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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는 공주·조공 바치던 ‘흉노의 속국’ (7부)

浮萍草 2014. 5. 24. 23:30
     
    흉노는 바로 조선과 북부여를 구성하는 종족 
    고조 유방이 흉노에게 평성(하남 맹진)의 백등산에서 7일간이나 포위당하자,여왕후가 묵돌 선우에게 치마를 푸는 치욕을 당하고 굴욕적인 화친조건을 약속하게 
    된다. 
    그 조건이란 상호간 형제관계를 맺고 장성을 경계로 하여 침공하지 않는 대신에 한나라가 공주와 많은 공물을 흉노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이는 바로 시행되었고, 이후 유방은 "흉노와 전쟁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어갔다.
    한나라가 흉노에게 바치는 조공액도 그때그때 역학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나라에서 바치는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B.C 192년~135년까지 조공규모를 아홉 차례나 인상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한나라는 오랫동안 흉노의 속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전성기인 무제 때 일시적으로 흉노를 공격해 잠시 성공을 거두기는 했으나 효과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중국은 전쟁보다는 조공정책이 훨씬 경제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로는 ‘책봉체제’과 ‘기미정책’이라지만 사실상 중국은 북방민족에게 여성과 금품을 제공하고 평화를 구걸한 셈이다. 
    중국과 대치하는 북방민족의 지배자 입장에서도 중국에서 상납 받은 금품으로 자신의 정치체제를 유지하는데 사용할 수 있어 서로가 해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방이 장안으로 돌아온 후 조정에서는 유방의 친공주를 보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여왕후가 딸 잃는 것을 매우 슬퍼하며 하소연하기에 종친의 딸이나 궁녀를 
    공주로 책봉해 보내기로 결정했다. 
    흉노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공주로 봉해졌으며 그 신분에 맞는 많은 혼수품을 가져오기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를 중국기록에서는 “흉노의 선우가 한나라 황실의 부마되기를 자청했다”고 춘추필법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왕조의 이민족정책의 하나인 기미정책은 궁궐의 여성을 이민족 지배자의 처첩으로 보내는 통혼정책이다. 
    이러한 여성들을 당나라 때에는 화번공주라고 불렸는데 이러한 제도가 처음 시작된 것도 한고조 유방 때였다. 
    화번공주(和蕃公主)란 중국과 이웃 번국 사이의 평화를 담당하는 공주라는 뜻이나 말이 좋아 번국이지 한마디로 상국(上國)에 바치는 공물이다.
    양귀비,서시,초선과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왕소군(王昭君)도 이러한 화번공주 방식으로 흉노의 선우에게 보내진 궁녀였다. 
    왕소군에 관한 정사의 기록은<한서 원제기·흉노전>과 <후한서 남흉노전>에 적힌 몇 줄이 전부이고 야사에는 각기 다른 설화가 전해지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역사적 사실과 다른 이야기로 각색되어 실제 왕소군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우아하며 매력적인 여인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 중국 고대 4대미인. (좌로부터) 양귀비, 초선, 서시와 비파를 타는 왕소군 © 편집부

    B.C 60년경 흉노에서 선우 자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나자 호한야(呼韓邪) 선우가 한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이후 흉노는 호한야에 의해 재통일되고 한나라와 화친하게 되고 다시 화번공주가 보내지게 된다. 화번공주로 보내진 왕소군의 신분이 왕실인 유씨가 아니라 궁녀였던 것은 이 시기에 흉노에 분열이 일어나 군사력이 예전보다 약해졌기 때문에 한나라 입장에서는 굳이 진짜 공주나 왕실의 여식을 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한서 흉노전>에서는“경녕 1년(B.C 33) 선우가 다시 입조했다. 예우와 물품의 하사는 처음과 같았으나 의복과 명주솜을 더 주었는데 모두 황룡 시기에 추가로 사여한 양보다 곱절이었다. 선우는 한 종실의 사위가 되어 자신이 한의 친족이 되길 원한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원제 때 이후 궁에 있던 왕소군을 선우에게 사여하였다”라고 상납했던 것을 하사했다고 춘추필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소군 전설을 가장 최초로 기록한 <서경잡기>에 의하면 한나라 원제는 궁녀들의 초상화를 보고 수침에 들고 후궁을 골랐기에 궁녀들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어 예쁘게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집안이 넉넉하지 않은데다가 평소 외모에 자신이 있던 왕소군은 그러지 않았기에 이를 괘씸히 여긴 화공은 그녀의 초상을 평범하게 그리고 얼굴에 큰 점까지 찍어 놓았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입궁한지 5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후궁이 되지 못하고 궁녀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원제는 초상화를 보고 평범한 궁녀를 뽑아 흉노로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뽑힌 궁녀가 바로 왕소군이었다. 원제는 비파를 연주하며 흉노로 떠나가는 왕소군을 직접 보게 되었는데 너무도 아름다운 천하절색이어서 보내기 싫었지만 결정을 번복할 수도 없고 흉노와의 관계를 고려해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조사에서 화공 모연수가 초상화를 조작한 사실이 밝혀지고 이에 격노한 원제는 그를 참형에 처해버린다.
    ▲ 한나라와 흉노간 평화의 사절 왕소군을 주제로 한 영화 © 편집부

