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다시 쓰는 고대사

4 의자왕 덕에 탄생한 충신들

浮萍草 2014. 8. 18. 12:00
    충신 많은 백제, 양신 많은 신라를 당할 수 없었다
    백제의 세 충신, 성충·흥수·계백을 모신 사당. 모두 의자왕 시절 신라·당 연합군의 공격을 예견했거나 맞아 싸운 대신들이다.그런데 의자왕이 사치와 방탕에
    빠지지 않고 그들의 충간을 들었다면 세 사람은 충신이 아니라 양신(良臣)이 되지 않았겠는가. [사진 권태균]
    “8월 2일 큰 술자리를 벌여 장사(將士)를 위로했다. 문무왕(文武王)과 소정방 그리고 여러 장수는 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義慈王)과 아들 융(隆)은 마루 밑에 앉혀 때로는 의자왕에게 술을 치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삼국사기』 5, 태종무열왕 7년) 660년 7월 18일 백제 의자왕이 항복한 후 문무왕과 소정방이 사비성에서 벌인 승리의 잔치 장면이다. 그때 의자왕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충신들의 말을 안 들었다는 회한에 목이 메지 않았을까? 백제 제30대 장왕(璋王, 600~641 재위 시호 무왕)은 재위 33년(632) 1월 맏아들 의자를 태자로 삼았다. 태자인 의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사람들은 그를 효성이 지극했던 공자의 제자 증자(曾者)에 빗대 해동증자로 불렀다. 641년 3월 장왕이 세상을 떠나고 의자가 왕이 됐다. 의자왕은 처음엔 당과의 관계를 잘 유지했고 국내 정치에 힘을 쏟았으며 신라 정복도 활발하게 했다. 그런 사정은『삼국사기』에 잘 나온다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했다. 642년 2월에 주·군을 순무한 왕이 죄수의 정상을 고려해 죽을 죄가 아니면 모두 용서했다. 7월에 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삼국사기』 28, 의자왕 2년) 642년 8월에는 장군 윤충에게 군사 1만을 줘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게 했다. “성주 품석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했는데 윤충은 이들의 머리를 베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서쪽 주·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했다. 왕은 윤충의 공을 표상하여 말 20필과 곡식 1000섬을 주었다.”(『삼국사기』 28, 의자왕 2년) 그때 머리가 베인 품석의 처 고타소(古陀炤)의 죽음은 삼국관계를 새 국면으로 몰고 간 사건이었다. 고타소를 누가, 어떻게 죽였는가보다 그가 백제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장녀 고타소의 죽음을 접한 김춘추는“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랴”라고 했다. 복수심은 춘추의 아들 법민(法敏)에게도 이어졌다. 660년 7월 18일 웅진성으로 도망갔던 의자왕이 항복하기 전인 7월 13일 백제 태자 부여륭이 사비성을 들어 신라 태자 법민 앞에 나와 항복을 했다. 법민은 부여륭을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었다. “너의 아버지가 나의 누이를 부당하게 죽여 옥 안에 묻었다. 그로 인해 나로 하여금 20년간 슬프고 괴롭게 했다. 오늘 네 목숨은 내 손아귀에 있다.”(『삼국사기』 5, 태종무열왕 7년) 660년 8월 2일 승리의 잔치를 베풀 때 일이다. “… 검일(黔日, 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겼던 대야성의 관리)을 잡아 죄를 일일이 들추어 말했다. 너는 대야성에 있으면서 모척(신라를 배반하여 백제로 갔던 자)과 모의했다. 백제 군사를 인도해 창고를 태워 없애 성중에 식량을 부족하게 하여 패전을 불러온 것이 첫째 죄다. 품석 부처를 핍박해 죽였으니 죄의 둘째고 백제와 함께 본국을 쳤으니 죄의 셋째다. 팔다리를 찢어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삼국사기』 5, 태종무열왕 7년) 김춘추 일가는 고타소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다. 백제를 삼키겠다는 사적 복수심은 백제의 멸망을 불러왔다. 의자왕은 재위 15년(655)까지는 왕정을 장악하고 정치를 잘했다. 특히 신라를 공격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655년 8월 의자왕은 고구려,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공파하였는데 신라왕 김춘추가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고 글을 올려“백제가 고구려,말갈과 함께 우리의 북쪽 경계를 침범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삼국사기』 28, 의자왕 15년)고 했다. 그런 그가 변했다. 656년에 벌어진 일이다. “봄 3월 왕이 주색에 빠져 마음껏 즐기고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으므로 좌평(佐平) 성충(成忠)이 극력 간하였는데 왕이 노해 성충을 옥에 가두었다…성충은 몸이 여위어 죽게 되었는데 죽을 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아니하오니 한 말씀 드리고 죽을까 합니다. 제가 늘 시세의 변화를 살펴보건대 반드시 전쟁이 있을 듯합니다. 대개 군사를 부림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지세를 잘 가려야 되는 것이니 상류에 머물면서 적병을 대적하면 능히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나라 군대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넘어서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험한 곳에 웅거하여 적병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했다.”(『삼국사기』 28, 의자왕 16년) 충신(忠臣)이란 무엇인가.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다. 그런데 임금이 나라를 위하지 못하면 어쩌는가. 목숨 걸고 바른말을 해야 한다. 의자왕은 충신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당 고종이 소정방에게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했고 신라 태종무열대왕은 김유신에게 5만 병력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했을 때 의자왕은 군신(群臣)을 모아 물었다. 먼저 좌평 의직(義直)이 진언하기를“당나라 군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달솔 상영 등이 “아닙니다. 당나라 군사는 먼 곳에서 왔으므로 속히 싸우려 할 것이고 …신라 군사는 우리 군사에게 여러 번 패전했으므로 …먼저 일부대의 군사로써 신라군을 쳐서 그 예기를 꺾은 후 편의를 엿보아 합세해서 싸운다면 군사를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나라를 보전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은 망설이며 어찌할 줄 몰랐다.(『삼국사기』 28, 의자왕 20년)
    부여 능산리에 있는 의자왕의 묘. 당에 끌려가 거기서
    죽은 왕의 혼만 이곳에 모셔져 있다.
