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힐링 시대 마음의 고전

<32>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浮萍草 2014. 5. 25. 10:26
    진정한 쾌락주의자는 ‘세상의 쾌락’을 피한다
    ▲ 마이클 버거스(1647년께~1727)가 그린 루크레티우스(1682년 작품)
    쾌락주의(Epicureanism)는 음주가무·흥청망청·난봉꾼·방탕 같은 단어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쾌락주의가 추구하는 궁극적 쾌락은 ‘마음의 평화’다. 고대 쾌락주의자들은 산해진미보다는 소박한 음식,색욕의 충족보다는 우정,부귀영화보다는 박애의 실천을 모토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사는 게 ‘꽉 찬’ 인생이라고 봤다. 쾌락주의자들에게 쾌락은 적극적인 게 아니라 수동적·방어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몸에 고통이 없고 영혼에 골칫거리가 없는 것’으로 쾌락을 정의했다. ‘세상의 쾌락’을 피하는 게 쾌락주의의 정신이다. 쾌락주의의 창시자는 에피쿠로스(기원전 341~270)다. 그의 사상을 ‘대중적’으로 정리한 것은『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 on the Nature of Things)』(이하『사물』)라는 시집이다. 『사물』은 에피쿠로스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헌이다. 고대 그리스의 오랜 철학시(哲學詩) 전통에 따라『사물』을 지은 이는 로마 사람 루크레티우스(기원전 99년께~55년께)다. 『사물』은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유일한 작품이다. 스페인 출신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1863~1952)는 단테·괴테와 더불어 루크레티우스를 ‘3대 철학 시인’으로 꼽았다.
    ㆍ토머스 제퍼슨 “나는 쾌락주의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한글판(왼쪽)과 영문판 표지
    『사물』은 기원전 1세기 중반 작품이다. 7415줄, 제목이 없는 6권으로 구성됐다. 『사물』은 로마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 받는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19)에게 시의 모범을 제시했다. 하지만『사물』은 로마제국의 멸망 후 차츰 잊혀졌다. 1417년 독일의 한 수도원에서 발견됐다. 하버드대 그린블랫 교수(영문학)에 따르면『사물』은 르네상스 시대 유럽을 뒤흔들었다. 계몽주의의 틀을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에피쿠로스주의자다”라고 말한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은『사물』의 라틴어 판본 5종과 영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 번역본을 소장했다. 그가 미국 독립선언문에서 주창한 ‘행복추구권’의 뿌리가『사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설도 제기됐다. ‘쾌락’을 ‘행복’으로 살짝 바꿔친 것이다. 사실 쾌락주의에서는 쾌락이 곧 행복이다. 한편 몽테뉴(1533~1592)는『수상록』에서『사물』을 100회가량 인용했다. 『사물』을 오늘날의 학문 분과로 분류한다면 광학·기상학·물리학·사회학·심리학·우주론·윤리학·종교학· 철학에 속한다.
