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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浮萍草 2013. 5. 19. 11:38
    삶의 찌든 때 훌훌 털고 싶은 이들의 필독서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한 헤세의 사진.(연대, 작가 미상)

    『싯다르타』의 한글판(왼쪽·홍성광 옮김,현대문학
    출간)과 독일어판(1922) 표지.
    혜는 지식에 세월과 경험을 더한 결과물이다. ‘지혜=지식+세월+경험’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초등학생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을 지식으로는 알 수 있다. 지혜 차원에서 이 말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수많은 세월과 허다한 경험이 필요하다. 지식도 강하지만 지혜는 더 강하다. 더 강한 만큼 얻기도 더 힘든 게 지혜다. 독일 출신(1923년 스위스 국적 취득) 작가 헤르만 헤세(1877~1962)가 『싯다르타』에서 말하고자 한 핵심 중 하나는 다음 두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지식은 주고받을 수 있으나 지혜는 그렇지 않다.” “지혜를 발견할 수 있고 지혜로 인해 강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지혜를 통해 놀라운 일을 할 수도 있으나 지혜에 대해 말하거나 지혜를 가르칠 수는 없다.” 헤세의 말이 맞는다면 학교에서도 종교에서도 지식은 배울 수 있으나 지혜는 배울 수 없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남에게 지혜를 전달할 수 없다.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는 부처를 만난다. 싯다르타는 부처의 가르침을 100% 인정하며 부처가 성불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부처의 제자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지혜는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철저한 자력 신앙을 표방한다. 그러나 『싯다르타』의 싯다르타는 사문, 창녀, 뱃사공, 강물 등 만나는 모든 존재를 스승으로 삼는다.) 소설 『싯다르타』에 대해 전혀 들어본 바가 없으면, 무슨 말인지 헷갈릴 것이다. 정확하기로 이름난 한 백과사전도『싯다르타』를 “석가모니의 초기 생애를 그린 서정 소설”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싯다르타는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 태자 때의 이름인데『싯다르타』는 석가모니와 동시대 사람인 또 다른 가상의 동명이인 싯 다르타를 주인공으로 삼은 단편 소설이다. 싯다르타는 ‘목표를 발견한 자’,‘목표에 도달한 자’,‘존재의 의미를 발견한 자’라는 뜻이다. 어쩌면 싯다르타라는 이름 자체에 ‘목표를 발견하는 게 곧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라는 인생살이 비결이 담겼다. ㆍ 60~70년대 미국 反문화 운동의 지주
    인생에는 ‘존재의 의미’ 같은 숭고한 목표 말고도 권력·부·명예 같은 세속적인 목표도 많다. 이런저런 처세술과 전략으로 무장하고 아등바등 적극적으로 나서야 겨우겨우 권력·부·명예의 ‘부스러기’라도 얻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쉽다. 그러나 헤세는『싯다르타』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고, 기다리고, 단식하는 법을 알면 누구나 마술 같은 일을 할 수 있으며 누구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말에서 단식은 단식 그 자체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자기 절제’를 상징한다. 헤세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을까. 명예가 목표였다면 달성했다. 헤세는 20세기 독일·스위스 작가 중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했다. 194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헤세는 ‘스승은 오직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지만 1960~70년대 미국 반문화(counter-culture) 운동의 기수들은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대학생이나 히피족 반전운동가,동양의 철학·종교·신비주의에 흠뻑 빠진 지식인들의 책장에는 반드시 1951년 영역된 『싯다르타』 가 꽂혀 있었다. 읽건 안 읽건『티베트 사자의 서』나『갈매기 조나단』과 더불어『싯다르타』를 소장한다는 것은‘난 이렇게 쿨(cool)한 사람이야’ 라는 선언이었다. 헤세,『싯다르타』를 모르면 ‘간첩’이었다. 사실 독일어권에서 헤세에 대한 관심은 1950년대에 시들해졌다. 영어권에서 주목 받자 헤세 열풍은 독일로 역수입됐다. 문학과 사회에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었다. 반항과 저항의 시대를 살던 당시 사람들에게 85세에 뇌출혈로 사망한 헤세의 삶은 송두리째 열광할 만했다. 어려서부터 조숙하고 반항적이었다. 아버지와 갈등도 심했다. ‘자살하려고 하니 권총 살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아버지에게 보내기도 했다. 12세에는 집안이 바라는 목사가 아니라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15세 때 실연 때문에 자살을 기도했다. 헤세가 학교에 다니는 것을 그만둔 것은 13세 때였다. 입학한 첫해부터 우울증에 시달렸다. 작가로 성공하기 전까지 탑시계를 제작하는 공장의 견습공 책방 직원으로 일했다. 전쟁·군국주의·민족주의에 반대한 결과 ‘악플 편지’에 시달렸다. 저서들은 1939년 독일에서 판금됐고 1943년에는 나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ㆍ 『연금술사』의 코엘류에게도 구원의 빛
    헤세는 세 번 결혼했는데 아내나 자식들과 행복하게 살기에는 정신적인 고통이 너무 심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싯다르타』의 경우 1부는 쉽게 썼지만 2부는 극심한 우울증의 고통 속에 완성됐다. 헤세 스스로에게 필요한 구원·해탈의 길을 발견해야 했기 때문이다. 2부가 던지는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우리 인생에서 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혜와 구원과 해탈을 얻는 데 군더더기 경험은 없다’는 게 될 것이다. 『싯다르타』는 많은 서구인들을 불교로 인도한 책 중 하나다. 그러나 불교·힌두교·도교·기독교의 융합을 시도한 『싯다르타』에는 생각하기에 따라 반(反)불교적인 요소도 있다. 『싯다르타』는 불교만 아니라 모든 제도화된 종교를 거부하는 텍스트다. 오늘 『싯다르타』가 필요한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우선 종교에 소속돼 있지 않았지만 영성적인 사람들이 일차적 독자층이다. 『싯다르타』는 성장 소설이다. 원래 서구에서 질풍노도의 풍랑에 흔들리는 젊은이들이 읽는 책이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중년·노년에 더 어울리는 소설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에는 절·교회·성당에 열심히 다녔지만 먹고살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보니 쌓이고 있는 찌든 때를 털어내고 싶은 독자들 에게도 잘 맞는다. 사성제(四聖諦)·팔정도(八正道)라든가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를 알면 더 재미있게『싯다르타』를 읽을 수 있다. 영성 분야의 ‘왕초보’도 매니어도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다. 『싯다르타』는 왠지 합계 1억 권 규모 베스트셀러 작가인 파울루 코엘류의『연금술사』를 연상시킨다. 이유가 있다. 코엘류는 1967년 20세 때 보호시설에 갇혀 있을 때『싯다르타』를 읽고 구원의 빛을 보았다.
    Sunday.Joins Vol 323         김환영 기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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