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文化財사랑

우리나라 기록관리의 역사

浮萍草 2013. 10. 15. 16:38
    ㆍ우리나라 기록관리의 전통 대국가에서부터 문화가 융성하여 삼국 모두 역사를 편찬했고 특히『삼국사기』를 보면 태종무열왕 7년부터는 월별 기사에서 탈피하여 날짜별 기사가 등장 하는데 이는 사관이 기록한 것을 토대로 편찬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사』에는 춘추관 소속 관직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이 때 편찬된 실록들이 조선초기까지 현존하고 있었다. 고려시기부터 전왕이 승하하면 감수국사 이하 편수관을 임명하여 실록을 편찬하였음이 분명한데 감수국사 최보순 수찬관 김양경·임경숙 등이 명종실록(19대)을 편찬하여 춘추관과 해인사에 각각 보관하였다는 기록에서도 증명된다 하겠다. 이렇듯 실록이나 귀중한 국가 기록물들은 원본과 부본으로 제작하여 분산 보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말 예문춘추관은 조선조 태종 때 이를 분리 독립시켰다. 예문관 소속 최고 관직인 영사는 영의정이 직제학은 도승지 응교는 홍문관의 교리 이상이 겸하였고 그 아래 7품 이하 봉교·대교·검열 8명을 한림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바로 사관이었다. 신규 급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사관을 선발하였고 이들이 작성한 사초가 곧 실록편찬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한편, 춘추관은 역사를 편찬하는 기구이자 국가기록물을 보존하는 곳이기도 했다. 춘추관에 예속된 관직의 면면을 보면 3정승을 비롯하여 판서 2명, 참판 2명과 당상관으로 구성된 수찬관 7명이 있고 그 아래 실록을 편찬할 때 초벌 원고를 책임 지는 편수관 및 기주관과 기사관 등을 두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춘추관은 이들 52명과 전임사관인 한림들을 합쳐 60명 정도가 활약하고 있었다. 52명의 겸춘추는 핵심 관청 요직으로 일하던 관료들이 망라되며 이들 역시 사관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겸사관이라 불렸다. 여기에서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은 25대 철종까지 472년간의 기록으로 총 1,893권 888책의 방대한 양이다. 실록청이 설치되면 각 방 실무자인 낭청이 실록 초안을 작성하고, 지휘 감독을 맡은 각방 당상들이 이를 검토한 후 총괄하는 곳에 넘겨 최종 원고가 완성되는 체제 이다. 춘추관에서 매일 기록한 시정기 사관들의 사초 승정원일기·의정부등록 등과 같은 정부 기록물은 물론이고 개인 문집까지 자료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근간이 되는 것이 사초이다. 사초와 시정기는 모든 사실을 직필한 극비 문서이기 때문에 사관 외에는 열람이 금지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관청별 업무일지도 매우 자세하게 작성되었는데 일기 혹은 등록이란 이름으로 전해진다. 승정원일기를 비롯하여 일성록·의정부등록·비변사등록 등이 그것이다. 실록은 사초와 시정기 등을 기초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취사선택과 첨삭이 가해지지만 일기와 등록류는 현장에서 바로 기록한 생생한 자료이다. 승정원일기는 왕명을 출납하던 국왕 비서실 일기인데 1623년부터 1910년까지의 왕명 출납 제반 행정사무 의례적 사항들을 촘촘히 기록했다. 일성록은 1752년부터 1910년까지의 국왕 동정과 국정의 제반사항을 기록한 일기체 연대기이며 비변사등록은 조선시대 중·후기 최고 회의기관이었던 비변사의 업무 일지이니 오늘날 국무회의록이나 다름없다. 의정부등록은 조선중기 이후 의정부에서 행한 각종 정사와 전례를 기록한 것으로 1646년에서 1859년까지 214년간의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아울러 조정의 소식지인 조보가 있었는데 오늘날 정부 발행 관보와 유사하다. 현재 가장 오래된 조보는 조선 중종 때의 것이며 고종 때까지 발행되다 갑오개혁으로 ‘관보’로 바뀌면서 없어졌다. 매일 발행되었으며 한문 초서체에다 간혹 이두식 표현을 섞어 쓰기도 하였고 현직·전직 고위관리들에게만 배포되어 일반 대중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았다.

