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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멋, 전원의 맛이 조화된 ‘농요’예천통명농요

浮萍草 2014. 6. 8. 06:00
    지정번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 84-2호 소 재 지 : 경북 예천군 예천읍동명리 지 정 일 : 1985년 12월
    요즘에는'농요'라고 하면 별다른 부대설명이 없어도 '들에서 농사 지으며 불렀던 노래'라고 쉽게 떠 올린다. 그런데 농요라는 용어는 학문적이고 편의작인 명칭일 뿐이다. 현지에서는 들소리ㆍ들노래ㆍ모심기소리ㆍ등지가ㆍ논매기소리ㆍ만물소리라 일컫는 경우가 많다. 1980년대 이르러거야 무형문화재 지정을 통해,또는 지정보고서나 전문적인 집필을 통해 농요라는 용어가 자리잡게 됐다.


    ㆍ집촌 변화와 함께 지역 특색 갖춘 예천통명농요 원전 3세기경에 들어온 철기문화는 초기 국가 성립과 농경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고대의 촌락은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몇 개의 자연촌을 포함하는 지역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경북 예천군 통명마을은 통명동이라는 지역촌에 12개의 자연마을(노티기·웃통명·동쪽마을·골마을·함기골·땅골 등)이 존재하는데 고려말에 오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15세기 이후 수전농법과 동족(同族)촌의 발달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오늘날과 비슷한 집단촌락을 이룬다. 통명농요에는 모심을 때의‘아부레이수나’와 모를 다 심고 논에서 나올 때 부르는 ‘도움소’,논매기소리인 ‘애벌매기소리’와‘상사듸여’ 논을 다 매고 나오면서 부르는 ‘방애소리’와 ‘에이용소리’, 논매기를 마친 후 상머슴을 치레한 소에 거꾸로 태우고 풍년을 구가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부르는 장원질소리인 ‘캥마쿵쿵노세’, 타작소리인 ‘봉헤야’가 불린다. 이들 소리 중에서 ‘아부레이수나’는 경북 영주에도 비슷한 유형이 분포하긴 하지만 ‘도움소’나‘애벌매기소리’와 함께 통명마을의 색깔이 매우 짙은 희귀 노래에 속 한다. 이들 희귀 노래들은 14세기경 통명마을의 집촌이 어느 정도 판을 이루게 된 이후의 산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봉헤야’는 예천군의 예천읍과 개포·용궁·하리면 경북 상주시 중동면 신암리와 함창읍의 구향·덕통·태봉리에 분포한다. 중동면은 상주시에서도 낙동강 건너에 예천군 풍양면과 인접해 있어 강 건너 섬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이다. 아무튼 통명마을도 예천읍에 속하니 ‘봉헤야’의 문화중심권에 든다.

    ‘캥마쿵쿵노세’는 예천군 내의 중·북부지역이 문화중심인 소리로 그 인접지역까지 알려진 ‘쾌장아 후질칠노세’의 통명형이다. 이는 또한 일반적인 경상도 칭칭이소리의 한 유파이다. 모심을 때 받음구 없이 앞소리꾼이“유월이 둘이라서 첩을 팔아 부채 샀네”하면 다른 모심기꾼들은 그 대귀가 되는“동지섣달 당하고 보니 첩의야 생각이 절로 나네”를 부른다. 이러한 경상도 칭칭이 받음구 예는“쾌지나 칭칭나네”이기도 하고 곳에 따라“쾌지랑 칭칭나네”,“치기나 칭칭나네”,“치야 칭칭나네”등등 다양하다.이러한 칭칭이 곡이 “쾌장아 후질칠노세”로 변환되고 그것이 통명마을로 들어오면서‘캥마쿵쿵노세’로 또 변화해 정착되기까지의 세월을 수백 년간이라 말할 수 있을까? 천여 년이라 일컬어야 할까? 인접학문과 함께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방애소리’나 ‘상사듸여’의 분포도도 매우 넓다. 이 두 소리도 외부로부터 전파되어 온 소리들이다. 아무튼 늦어도 18세기 후반부터는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당시의 통명농요가 그대로 불리고 있었다고 본다. 통명농요의 곡들은 모두 멕이고 받는 가창방법(멕받형, 선후창)으로 가창된다. 전국의 농요 가운데서는 멕받형이 8할은 되어 보인다. 농요는 단순한 일노래가 아니고 지역민의 개성있는 얼굴이며 구전으로 내려오는 살아있는 역사이다. 느린 입말형의 논매기소리들은 전국적으로 다양하게 많지만 통명농요의 애벌매기에서는 입말형 중간에“아차 깜짝 잊었구나”와 같은 의미구들을 넣어 특성화함과 같이,통명농요는 개성이 매우 강한 농요이다. 예천통명농요보존회의 운영에서도 초창기부터 합리적이고 조직적인 것을 보면 옛날 12촌을 거느리고 자치적으로 잘 다스려온 지역촌장의 법도를 느낀다.
    ☞ 문화재청 ☜        글·사진 이소라 민족음악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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