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한국의 기도도량

34. 금수산 정방사

浮萍草 2013. 7. 29. 10:35
    제비집 닮은 도량의 관음, 번뇌 물고 온 중생심에 신심 날개 달다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뜻 ‘정방사’ 신라 문무왕 2년 의상대사 제자 정원 스님 창건한 관음기도도량
    일주문 따로 없다. 길 사이에 둔 바위 2개가 일주문이다. 들어서면 큰 근심과 작은 근심 내려놓는 해우소가 오묘한 냄새와 함께 객을 반긴다.

    의상대라 불리는 큰 바위에 기댔다. 800m 신선봉
    능선 자락에 제비집처럼 앉았다. 어미 제비는 새끼를
    위해 부지런히 집 짓고 먹이를 물어다 준다. 비단 깔아
    놓은 산에 매달려 발아래 청풍호를 둔 관세음보살이
    번뇌 물어온 중생의 마음을 덜어 주리라.
    단(錦) 수놓은(繡) 금수산(錦繡山)이 장마를 만났다. 짧고 굵었던 만남이 아쉬웠던 장맛비가 입을 맞췄다. 비단에 초록빛이 물들었다. 금수산은 부끄럽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비구름으로 감췄다. 떠나는 길 서성이는 장마가 보란 듯 비로 정갈하게 씻고 머리를 빗어 넘겼다. 그렇게 금수산 초목은 한여름의 초록빛깔을 수줍게 내밀었다. 미련 없이 떠나라는 배웅이다. 금수산은 약 500년 전까지는 백암산(白巖山)이라 불렸단다. 퇴계 이황(李滉)이 단양군수로 재임할 때 그 경치가 비단에 수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해서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능강계곡 옆에 두고 정방사 오르는 길이 마냥 아름답다. 오락가락 하던 빗줄기가 잠시 멎었다. 청풍호를 옆에 끼고 청풍호로를 달리다 청풍대교 건너기 전 왼쪽으로 접어들면 정방사 표지석이 군데군데 서 있다. 비포장 산길을 차로 5분 정도 올라 주차장에 닿으면 금세 정방사다. 뜰에서 내륙의 바다 청풍호 보면 월악산 긷고 손엔 구담봉 든 듯 지장보살 등 뒤 마애지장불 이색
    일주문이 따로 없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선 바위가 있을 뿐이었다. 바위들 틈으로 들어서자 큰 근심과 작은 근심 내려놓는 해우소가 오묘한 냄새와 함께 객을 반겼다. 일주문이 세속 번뇌 밖에 두고 부처님 향한 마음만 품고 오르라는 경책이니 바위들이 일주문인 셈이다. 좁은 길은 돌계단으로 이어졌고 왼쪽으로 종무소 겸 공양간, 오른쪽엔 종각이 자리했다. 장맛비가 다녀간 탓인지 길도 도량도 말끔했다. 도량 안은 관세음보살만을 부르는 노래가 넘실댔다. 종각에서 나무로 만든 계단을 오르면 우측부터 작은 법당들이 옆으로 나란했다. 다실인 청풍루, 스님이 기거 중인 유운당, 주법당인 원통보전 나한전이 의상대라 불리는 큰 바위에 기댔다. 800m 신선봉 능선 자락에 제비집처럼 앉은 게다. 이채로웠다. 정방사 뜰 곳곳엔 나무의자가 있었다. 왜일까. 의자에 앉으니 의문이 풀렸다. 정방사 아래로 바다 같은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내륙의 바다 청풍호다. 순간, 생각이 멎었다. 가슴을 가득 메운 풍광은 마음 안에 잡생각 끼어들 틈도 주지 않았다. 운무와 비구름에 휩싸인 왼쪽 구담봉이 정면 월악산이 아스라이 보였다. 하늘이 허락했다면 멀리 월악산과 구담봉 청풍호를 한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산 계곡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바람을 타고 퍼지는 모습은 영혼까지 송두리째 흔들었다. 정방사 뜰 앞 풍광은 지금이나 예나 남달랐다. 비단 객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중기 학자 삼연 김창읍도 정방사 뜰 앞 풍경에 감복했단다. 붕당의 시기, 형들과 달리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김창읍은 36세인 1688년 4월3일 정방사를 찾았다. 그는 모두 네 편의 시를 남겼다. “창으로는 월악산을 긷고 손바닥에는 구담봉을 올려놓았네”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구름이 머물다 간다는 유운당(留雲堂) 주련에 시도 정방사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을 노래했다. 양무제가 호를 은거(隱居)로 쓰던 양나라 도홍경이 구곡산에 숨어 세상에 나오지 않자 산중에 무엇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답한 시라고 한다. “산중하소유(山中何所有) 산중에는 무엇이 있을까 영상다백운(嶺上多白雲) 산마루 흰 구름 많이 머물러 있구나 지가자이열(只可自怡悅) 다만 나 홀로 즐길 수 있을 뿐 불감지기군(不堪持寄君) 그대에게까지 바칠 수가 없구나.”
    또 다른 시도 있었다. “고무고천환반저(高無高天還返底) 높음이 하늘보다 더 높은 것 없으나 도리어 밑으로 돌아가고 담무담수심환묵(淡無淡水深還墨) 맑음이 담수보다 더 맑은 것 없으나, 깊으니 도리어 검도다 승거불지소무욕(僧居佛地少無慾) 스님은 불국정토에 있으니 조금도 욕심이 없고 객입선원노불비(客入仙源老不悲) 객이 신선 사는 곳에 들어오니 늙음 또한 슬프지 않구나.”
    수행자의 밤낮 없는 정진을 당부하기 위해 눈 뜬 물고기를 본 떠 만든 풍경이 정적을 깼다. 잠자코 침묵하다 바람결을 만난 게다. 원통보전엔 세 개 편액이 걸렸다. 정방사 원통보전 유구필응(有求必應) 유구필응에 시선이 머문다. ‘ 원하는 게 있다면 반드시 응답하리라.’ 원통보전에 모셔진 작은 관세음보살 앞에 삼배 합장을 올렸다. 정방사 뜰에 마음 두기만 해도 번뇌가 사라지니 온마음 관세음보살 앞에 고스란히 꺼낼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일찍이 이 절을 창건했던 스님도 이곳이 불법을 펴기 안성맞춤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 (左)그림자처럼 등 뒤를 지키고 섰다. 지장전 지장보살 뒤에 마애지장불이 있다. 은은한 눈빛의 지장보살 뒤에서 친근하게 웃고 있다.   ▲ (右)해수관세음보살. 청풍루, 유운당, 원통보전, 나한전을 차례로 지나면 마주한다. 관음보살이나 탑, 산신각이 청풍호를 굽어 보고 있다

