달했기 때문 이다.
    또 선비정신은 생명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 모든 인간을 존중한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퇴계 이황 선생은 선비정신을 ‘원기(元氣)가 깃들이는 장소’라고 규정했다.” - 선비에 대해 긍정적인 측면만 본 것은 아닌가. “실례로 들어 설명하겠다. ‘공공성’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헌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여기에만 1000여 건이 등장한다. 중국 역사서에서는 불과 40여 건 밖에 찾아볼 수 없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특히 일본이 공공성을 많이 강조하는데 실제 역사적으로 공공성에 가장 큰 의미를 뒀던 나라는 한국이었다. 그 중심에 선비가 있다.” - 외국 학자로서 선비정신에 대한 평가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일본과 중국에는 없는 독특한 정신이다.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윗사람을 섬기는 것에 충실하다. 또 생명을 존중하기보다는 오히려 경시하는 측면이 강하다. 중국의 사대부는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즉, 관직에 오른 특수계층으로 이들은 대중과 격리돼 있다. 반면 한국의 선비는 관직을 갖지 못했어도 그 지위를 유지한다. 이들은 특정된 사회적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과 중국과는 다른 지향점을 갖고 있다. 대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념과 의리가 있다는 것이다. 외국 학자로서 선비를 볼 때 이들은 매우 다이나믹한 존재였다. 사회적 명분과 정의에 충실하기 위해 자신의 지조를 지키는 저항적 집단이기도 했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이들은 일본의 사무라이나 중국의 사대부보다 긍정적인 역할을 많이 했다.” - 선비정신을 통해 현대인들이 배울 점은. “선비정신을 현대에 접목시켜 좀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회적 시스템을 개발한다면 사회가 훨씬 효율적이며 공평하게 될 것이다. 성장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과학은 가장 중시되는 학문 중 하나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은 인격을 함양하는 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과학을 추구하더라도 선비정신을 함께 곁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고 사회의 생명을 되살리는 데 선비정신이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믿는다.” -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수많은 갈등이나 사건도 선비정신으로 해결이 가능하단 말인가. “물론이다. 선비정신이 사회를 주도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불합리한 사건이나 행동들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일본의 경우 이런 정신이 없어 2011년 동일본대지진 때 큰 혼란을 겪었다. 일본의 경우 선비와 같은 중간층이 없고 국가와 국민이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대지진이라는 큰 사건이 발생한 후 국가가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을 때 국민이 많은 고통을 받았다. 이처럼 선비정신은 국가적 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긴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Sunday Joins Vol 394 ☜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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