    ㆍ전통시대 기록관리 체제와 그 의의
    오늘날 기록물관리에 있어 큰 전환점을 맞은 것은 1999년 ‘공공기관의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99. 1. 29)’의 공포이다. 광복이후 지금까지 기록물 보존관리는 생산과의 연속적인 차원에서 마련되지 못한 면이 크다. 제헌헌법 원본의 행방이 묘연한 것은 물론이고 외국과의 조약문 원본이 없어진 것만도 부지기수란다. 보존에 있어 한 번의 실패는 영원한 마멸을 뜻하기에 법고창신 정신을 넘어서는 획기적 조치가 요구된다 하겠다. 근대적인 기록보존 기구를 최초로 설립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프랑스 혁명당시 기록물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1798년에 기록보존기구를 설립하였으며 이듬해 Archives Nationals로 명칭을 정했다. 이후 각국에서도 유사한 기구들이 창설되어 수집 보존 전쟁을 치르며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의 기록관리 전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가장 돋보이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사고史庫 운영이었다. 편찬된 실록은 궁궐 안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전주·성주·충주사고에 각각 나누어 보관했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만 유일하게 보존되었고, 새로이 5부를 만들어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사고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으로 춘추관실록은 불탔고 오대산본은 일제 강점기에 동경제국대학에서 보관하다 관동대지진 때 거의 소실되었다. 또한 장서각에서 보존하던 적상산본은 한국전쟁 당시 행방불명이 되었으나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는 왕실족보인 선원보를 비롯하여 여타 중요 기록물까지 함께 보존하는 시설인데 통풍이 잘 되는 건물에다 일정 분량씩 나눠 나무상자 속에 넣어 보관하였다. 기록물들을 붉은 보자기로 싸고 다시 기름종이로 덮었다. 부식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 다음 천궁이나 창포가루 같은 약재를 함께 넣었는데 이는 충해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한 궤짝에 3斗 6升 5合 혹은 2斗를 넣었다니 꽤 많은 양으로 대비했음을 알 수 있다. 책과 책 사이는 초주지草注紙 두 장씩 놓고 포갰는데, 습기나 다른 피해로부터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습기는 책을 보관하는데 가장 해로운 적이다. 따라서 기름먹인 종이 6장을 붙인 포대 9개로 책을 보호하기 위해 씌워서 상자에 담았다. 그리고 안쪽에 싼 보자기는 5년마다, 표면을 싼 보자기는 2년마다 갈아주었다. 참으로 우리 조상들의 혜안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아울러 정기적인 포쇄도 실시했다. 바람을 쐬고 햇볕을 쬔다는 뜻이나 서늘한 그늘에서 하루 이틀 정도 말리는 것을 말한다. 3년 주기의 포쇄 때에는 반드시 사관이 입회하도록 되어 있었다. 당시 사고를 관리했던 기록인 형지안(形止案)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렇듯 보존에 만전을 기하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옛 법전인《경국대전》에는 춘추관 시정기를 비롯한 기록물 작성과 보관에 관한 사항 각 기관에서 비치해야 할 일반 공문서 관리 등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데 중요한 외교문서는 물론이고 주기적으로 작성되는 호구안(戶口案)과 양안(量案) 각급 행정·군사기관에서 작성되는 문서의 보존 관리규정까지 명문화하고 있는 셈이다. 병인양요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했을 때 집집마다 쌓아 둔 다양한 서적들을 보고 그 나라 병사들이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우리 선조들의 기록문화는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각종 문집이나 족보 등과 같은 다양한 기록물들이 쏟아져 나오게 한 배경에는 금속활자뿐만 아니라 목판인쇄술이 크게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물들이 지금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목판을 오랜 기간 바닷물에 적셔 방부처리 한 것도 있지만 실제 대장경을 보관했던 팔만대장경판고 시설을 먼저 살펴봐야 우리 조상들의 슬기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공기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순환하려는 역학을 적용하여 밖의 차가운 공기와 안의 따스한 공기가 서로 순환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요체인데 경판에 옻칠을 하거나 환풍 습도 온도 등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독특한 장경각의 위치와 경판의 배열에 대한 완벽한 조화는 물론 장경각 지하에 다량의 숯과 소금으로 마무리 하여 현대 건축가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라 한다. 민가에서는 족보 보관 또한 매우 신중을 기했다. 대개의 족보는 나무 상자로 만든 함에다 보관하였지만, 장방형 석재로 묘소 앞에다 따로 족보함(광산김씨)을 만든다거나 깊은 절벽바위에 보관함(고성이씨)을 설치 하는 사례까지 있으니 우리 선조들의 기록물 보존 정신이 매우 강인했음을 알 수 있겠다. 유네스코에서 인정한 세계 5위권의 기록강국 저력은 바로 이런 정신에서 출발한 것이다. 우리는 선조들에게 본받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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