    ‘청풍읍지’에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정방사는 도화동에서 오리허에 있으며 전해 오길 신승 의상 대사가 세운 절이라고 전한다. 동쪽에 큰 반석이 있는데 동대 또는 의상대라 부른다.” 그러나 실제 정방사는 의상 대사가 점지하고 제자가 세웠다. 정방사 안내글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2년(622) 의상 대사 문하 여러 제자 가운데 정원(淨圓) 스님이 창건했다. 정원 스님은 10여년이나 천하를 두루 다니며 부처님 법을 공부해 세상사 모두 무상임을 알고 부처님 법을 널리 펴고자 의상 대사를 찾아다녔다. 수소문 끝에 의상 대사가 원주에 있는 어느 토굴에서 수행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뵀다. 의상 대사는 큰 반석에 앉아 정진하고 있었다. 정원 스님은 절을 하고 여쭸다.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펴고자 합니다.” 스승은 말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여쭸다. “10여년간 부처님 가르침대로 수행해보니 부처님 가르침이 세간을 떠나지 않았고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펼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씀 올리고 다시 삼배하고 합장하니 그제야 스승이 입을 열었다. “네 원이라면 이 지팡이를 따라가다 멈추는 곳에 절을 지어 불법을 홍포하거라. 산 밑 마을 윤씨 댁을 찾으면 네 뜻을 이루리라.” 정원 스님이 고개를 들자 지팡이는 허공을 가르며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며칠 동안 산 넘고 물 건너 뒤를 따르니 지방이는 지금의 정방사 자리에서 멈췄다. 정원 스님이 보기에 과연 산세는 신령스럽고 흡사 범왕궁(梵王宮) 자리와 같았다. 즉시 산 밑 마을 윤씨 댁을 찾았다. 신이하게도 윤씨는 정원 스님을 보자 이런 말을 꺼냈다. “어젯밤 꿈에 의상이라는 스님이 구름을 타고 집에 오셔서‘내가 그대의 전생을 잘 알고 있소. 불연이 있어 말하니 내일 어떤 스님이 오거든 절 짓는데 도움을 주시오’라고 말한 뒤 구름타고 가셨소이다.”해서 정방사(淨芳寺)는 정원 스님의 ‘깨끗할 정(淨)’, 아름다운 산세를 지녔다는 뜻의‘꽃다울 방(芳)’을 써서 이름을 가졌단다. 원통보전을 나와 나한전과 원통보전 샛길로 걷자 해수관세음보살과 탑,산신각이 청풍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풍호가 내륙의 바다라고 하니 ‘해수관세음보살이 뜬금없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조금 더 발품 팔면 산신각 아래 지장전에 닿는다. 큰 바위 옆에 있는 지장전엔 주불 지장보살 등 뒤에 금빛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지장보살 뒤 바위에 마애불로 지장불이 새겨졌다. 은은한 눈빛의 지장보살 뒤에서 친근하게 웃고 있었다.
    정방사는 내륙의 바다 청풍호를 굽어보고 있었다. 도량 곳곳엔 청풍호를 감상할 수 있도록 나무의자를 비치했다.

    청풍루로 향했다. 주지 상인 스님에게 차를 청했다. 기도를 물었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는 목적 자체가 기도”라고 했다. 그리고 믿음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신도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절절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그 믿음이 생활로 이어지면 행복이 따라온다고 했다. 스님은 불연으로 부부의 연을 맺은 이야기도 꺼냈다. 모자가 정방사를 찾았다. 혼기가 찬 아들을 위해 관세음보살에게 100일 기도를 올렸고 몇 주 뒤 일요일 젊은 남녀가 정방사에 올라 스님에게 인사를 했단다. 남자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얼마 전 어머니와 왔던 그 아들입니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과 함께 왔습니다.” 스님은 “정방사 부처님이 맺어준 부부 인연”이라며 반갑게 맞았단다. 원통보전의 ‘유구필응’이란 문구가 새삼 떠올랐다. 비단을 깔아놓은 산에 매달려 발아래 청풍호를 둔 제비집 정방사. 관세음보살은 번뇌 물어온 중생의 마음 덜어 신심의 날개를 달아 주리라 믿는다. ‘유구필응(有求必應)’이다. 043)647-7399
    ☞ 법보신문 Vol 1204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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