    이때 귀양 가 있던 흥수(興首)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흥수는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우리나라의 요충입니다. … 당나라 군사는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는 탄현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 대왕께서는 성문을 닫고 지키다가 그들이 식량이 떨어져서 사졸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린 후에 이를 급히 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대신들이 “흥수는 죄를 지어 귀양 중에 있으므로 임금을 원망하고 애국(愛國)하지 않을 것이오니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왕이 그렇게 여겼는데,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계백을 보내 황산 (黃山)에 나가 싸우도록 했다.(『삼국사기』 28, 의자왕 20) 660년 7월 9일 신라의 태자 법민과 김유신 등 장군들이 거느린 5만의 신라군과 맞서 싸운 것은 계백 장군이 거느린 백제의 사사(死士) 즉 결사대 5000명이었다. 결투에 앞서 계백은 “나의 처자들이 잡혀서 노비가 될까 염려되니 그들이 살아서 욕보는 것보다 죽는 것이 마음 편하다”며 처자를 다 죽이고 말았다. 황산벌에서 백제군은 힘을 다해 최후까지 싸웠는데 한 사람이 천 명을 당해내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 같이 진퇴를 네 번이나 했는데 마침내 힘이 모자라 모두 전사했다.(『삼국사기』 47, 『계백』)
    의자왕이 성충 간언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660년 7월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가 사비성을 공격해올 때였다. 의자왕은 탄식하여 말하기를“성충의 말을 시행하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뉘우친다”고 했다.(『삼국사기』 28, 의자왕 20년) 의자왕이 성충이나 의직 흥수의 말을 들었다면 백제는 멸망으로 몰려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그러면 성충 등은 충신이 아니라 양신(良臣)이 되었을 것이다. 의자왕 때문에 충신이 된 것이다. 양신과 충신은 동전의 양면 잘못된 리더의 잘못된 행동이 양신으로 하여금 충신의 길을 걷게 만든 것이다. 당 태종에게 “충신이 아니라 양신이 되게 해 달라”고 한 위징의 ‘충신론’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1회) 의자왕 때문에 충신이 된 성충·의직·흥수 그리고 계백은 모두 죽고, 의자왕은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간 대악에 빠졌고 집과 국가는 모두 사라져 백제(百濟) 라는 이름만 남게 된 것이다. 부여에 있는 백제탑인 정림사지 5층 탑에『대당평백제비명(大唐平百濟碑銘) 』이라는 명문과 함께 660년 당 고종(高宗)이 태종무열대왕과 동맹하여 백제를 토파(討破)한 내용을 기록한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비문에는 소정방, 김인문, 유인원 등 여러 명의 공을 기록하고 있다. 660년 9월 3일 소정방이 의자왕과 왕족 신료 93명 백성 1만2000여 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삼국사기』 5, 태종무열왕 7년) 소정방은 모든 포로를 이끌고 당 고종을 알현하니 당 고종은 조서를 내려 죽이지 말고 놓아주라 명했다.(『당서』 220, 『백제』) 의자왕은 당나라 서울에 간 지 며칠 안 되어 세상을 떠났는데,구신(舊臣, 백제에서 함께 잡혀간 신하들)의 곡(哭)을 허락하고, 묘를 만들어주고 비석도 세우게 해주었다.(『구당서』 199상, 『백제』) 의자왕은 시호도 가질 수 없었다. 의자왕의 아들로서 한때 백제 태자였던 부여륭은 682년에 세상을 떠나 낙양 북망(北茫)에 묻혔다.(『부여륭 묘지명』) 이로써 백제 왕실도 사라졌다. 642년 고타소의 죽음으로 맺어진 백제의 의자왕과 신라의 춘추(태종대왕)의 악연(惡緣) 두 군주의 서로 다른 판단력과 통치력 두 군주가 만든 충신과 양신 그리고 그 결과로 역사는 엇갈린 두 나라의 운명을 보여준다.
    Sunday Joins Vol 360 ☜        이종욱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leejw@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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