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 않고 달려왔는데…이제 그만 포기해야 할까요
 | Q 35세 주부입니다.
지금껏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스물아홉에 직장과 야간대학원을 다니며 결혼했고 허니문 베이비가 생긴 후 아이를 돌보며 논문 써서 대학원을 휴학
없이 마쳤습니다.
갑상선 암에 걸려 심적 고통이 컸지만 그 와중에도 학술책 한 부분을 쓰게 돼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문제는 대학원 졸업 후에 찾아왔습니다.
입사 시험에 계속 낙방을 하는 겁니다.
가족들은 건강도 좋지 않으니 자꾸 일 벌이지 말고 애나 잘 키우라 합니다.
성격상 주부 역할만 하면 오히려 더 힘들 것 같아 계속 도전하고 있는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스트레스가
큽니다.
이제 그만 포기해야 할까요.
스트레스와 고민을 어떻게 풀면 좋을까요.
A 사람 마음의 움직임과 관련한 중심 단어는 무의식과 시스템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모두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무의식과 시스템의 영향을 부지불식간 받는다는 얘기
입니다.
무의식과 시스템은 대체 어떤 녀석들일까요.
무의식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뇌의 활동입니다.
뇌의 절반은 자동으로 작동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내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꿈을 생각하면 됩니다.
꿈꾼 기억이 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은 하루 평균 30분 꿈을 꿉니다.
현실적인 내용이 나오기도 하지만 아주 황당하고 기괴한 꿈을 꾸기도 합니다.
내가 내 마음을 다 통제하고 있다면 꿈 내용도 정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건 불가능합니다.
꿈이란 내 의지가 닿지 않는 영역인 무의식이 자체 제작하는 단편 영화인 셈이죠.
꿈꿀 때만 무의식이 작동하는 건 아닙니다.
눈을 감고 내 머리 속을 들여다 보면 끊임 없이 여러 생각이 들락날락 합니다.
내 의지와는 무관합니다. 오히려 그 생각을 없애려 노력해도 잘 되지 않으니까요.
이처럼 내 마음인데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 것도 무의식의 반응입니다.
이와 반대로 보자마자 괜히 싫고 미운 사람 역시 무의식의 반응입니다.
내가 결정한 것이라 믿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왜 그런 선택과 반응을 보였는지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럼 시스템은 뭘까요.
무의식이 내부적인 그리고 생물학적인 영향력이라면 시스템은 외부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영향력입니다.
사회에서 의미있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이 언어를 통해 개개인에 영향을 끼치고 점점 확대돼 큰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시스템이 주는 메시지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절대적 가치라 믿어지던 게 채 반 세기도 지나기 전에 완전히 반대되는 가치에 자리를 내주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란 말이 그렇습니다.
요즘 이런 말 했다가는 큰일 나겠죠.
그러나 20년 전 만해도 여성이 여성에게도 흔히 하던 말이었습니다.
여자는 조용히 집에서 남편 내조하는 게 의미 있는 삶이라는 시스템의 메시지가 개인에게 영향을 준 것입니다.
페미니즘은 그 시스템의 메시지에 반격하는 새로운 메시지입니다. ‘
여성은 남자의 보조자가 아니고 남자보다 약하지 않다’란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진 겁니다.
또 과거에는 여성이 한 살 연하인 남성과 결혼해도 창피하다며 수십년을 숨기고 살기도 있는데 요즘은 서너살 연하남과 교제하고 결혼하는 건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연하남과 사귀는 게 능력있고 멋있는 여성이라는 느낌마저 줍니다.
우리 마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시스템의 메시지가 이렇게 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스템과 무의식이 나도 모르는 사이 서로 내통하기도 합니다.
사회가 주는 메시지와 무의식 속에 내재된 본능이 서로 엉켜 내 마음에 자리잡고는 나를 움직이는 겁니다.
오늘 사연은 가치에 대한 고민입니다.
시스템과 무의식에 대해 길게 설명한 건 내가 믿고 있는 가치라는 게 어떤 요소의 영향을 받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현대사회를 피로사회라고 하죠.
‘성취한 만큼 내 가치가 인정된다’는 메시지를 좇아 달려가다 보니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아 마음이 피로해진다는 말입니다.
그저 힘들고 마는 게 아니라 과도한 스트레스는 갑상선암 발병처럼 몸에도 위험 요소로 작용합니다.
심리 상담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자신의 내부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겁니다. 이를 자아 분리(ego-splitting)라고도 합니다.
자아는 내가 나를 나라고 인식하는 영역입니다.
내가 주변과 반응하고 생각하는 주체죠.
이를 두 개로 나누는 훈련을 하는 겁니다.
하나는 삶을 경험하고 실제 살아가는 자아 또 하나는 그 삶 속의 자아를 관찰하는 자아로 말입니다.
내가 나를 모니터링하는 능력을 키우는 겁니다.
모니터링 능력이 커지면 삶의 여유가 생기고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채찍질만 해대는 무의식과 시스템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연으로 돌아가보면 성취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직장,야간대학원,결혼 그리고 임신한 상황에서 대학원 졸업까지 정말 성실하게 삶을 살았군요.
일단 스스로를 대견하다 칭찬해 주세요.
지금 마음 속에서 겪는 갈등의 본질은 취직이 안됐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 내부에 존재합니다.
성취 위주로만 달려가는 삶이 옳은가 하는 반문을 내부에서 하는 것입니다.
한 연구에선 행복은 성취가 아니라 몰입이라고 합니다.
현실에 대한 몰입 말입니다.
처음 몰입한 일이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바뀌면 오히려 현재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고 현재를 좁게 만들어 버립니다.
행복은 현재에 존재하는 거니까요.
내가 나를 바라보는 능력을 키우는 건 바로 이 현재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는 겁니다.
목표를 정해 놓고 성취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열심히 사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성취에 방해가 됩니다.
현재에서 행복을 못 느끼면 결국 성취의 핵심 요소인 삶의 의욕이 줄어 창조적인 마음마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세상을 주도한 미 실리콘밸리에서‘위즈덤(wisdom) 2.0’(첨단기술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소통의 장)이나 ‘disconnect to connect’(온라인과의
단절) 같은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마음 수련법을 디지털 세대에 적용하고자 하는 노력들입니다.
디지털 세상을 주도하는 실리콘밸리 경영자들이 나를 바라보는 능력을 키우는 고전적이고 아날로그적인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취를 못 할 것 같은 다시 말해 좌절에 대한 두려움이 내가 지금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현재 즐길 수 있는 것에 몰입할 것을 권합니다.
사람은 또 다른 사람과 연결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낍니다.
아마 자녀가 그런 특별한 사람이겠죠.
자녀와 깊은 연결고리를 만드세요.
아이의 작은 표정 하나하나를 잘 관찰해 보세요. 행복 에너지를 충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현재에 몰입할 때 나를 압박해오는 불안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파도타기 하듯 즐기며 계속 도전하세요.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룰 곳에서 연락이 올 것입니다.
☞ Joongang Joins Vol ☜ ■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yoon.snuh@gmail.com
草浮 印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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