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H/文化財사랑

朝鮮의 專門職 匠人

浮萍草 2013. 5. 29. 23:30
    ㆍ장인들의 세상살이
    신라 선덕왕은 국가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황룡사에 탑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국가의 위엄을 과시할 만한 탑을 만들 뛰어난 장인이 신라에는 없었다. 그래서 이웃 나라인 백제에 도움을 청했다. 백제의 장인 아비지(阿非知)는 소장(小匠)200여 명을 거느리고 황룡사 9층탑을 건립했다. 선덕왕은 아비지를 데려오기 위해 비단과 보물을 예물로 바쳤다. 선덕왕이 아비지를 초청하기 위해 예물을 바쳤으니 그의 사회적 신분이 매우 높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뛰어난 장인이라고 해서 신분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신라는 골품제도를 국가의 근간으로 받들었던 나라였다. 국가적 사업에 참여한 장인들의 신분은 4, 5두품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또한 일부 장인들에 국한된 것이었다. 장인은 일반적으로 실용 공예품을 만드는 일급 기술자들로 전통적으로 수공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을 말한다. 장인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 장인의 출현은 그 사회의 경제적 토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경제적 토대는 농업이었으며 공업의 경우 수공업이 중심이었다. 공장제 기계공업이 아닌 수공업이 공업의 중요한 토대였기에 장인의 출현이 가능했던 셈이었다. 조선시대의 경우에는 수공업도 분화되어 있었다. 당시의 수공업은 크게 일반 수공업과 궁정 수공업(宮廷手工業)으로 나눌 수 있다. 이를 다시 분화해 보면 관영 수공업 공장(工匠)수공업 사찰(승려) 수공업 농민 수공업 백정 수공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공장 사찰 백정의 수공업은 전업 수공업에 가까웠으며 농민 수공업은 부업적 수공업에 가까웠다.

    조선시대 장인들이 자신의 기술을 인정받는 경우는 대부분 국가적 사업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거나 양반들의 생활용품을 만드는 경우였다.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억제했으며 특히 신분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의 장인들은 대부분 관노출신이거나 양인출신이었다. 이들은 일정한 기간 동안 관청 수공업에 동원되어야 했으며 그 기간이 지나면 개인적인 수공업 경영에 종사했다. 물론 개인적인 수공업에 종사할 경우 국가에 일정한 장세(匠稅)를 냈다. 관노비의 경우 특별한 기술을 인정받는 경우 공천(公賤)을 통해 공장(工匠)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장인은 그 소속에 따라 경공장(京工匠)과 외공장(外工匠)으로 구분되었다. 경공장은 한성부에 장적(匠籍)을 둔 사람들이었고 외공장은 지방에 장적을 둔 사람들이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경공장의 장인의 수는 129개 분야 총 2,795명이었으며 외공장의 경우27개 분야 3,764명이었다. 129개의 분야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야장(冶匠) 칠장(漆匠) 목장(木匠) 사기장(沙器匠) 옹장(瓮匠) 피장(皮匠) 책공(冊工) 화공(畵工) 지공(紙工)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같은 국가 기록에는 장인들의 세상살이가 어땠는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데 묵재(默齋)이문건(李文楗)의 일기인『묵재일기』에는 비록 지방의 장인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세상살이가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일기에 따르면 장인들의 가장 큰 고충은 관역(官役), 장세(匠稅), 사역(私役)등이었다. 장인들은 국가가 정한 법에 따라 1년 중 일정한 기간 동안 관역즉 관영 수공업에 종사해야만 했다. 문제는 그 기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장인들을 관역에 복무시키는 관리들이 존재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관청에 내는 세금 역시 장인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사역은 관청이 아닌 양반들이 사사로이 장인들을 부리는 경우였다. 장인의 신분은 사회적으로 매우 낮은 위치였다. 따라서 장인들은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던 양반들의 사사로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관청과 양반들의 부당한 수탈과 대우는 결국 장인들의 기술 개발과 노동 의욕을 저해하는 걸림돌이었다. 신분이 천하다고 해서 기술이 천한 것은 분명 아니지만, 신분제 사회에서 장인의 기술과 노동은 천한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인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끝내 후세에 전파했고 그 노동의 결실이 한국의 생활문화 전반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장인들의 피땀이 없었다면 우리의 문화를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었던 배흘림기둥도, 고려청자도 팔만대장경도, 금속활자도 한지도 존재하지 않았을 터이다.
    ㆍ의미의 소통가치, 장인의 기술과 노동
    한때는 신분제와 상공업을 천시했던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장인들의 기술과 노동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다면 1876년 개항은 장인들에게 또 다른 시련의 시기 였다. 개항은 정치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생활경제의 구조적 변동이기도 했다. 서구의 근대화는 자본주의 경제체계였으며 이는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장제 기계공업을 근간으로 한다. 면암 최익현은 ‘서구에서 생산된 물건들이 조선을 점령하여 이 때문에 조선은 망하고 말 것’이라며 개항을 반대했다. 그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개항 이후 서구에서 대량생산된 저렴한 상품들이 조선을 점령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정책에 따라 공장제 기계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환경 속에서 우리는 대량생산되고 균질화된 저렴한 상품에 길들여져 갔다. 그런 과정 속에서 장인들의 기술과 노동은 몇몇전 수자들에 의해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며 자랑하는 나라에서 더 이상 활자로 된 책을 만나보기 힘든 실정이다. 활자로 된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금속활자를 만드는 야장 글자를 정확하고 촘촘하게 배열하는 균자장(均字匠) 인쇄를 담당하는 인출장(印出匠) 글자를 주조 하는 각자장(刻字匠) 구리를 주조하는 주장(鑄匠) 주조된 활자를 말끔하게 다듬는 조각장(彫刻匠) 인쇄 판형을 만드는 목장(木匠) 종이를 재단하는 지장(紙匠)등의 협업이 필요하다. 디지털화된 활자로 디지털 인쇄기를 통해 책을 만드는 요즘의 현실에서 보면 대단히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특정한 기술과 노동을 자본의 교환가치로 판단하는 시대에서 옛책의 제작 방식은 박물관에서나 가끔씩 재현되는 역사 체험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하지만 장인의 기술과 노동은 자본의 교환가치가 아니라 의미의 소통가치이다. 그것은 세대 간의 감성과 문화를 교감할 수 있게 만드는 신비로운 연금술인 것이다. 참고문헌< 김경란, 「조선 후기 良役政策의 전개와 匠人파악의 변화」,『한국사학보』 29,2007 옥영정, 「조선시대 인쇄관청 活字印刷匠人연구」,『한국문화』 47, 2009 이정수, 「『默齋日記』를 통해 본 지방 匠人들의 삶」, 『지역과 역사』 18, 2006 사진. 문화재청
    문화재청         글. 이승원 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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