    어떤 내용일까. 『사물』은‘평범한 여자가 사랑을 얻는 법’유전(遺傳) 등 다양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핵심은 마음의 평화를 깨는 양대 문제, 즉 신(神)들에 대한 공포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사물』에 따르면 신들은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창조주는 없지만 신들은 존재한다(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창조주가 있다고 봤다. 특히 플라톤은 조물주가 이데아에 맞춰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었다). 우주에는 무수한 세상이 있는데 신들은 세상과 세상 사이에 존재한다. 신들은 지극한 평온함 속에서 존재한다. 사람들과 달리 모든 욕망이나 공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신들은 어떤 면에서는 쾌락주의의 이상이다. 그들은 인간사에 간섭할 여유가 없다. 자신들의 행복을 음미하고 관조하느라 바쁘다. 또한 만약 그들이 인간들의 기도에 응답하거나 인간들의 악행에 분노한다면 그들의 평온함이 깨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신들이 아니라 원자들이다. 천둥·번개·지진 같은 것들도 원자 소관이지 신들의 분노와는 무관하다. 죽음에 대한 공포 또한 우스꽝스럽다. 인간은 우둔하기에 피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한다. 대표적인 게 죽음이다. 한 번 죽으면 끝이다. 죽음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은 좋은 것이다. 죽음이라는 ‘축복’은 인간을 해방하기 때문이다. 죽으면 영혼도 사라진다. 영혼도 물질이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거나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일은 없다. 사람은 죽음으로써 아무것도 상실하는 게 없다. 죽은 다음에는 뭔가를 바랄 몸이나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만악(萬惡)의 근원이다. 탐욕, 전쟁, 지나친 야망을 부추기는 원동력은 죽음에 대한 공포다. 한 번뿐인 인생···. 사는 동안 추구할 만한 것은 최대한 쾌락을 추구하고 최대한 고통을 피하는 것이다. 쾌락은 좋은 것이고 고통은 나쁜 것이다. 허망한 꿈을 꾸지 말고 쉽게 충족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게 좋다. 음식은 허기를 없애고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하는 것으로 족하다. 지금 당장 고통을 수반하는 쾌락이나 언젠가는 고통을 가져올 쾌락은 피해야 한다. 따라서 애욕의 노예가 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사랑보다 우정이 좋다. 우정은 구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명인이 되려고 하지 마라. 익명(匿名)으로 사는 게 최고다. 따라서 정치활동에 나서는 것은 미친 짓이다.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쓸데없다. 부(富)와 재산의 발견은 시기심과 불화를 낳지 않았던가.
    ㆍ아인슈타인 “그의 시는 마법”
    루크레티우스의 삶에 대해선 알려진 게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귀족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아니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로마에서 살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나폴리설이 제기됐다. 라틴 교부(敎父)인 4세기 성인 히에로니무스(348~420)는 『연대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루크레티우스는 사랑의 미약(媚藥)을 복용한 결과 미쳐버렸다. 『사물』은 미친 그가 잠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 틈틈이 썼다. 미친 루크레티우스는 결국 자살했다. ‘초자연적인 설명은 필요 없다’며 미신뿐만 아니라 종교에 반대한 에피쿠로스주의는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교와 상극이다. 『사물』은 종교야말로 죄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교회의 관점과 달리 에피쿠로스주의는 우주가 무한하기 때문에 당연히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리스도교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한다면 에피쿠로스주의는 ‘영원한 죽음을 약속’하고 있다. 흥미롭게도『사물』은 가톨릭 교회의 금서목록에 오른 적이 없다. 『사물』을 사라지지 않게 보존한 것도 교회다(수도원의 수사들은 “잉크는 흐릿하고 양피지의 질은 나쁘고 옮겨 쓸 원전(原典)은 어렵구나”“제기랄 마실 것 좀 다오”라는 하소연을 몰래 필사본에 남기며『사물』을 비롯한 고대 문헌의 역사를 이어갔다). 가톨릭 교회는『사물』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했을까. 어쩌면 『사물』이 로마 다신교의 신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데서 쓸모를 발견했는지 모른다. 가톨릭 신앙과 에피쿠로스주의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믿음이다.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370)의 원자론을 수용한 에피쿠로스주의에 따르면 원자가 무작위로 방향을 틀며 끊임없이 결합과 분리를 반복하기 때문에 우주에서 결정 된 것은 없다. 그 결과 자유의지의 행사가 가능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신격화를 거부하는 사상은 이전의 신격화에서 벗어나자마자 새로운 신격화에 나선다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에서 자연을 거의 신격화했다. 또한 “세상이라는 고통스러운 수수께끼”를 풀어준 루크레티우스를 신격화했다. 이렇게 말이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현실의 발견자이십니다.” 아인슈타인은 1923년『사물』의 독일어판 서문을 썼다. 이렇게 적었다. “시대정신에 완전히 흠뻑 빠지지 않은 사람에게…루크레티우스의 시는 마법으로 작용할 것이다.” 사족 하나를 붙인다. 루크레티우스에게 “그럼 죄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진정한 쾌락을 추구하다 보면 죄는 자연히 안 짓게 된다.”
    Sunday Joins Vol 376 ☜        김환영 기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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