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힐링 시대 마음의 고전

29 알렉시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浮萍草 2014. 3. 30. 11:04
    초기 미국서 ‘계급 없는 사회’ 가능성 발견한 선견지명
    테오도르 샤세리오(1819~1856)가 그린 토크빌의 초상화(1850년 작품)

    『미국의 민주주의』의 한글판(왼쪽)과 영문판(2003년 펭귄 클래식판) 표지.
    1831~32년 요즘으로 치면 대학원생 나이였던 알렉시 드 토크빌(1805~1859)은 미국의 교도소 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9개월 동안 당시 미국 24개 주 중 17개 주와 캐나다를 방문했다. 핑계였다. 그의 관심은 미국의 사회와 정치였다. 토크빌은 민주주의 혁명이 700년 전부터 역사의 대세로 전진하고 있다고 봤다. 귀족은 미래가 없었다. 언젠가 모든 특권을 상실한 운명이었다. 하지만 유럽은 공화주의·민주주의가 갈지자 걸음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있었다. 유독 미국만 ‘잘나가는’ 이유가 뭘까. 이게 토크빌의 의문이었다. 미국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큰 화젯거리였다.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지만 사실 미국에 대해 아무도 잘 몰랐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토크빌은 미국의 정치·법·경제·문학·종교·신문·관습을 샅샅이 훑었다. 그 결과 탄생한『미국의 민주주의(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 Democracy in America』(1835, 1840)는 미국 대학생들의 필독서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미국학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이론의 최고 고전으로 손꼽힌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토론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제34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 대통령 이래 모든 대통령들이 토크빌을 인용했다. 미국 좌파·우파 모두 그를 인용한다. 식자층이라면 누구나 들어본 메시지가『미국의 민주주의』에 담겨 있어 설득력 확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ㆍ다른 점 포착해 그 이유와 의미 일반화 토크빌은 비교에 강했다. 다른 점을 포착하면 ‘왜 다를까’ ‘다르다는 게 무엇을 의미할까’하는 질문에 답하는 일반화에 귀신 같은 재주가 있었다. 1835년 영국과 아일랜드를 여행한 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프랑스인은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바라지 않는다. 영국인이 바라는 것은 자신보다 못난 사람이다. 프랑스인은 항상 불안스러운 눈으로 위를 쳐다본다. 영국인은 만족스럽게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토크빌이 대면한 미국은 유럽,특히 프랑스와 아주 달랐다. 미국이 지배하는 것은 “조건의 평등(equality of conditions)”이었다. 사회적 신분이나 재산과는 상관없이 미국인들은 주위 다른 사람들만큼 자신이 훌륭하거나 더 훌륭하다고 자부했다. 미국인들에게 분수(分數)라는 것은 없었다. 분수는“사물을 분별하는 지혜”이자“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다. ‘자신의 신분에 맞게 자신의 주제를 아는 것’이 분수라는 단어가 말하는 지혜인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관념이다. 미국인들의 물질주의도 눈에 확 띄었다. 토크빌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인들은 땅 위의 모든 것이 가치 있다고 본다. 딱 이 한가지 질문에 대한 답과 관련해서다. ‘이것으로 돈을 얼마나 벌 수 있을 것인가.’” 유럽의 귀족들은 상대적으로 돈에 관심이 없었다. 반면 경제적 미래·희망이 없는 노동자를 비롯한 하층 계급은 생존에 급급했다. 토크빌은 미국에서 국가와 종교가 분리된 것도 민주주의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봤다. 분리의 결과로 종교가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토크빌은 가문의 종교인 가톨릭과는 일정한 거리를 뒀지만 유신론자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神)은 인간을 완전히 독립적이거나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을 운명의 선(線)이 둘러싸고 있다. 누구도 그 선을 넘을 수 없다. 하지만 선 안쪽에서는 누구나 힘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ㆍ냉전기 미국 보수·진보 모두의 아이콘 토크빌에겐 ‘민주주의의 노스트라다무스’라고 불릴 만한 명성이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유럽의 미래라고 확신했다. 미국의 노예제 문제를 두고 “역사상 가장 끔찍한 내전”이 발생할 수 있다고 예견했다. “언젠가는 미국이 지구 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나라 중 하나가 된다”고 내다봤다. 미 소 냉전도 일찌감치 점쳤다. 때가 되면 미국과 러시아가 지구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며 이는 신의 섭리라고 주장했다. 냉전기간에 토크빌은 마르크스주의에 맞서는 아이콘적인 인물이었다. 역사가 검증한 토크빌의 예측은 마르크스주의 역사발전론이나 사회과학의 ‘예언력’에 대항하기에 충분했다. 토크빌은 1848년 9월 프랑스 제헌의회에서 사회주의를 공격한 바 있다. 게다가 토크빌이 ‘계급 없는 사회’를 주장한 것도 서구의 보수주의·진보주의 모두에게 큰 강점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을 방문한 영국 작가 프랜시스 트롤로프(1779~1863)가『미국인의 가정 매너』(1832)에서 그린 미국은 토크빌의 미국과 대조적이었다. 트롤로프에게 돈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미국은 야만과 문명의 경계에 놓인 곳이었다. 길도 나쁘고 음식도 형편없었다. 이처럼 별볼일 없어 보이던 미국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데 토크빌의 학문적 위대함이 있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칭찬만 한 것은 아니다. 물질주의와 지나친 개인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고 봤다. 토크빌에게는 자유가 최고의 가치였다. 자유와 평등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는 자유를 선택했으리라. 그런 토크빌이기에 그는 평등에 대한 지나친 강조의 결과가 민주주의를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이나 ‘연성(軟性) 독재(soft despotism)’가 변질 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프랑스 노르망디 귀족 출신인 토크빌은 왕정과 공화정을 오가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살았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쭉 그랬다. 토크빌은 공화주의자·민주주의자였지만 그의 가문은 왕당파였다. 다수 일족이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죽거나 망명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는 새로운 정치학이 필요하다”고 말한 토크빌은 정치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지만 정치학보다는 사실 정치나 출세에 더 관심이 많았다. 『미국의 민주주의』 출간으로 돈도 꽤 벌었고 국회 진출에 필요한 지명도도 높였다.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제2공화국 헌법 초안 입안자 중 한 사람이 됐다. 1849년 6월 3일에서 10월 31일까지 짧지만 외무부장관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무당파에 가까웠고 사상가였던 그는 정치 현실을 헤쳐가는 데는 미숙했다. ‘철인 정치’라는 이상은 현실 앞에 무력했다. 토크빌의 정치 참여에 대해 ‘재능 낭비’였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토크빌은 영국 평민 여성과 결혼했다. 틈틈이 바람을 피워 부부 사이에 위기도 있었다. 평생 골골거리며 병치레가 끊이지 않았던 그는 결국 결핵으로 사망했다.
    토크빌에게 평등은 민주사회의 조건이자 팩트이자 원칙이었다. 오늘날 거의 모든 민주국가들이 평등의 위기를 겪고 있다. 민주주의의 바탕은 평등과 자유의 균형이다. 평등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낳는다는 점에서『미국의 민주주의』는 모든 민주 시민이 기억해야 할 책이다. 토크빌의 예언 중에는 빗나간 경우도 많다. 하지만 관찰,자료 수집과 분석,토론으로 구성되는 그의 방법론은 교과서적인 모범을 제시한다. 직장인을 포함해 변화를 읽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용한 모델이 『미국의 민주주의』에 있다.
    Sunday Joins Vol 368 ☜        김환영 기자 whanyung@joongang.co.kr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