    <후한서 남흉노전>에는 왕소군이 입궁한지 몇 년이 지났지만 원제에게 간택되지 않자 원망을 품고 원제가 호한야 선우에게 보낼 궁녀 5명을 뽑는데 자원했고 나중에 자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가 개작(改作)된 것으로 보이며,<남흉노전>이라는 언급으로 보아 남흉노는 남쪽에 있던 흉노로 한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흉노일 것이다. 남흉노는 과연 누구일까? 왕소군은 호한야 선우에게 보내져 훗날 흉노의 일축왕이 되는 아들을 낳는다. 당시 50대 후반인 호한야 선우가 왕소군과 결혼한지 만 2년 만에 사망하자 20대 초반의 왕소군은 흉노의 풍습에 따라 호한야와 다른 부인 사이에 태어난 복주루 선우와 재혼해 딸 둘을 낳는다. 딸 둘은 흉노의 귀족에게 시집가 높은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이후 왕소군은 한나라와 흉노 사이의 화친을 위해 활약했는데 그 성과가 적지 않았다. 왕소군의 형제는 한나라의 후작에 봉해지고 그 후 여러 차례 사신으로 흉노에 파견되었으며 이때 왕소군을 만나기도 했다. 왕소군의 두 딸도 장안으로 와서 입궐하여 원제의 왕후를 알현한 적이 있다. 왕망이 한나라의 정권을 탈취해 신나라를 세우자 흉노의 선우는 왕망을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하며 자주 침범했으므로 국경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왕소군은 자신의 노력으로 성립된 평화가 하루아침에 깨지는 상황에 절망해 끝내 사망하고 만다. 내몽골의 성도인 호화호특시 근처에 있는 그녀의 의관총(衣冠塚)의 전설에 의하면 가을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그 무덤의 풀만은 푸르름을 잃지 않기에 청총(靑冢)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 내몽골 호화호특시에 있는 왕소군의 무덤(의관총)과 동상은 중국의 역사왜곡 © 편집부

    ㆍ한나라의 상국인 흉노는 과연 누구일까?
    유목민족인 흉노는 상국인 조선과 북부여를 구성하는 유력 종족으로 조선의 서부에 있었고 흉노의 선우는 단군의 통제를 받는 존재였다. 중국의 민족분열정책으로 인해 우리는 흉노와 조선,돌궐과 고구리를 다 각각 다른 민족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들은 본시 조상이 같은 종족으로 한 국가였다. 중국은 조선과 고구리가 다민족연방국가라는 실체를 없애기 위해 사서에 종족의 이름만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는데 있어 당시 북부여 해모수 단군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한서>에“북맥과 연나라 사람이 와서 날래고 용맹한 기병으로 한을 도왔다(北貉燕人來致梟騎助漢)”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의 맥은 바로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유방이 항우와의 싸움을 끝내고 한나라를 세운 것이다. 남흉노가 유방을 백등산에서 1주일간이나 포위한 이후 화친의 대가로 많은 조공을 받아냈으나 무제 때 그 약속을 파기하고 흉노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로 인해 전한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흉노의 세력도 크게 위축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B.C 108년에 있었던 우거와의 전쟁이었다. 무제는 전쟁에서 참패했으나 우거의 신하들이 왕을 죽이고 투항하는 어부지리로 잠시 그 땅의 제후로 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 연전연승하자 그 존재는 미미해졌으며 특히 조공의 일환으로 B.C 33년 왕소군이 남흉노에 보내진 이후 한나라와 흉노는 60여 년간 평화적 관계에 있었다. 남흉노는 북부여의 남쪽에 있는 종족을 그렇게 표기한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식민지 한사군이 그대로 존재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지 않겠는가? 만일 그런 상황이었다면 남흉노와 한나라 간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왕소군 이야기가 주는 역사적 의미는 한나라는 남흉노의 속국과도 같은 존재였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흉노 전체의 상국인 북부여 땅에 식민지 한사군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니겠는가?
    ▲ 호화호특시 왕소군 기념관에 있는 왕소군과 흉노의 복장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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