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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家 영광에만 집착한 황제… 오스트리아 帝國의 몰락을 재촉하다

浮萍草 2014. 9. 14. 11:46
    합스부르크家 영광에만 집착한 황제… 오스트리아 帝國의 몰락을 재촉하다
    시대 흐름 못읽은 프란츠 요제프 격동의 전환기에 폐쇄정치 고집 아름다운 황후 잃으면서 불행이… 1900년대 세기 전환기의 오스트리아 빈(Wien)은 문화가 독특한 매력적 도시였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소설가 슈니츨러와 호프만슈탈,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와 쇤베르크,화가 클림트와 에곤 실레 그리고 코코슈카가 빈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문화는 몰락의 예감, 황혼녘의 아름다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600여 년에 이르는 통치는 서서히 종말에 이르고 있었다. 시민혁명을 통해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고 있던 이웃 나라들과 달리 합스부르크 가문은 저 악명 높은 근친결혼을 통한 폐쇄적 정치로 일관하고 있었다. 여러 대에 걸친 가문 내의 근친결혼으로 정신·육체적으로 심각한 결함을 가진 후손이 태어났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1830~1916, 재위 1848~1916)는 다행히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 왕조의 몰락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 프란츠 요제프의 재임 68년 동안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통일,독일 통일 등으로 국제적 영향력이 계속 축소되었다. 빈은 국제적 도시였고 다양성은 오스트리아의 문화적 힘이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폐쇄성은 이 에너지를 생산적인 것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거꾸로 이민족에 대한 혐오감이 자라기 시작해 빈은 반(反)유대주의의 온상지가 되었다.
    요한 란치의 1855년 작‘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왼쪽)와 프란츠 윈터할터의 1865년 작 ‘무도회복을 입은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오른쪽)
    이진숙 제공

    1897년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반유대주의를 내세운 카를 뤼거를 결국 빈 시장으로 임명했다. 카를 뤼거는 히틀러의 정치적 모델이 된 사람이다. 열강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와중에 거대 제국을 통치하는 데는 더 큰 화합의 통치 철학이 필요했으나 그가 집착했던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광뿐이었다. 1854년 23세의 황제는 16세 소녀 엘리자베트(1837~1898)에게 반해 모후 소피 대공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한다. 요한 란치가 그린 프란츠 요제프의 1855년 초상화는 결혼한 직후의 패기만만한 젊은 황제의 모습을 담고 있다. 세 아이를 낳은 황후는 결혼 11년 뒤에 그려진 초상화에서 보듯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황후는 국제 정치적 긴장 속에서 1898년 요양차 간 제네바에서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에게 살해당한다. 자유주의적 성향으로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뜻이 맞지 않았던 아들 루돌프(1858~1889) 황태자도 자살했다. 왕가는 위기를 맞이한다. 황제는 또 다른 왕위 계승자인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와도 사이가 틀어졌다. 황태자가 신분이 낮은 여성과 결혼하기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혈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황제는 왕위 계승권자의 귀천 상혼을 용납하지 못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는 달리 새 황태자는 체코,슬로바키아,크로아티아 등 인근 국가를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오스트리아 합중국을 만들 계획이었다. 황태자는 독립운동이 거세지는 가운데서도 이 지역 방문을 마다하지 않았다. 황태자 부부는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방문 길에 세르비아 민족주의 청년에게 암살당한다. 이를 핑계로 프란츠 요제프는 세르비아를 공격했고, 1차 대전이 시작되었다. 전쟁 중에 제국은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폴란드 등 여러 나라로 분할됐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노을 같은 존재였다. 그는 전쟁 중 사망했고 샤를 1세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마지막 황제로 등극하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결국 폐위당해 길고 긴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는 종말에 이르게 된다.
    Chosun        이진숙·'러시아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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